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구우주(舊宇宙) 상생상극(相生相克)의 이치가 정법 중에 바로잡히고 있는 가운데, 구세력은 중공사당의 사악을 이용하고 우주 중의 일부 패괴(敗壞)한 물질요소를 조종해 사부님의 정법을 저애하고 대법제자가 사람 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1999년 사악이 공개적으로 무리한 박해를 시작할 때부터 이번 박해는 곧 실패로 정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왜냐하면 사(邪)가 정(正)을 이길 수 없음은 불변부동(不變不動)의 하늘의 이치이고 일정압백사(一正壓百邪)는 우주가 정(正)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체현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법제자는 사부님께서 부여하신 신성한 호칭이다. 이 호칭 자체가 바로 우주 중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며 자비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중공사당 무신론의 주입을 받아 자신의 본성의 일면이 수시로 무신론(無神論)의 교란을 받아 늘 이 거짓 현실 속에 빠져들게 한다.
어느 날 길을 가다 겪은 한 가지 작은 장면이 내게 일부 감촉을 주었다.
도로를 가는데 양편으로 차가 너무 많은데다가 근본적으로 보행자에게 양보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 가운데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내 왼쪽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더니 손을 들어 왼쪽 차량을 멈추게 했고 마침 우측에서 또 한 할아버지가 오더니 역시 손을 들어 우측에서 오는 차량들더러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렇게 되자 좌우측 양쪽 차량이 모두 멈춰섰고 나는 그들과 함께 길을 건널 수 있었다. 걸어가면서 나는 양옆에 모두 사람이 있으니 자신이 아주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장면이 내게 일부 감촉을 주었다. 방금 발생한 일을 되돌아보면, 나는 마치 속인 중의 현실적인 감수를 아주 신뢰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법제자의 호칭을 부여받은 사부님의 제자인 내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정말로 믿었는가? 막 발생한 장면은 자신의 수련상태가 아직도 사람의 현실 속에 정체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속인 중의 가짜 현실을 중시하는가? 왜냐하면 머릿속에 아직 중공사당의 독소인 무신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법수련 중에서 제자들더러 사부님의 자비를 시시각각 늘 감수할 수 있게 해주셨지만 일단 속인의 현실 속으로 오면 쉽게 약화되곤 하는데 사실 무신론의 독소가 도처에서 체현된 것이다.
우리가 소위 모순(矛盾)에 직면했을 때 이 모순을 제고할 계단이라 생각하는가? 구세력이 우주 중의 패괴한 물질요소를 이용해 대법제자를 교란할 때 우리는 사부님께서 신변에 계시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세상이란 이 큰 무대에서 스스로 주인공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법을 스승으로 삼고 본성의 일면이 주체(主)가 되게 하며 사부님의 말씀만이 통한다는 것을 아는가?
사부님의 법으로 자신의 부족을 대조해보니 나는 아주 많은 방면에서 무신론에 독해되어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바로 수련 중에 사악의 교란에 부딪힐 때 두려운 환경 속에 있을 때면 주위의 사악한 분위기가 몹시 판칠 때, 인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사악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위적으로 자신을 피동적인 위치에 놓았다.
