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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글/ 목목(木木)

【정견망】

불타발타라는 한자로는 각현(覺賢)이라고 한다. 원래 석씨(釋氏)로 카필라 국 사람으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할아버지 달마제바(達摩提婆)가 일찍이 북천축국(北天竺國)에 장사하러 갔다가 온가족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각현이 세 살 때 부친 달마수야리(達摩修耶利)가 사망했고 다섯 살 때 모친마저 잃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그의 종조부(從祖父)였던 구파리(鳩婆利)는 그가 총명한데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사찰에 데려가 사미(沙彌)가 되게 했다.

그가 17세 때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과 경전을 익히고 암송했는데 남들이 암송하는데 한 달 걸릴 것을 그가 암송하면 하루면 끝났다.

구족계를 받고 정식 비구가 된 후로는 더욱 수업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들을 널리 배워 통달한 게 많았다. 일찍부터 선(禪)과 율(律)로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하던 승가달다(僧伽達多)와 함께 계빈국(罽賓國)에 가서 같은 곳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달다는 비록 그의 재주와 식견에 탄복하긴 했지만, 아직 그의 진정한 수양은 알지 못했다.

한번은 달다가 밀실에서 문을 닫고 좌선을 하는데 문득 발타라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달다가 깜짝 놀라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발타라가 말했다.

“잠깐 도솔천에 가서 미륵불께 예를 올리고 왔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곧 사라졌다.

이에 달다는 비로소 그가 성인(聖人)임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 그 깊이를 헤아리진 못했다. 나중에 발타라의 신비한 변화를 여러 차례 보자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발타라가 불환과(不還果 역주: 아나함과를 말하면 더는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를 증득했음을 알았다.

이 당시 북조 전진(前秦)의 승려 지엄(智嚴)이 계빈국에 있었는데 불타발타라에 대한 높은 평판을 듣고 그에게 동토(東土)에 가서 교화를 널리 펼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발타라가 그의 요청을 불쌍히 여겨 마침내 허락했다. 이에 대중들을 떠나 스승에게 하직하고, 양식을 싸서 동쪽으로 갔다. 3년 간 온갖 고생을 겪으며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도중에 여섯 나라를 경유하였다.

나중에 발타라는 교지(交趾)로 왔고 이곳에서 배를 타고 해로를 이용해 중국에 가기로 했다. 그가 탄 배가 어떤 섬을 지나갈 때 그가 손으로 섬 위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머물 수 있겠습니다.”

선장이 말했다.

“지금 순풍을 만났는데 이런 기회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정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2백여 리를 더 가니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배가 다시 그 섬으로 향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제야 불타라의 신통력을 알고 이후로는 모두 그의 명령을 따랐다.

한번은 순풍을 만나자 다른 많은 배들은 모두 출항했지만 발타라가 “움직이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선장은 곧 배를 멈췄다. 이미 앞에 출항한 배들은 모두 일시에 전복되어 버렸다.

한밤중에 갑자기 발타라가 모든 선박들을 출항시키라고 했다. 다른 선박들은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발타라가 탄 배만 홀로 출발했다. 얼마 후 해적들이 쳐들어와, 남아 있던 배와 사람들은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시간이 흘러 발타라의 배는 청주(靑州) 동래군(東萊郡)에 도착했다. 그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장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그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만난 후 함께 불법을 담론했다.

나중에 발타라는 장안 등 중국 여러 지역에서 널리 법을 알렸고 또 많은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장안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지고 많은 제자들이 따르자 주변에서 근거 없는 비방과 원망이 일어났다. 장안의 승려들이 그더러 떠날 것을 요청하자 발타라는 “나 자신은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서, 떠나고 머무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다만 회포(懷抱)를 다 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일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명과 함께 묵묵히 떠나 남쪽 여산으로 향했다.

여산에서 혜원(慧遠)을 만나자 혜원은 오랫동안 그의 풍모와 명성을 사모해왔기에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았다.

발타라는 한곳에 편히 머물기보다는 두루 다니면서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여산에 일 년 정도 머무른 후 다시 강릉(江陵)으로 갔다.

그곳의 많은 사대부와 서민들이 앞을 다퉈 예를 올리고 받들며 보시하려 했다. 하지만 발타라는 모두 받지 않았고 발우를 들고 탁발을 다녔는데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당시 진군(陳郡)의 원표(袁豹)가 크게 탄복해 태위(太尉) 유유(劉裕)에게 추천했다. 유유가 그를 만나보고는 공경하며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빠짐없이 공양하게 했다.

나중에 그와 함께 경성에 돌아가 도량사(道場寺)에 머물게 했다.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4년(418)에, 맹의(孟顗)와 저숙도(褚叔度)가 발타라를 초청해 번역팀 수장으로 삼았다.

발타라는 법업(法業)·혜엄(慧嚴) 등 1백여 명과 함께 도량사에서 경전을 번역했다. 문장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여 정하고,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회통시켜 미묘한 경전의 뜻을 살렸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니원경(泥洹經)》, 《수행방편론(修行方便論)》 등 모두 15부 117권에 달한다.

유송(劉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6년(429) 원적하니 향년 71세였다.

자료출처: 《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