내 기억에 1999년 사악이 대법에 대해 무리한 탄압을 했을 때, 나는 매일 출근하면서도 마음이 아주 불안했다. 어느 날인가 당장 내일이라도 사악이 또 무엇을 만들어낼까 우려했다. 그러나 이렇게 겁이 많은 상태에서도 오히려 사부님의 가지 하에 하루하루 편안히 넘어가자 스스로 두려운 마음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느꼈다. 이렇게 20여 년이 지나갔고 우리 온가족이 사부님의 가호하에 사부님을 따라 걸어 지나왔다.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지 또 제자를 위해 얼마나 많은 관을 배치하셨고 제자가 넘어갈 수 없는 마난을 얼마나 많이 화해시켜 주셨는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사부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호탕(浩蕩)하며 제자와 우주 중생을 위해 사부님께서 하신 일체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
제자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구도하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한 가지 작은 장면에도 피동적이었지만 그래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부님의 가호 덕분이다. 그렇다면 나의 신(神)의 일면은 왜 무신론에 억제 당했는가? 왜냐하면 자신의 공간장이 순정(純淨)하지 못해 사람의 관념과 사람의 집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과 집착은 중공사당이 선양하는 무신론 환경 하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면 사상이 곧 무신론에 좌우된다. 사부님께서 바로 옆에 계신 것을 생각하지 못하며 대법의 무소불능(無所不能)함을 믿지 못하며 문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부면(負面)사유로 일이 발전하는 결과를 스스로 상상하는데 종종 매번 늘 실패로 끝나곤 한다. 그럼에도 교훈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문제에 부딪힐 때 이런 장면이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한 차례 한 차례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최근에 부딪친 일 역시 그랬다. 처음에 나는 자신에게 “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다.”(《정진요지 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는 사부님의 말씀을 일깨워주었다. 눈앞의 환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며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면사유가 끊임없이 올라오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연극의 줄거리를 편집하는데 심지어 아주 세부적인 내용까지 생각해낸다. 생각이 끝난 후 또 강렬한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에 또 끊임없이 배척하는데 이렇게 끊임없이 편집하고 또 끊임없이 배척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머릿속으로 사람과 신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임을 생각했다. 사람의 사상과 정신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당신의 염두가 사람으로 떨어질 때면 곧 상응하는 것이 사람 이 한 층에서 환상(幻象)으로 나타난다. 만약 당신이 사부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한다면 곧 불법무변(佛法無邊)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럼 나는 왜 사상염두(思想念頭)가 늘 사람 이곳으로 떨어지는가? 이는 좋지 않은 물질이 장애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패괴한 물질인가? 법에 대조해 안으로 찾자.
눈앞에 닥친 문제에서 왜 자신의 부면물질이 늘 되돌아 올라오는지 찾아보니 사악이 대법을 박해할 때 법으로 자신의 부족을 가늠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대했다.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거무스레한 패괴물질, 이런 좋지 않은 것들은 다른 공간에서 각종각양의 저령(低靈)패물(佩物)인데 그것들은 형상이 있고, 관념으로 구성된 가아(假我)이다. 문제가 나타날 때 곧 자신의 수련상태에 간극이 생기게 하는데, 이 간극이 법에 대해 견정하지 못함을 만들어낸다. 만약 이때 법의 기점에 설 수 있다면 이 가상을 타파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하기에 어떤 일도 모두 좋은 일이다.”(《세계파룬따파의 날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에게 문제에 봉착해 이를 좋은 일로 간주했는가 물어보았다. 대답은 당연히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위 모순과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나는 마치 이미 습관이 된 것처럼 첫 일념은 바로 불평이고 체현되어 나오는 상태는 바로 소극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바르지 못한 사상이 조성한 좋지 않은 결과다. 때문에 아주 두려운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방식으로 모순의 발생을 회피하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한다. 모순은 또 내가 채택한 방식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당신더러 막으라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이때 자신의 낙담하는 심정은 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고통스럽고 아주 피곤함을 느끼는데 마치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사부님의 법은 한마디로 나의 잘못을 설파하셨다. 원래 스스로 자신을 괴롭힌 것으로 남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정신적으로 모순이 온 것을 아주 짜증스런 일로 승인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 물질의 신체와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이 일성(一性)이기 때문에 사람의 이 감각기관과 감각은 곧 모순이 가져온 고통이라고 느낀다. 원래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속에서 줄곧 배회하면서 뛰쳐나오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현재 인간세상은 이미 끝 중의 끝에 왔고, 난세(亂世) 중의 난상(亂象)은 더욱 강렬하게 사회를 교란한다. 비록 정사(正邪)의 다툼이지만, 당신들은 자신을 잘 지켜 교란 받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진상을 더욱 잘 알려 세인을 구해야 한다.”(《대만법회에 보냄》)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난상(亂象)에 교란 받지 않으려면 법을 지키고 심법(心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 상태를 가지고 말하자면 정말로 마치 신체 속의 정사대전(正邪大戰)과 같다. 즉, 신체 내에서 두 가지 물질의 교전인데 한 면은 정(正)의 요소이고 다른 한 면은 패괴한 요소다. 형상을 보면 정(正)의 요소는 우리 대법 속에 동화된 생명이고 패괴요소는 우주 중에서 도태될 구우주의 변이된 물질이다.
우리의 수련 잘된 일면이 주체(主)가 될 때면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모순 앞에서 정념(正念)이 있으며 법으로 가늠함을 아는데 이때의 상태는 바로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는 것이라 법의 가지(加持)를 감수할 수 있고 사부님께서 제자 옆에 계심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환상 속에서 형성된 가아(假我), 그것은 진아(真我)와 대립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그릇과 같은데 그만큼의 용량이다. 좋든 나쁘든 모두 이 그릇 안에 있는데 체내에서 정사대전이 발생할 때 바로 이 그릇 속 정(正)의 요소와 부(負)의 요소 사이의 대결이다. 부의 요소가 정의 요소에 의해 해체될 때면 그럼 부의 요소가 존재하는 공간장이 정의 요소로 대체될 것이며 정념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이 그릇 속 정의 요소는 갈수록 더 많아진다. 이때 당신의 자비의 장(場)이 아주 큰 범위를 뒤덮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어떤 요소가 조성한 것인가? 나의 깨달음은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두려움의 근원이 ‘사(私)’에서 내원하는데 이 사는 각종각양의 부면(負面)물질로 분해될 수 있다. 두려운 마음이 나올 때 대부분 배후에는 ‘자아(自我)’가 잠복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두려움은 아주 완전한 부면물질이고 사부님의 정법(正法)은 우주 중의 일체 바르지 못한 요소를 바로잡는 것이라 두려움이란 이 부면물질이 폭로되어 나올 때면 이는 정법이 이 한 층을 충격한 것이다.
이 부면물질은 몸에서 숨을 곳이 없는데, 이때 우리가 대법으로 가늠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기만 하면 곧 정법의 홍세(洪勢)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 두려운 마음이 순식간에 해체되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수련 중에서 무신론의 독해를 받아 수시로 자신도 모르게 사람 속으로 떨어지면 사람 속에서 보호를 구하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법에 대해 견정하지 못한 것으로 관건적인 시각에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사실 두려움은 표면적인 반응이고 진실한 표현은 자기 공간장(空間場) 구우주 요소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근원은 ‘사(私)’이고 이 ‘사’는 또 구우주의 특성인데 구우주는 정법 중에서 새롭게 바로잡혀야 한다. 대법제자는 우주 중의 정(正)의 요소를 위해 책임지기 때문에 대법제자의 일사일념이 모두 절대적으로 순정(純淨)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 자신의 공간장에 아무리 강렬한 사람마음과 집착이 반영되든 그것은 모두 우리가 제고할 계단이며 우리를 성취시키는 요소로 법을 지키면 곧 해낼 수 있고 사부님을 믿으면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무신론의 독해를 타파하고 도처에 드리워진 무신론의 그림자를 경계할 수 있다.
수련이란 아주 기묘하다. 마치 너무 복잡해서 해결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앞으로 더는 나아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마치 이정표를 볼 수 없는 사막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 사부님을 생각할 수 있고 사부님의 법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이 일념(一念)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상태를 형상적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사방에서 사나운 파도가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는 외딴 섬에 혼자 고립되어 있는데 이때 하늘에서 한 부의 하늘사다리가 내려온다. 이때 우리는 구명의 하늘 사다리를 꽉 잡아야 한다. 만약 집어삼킬 듯한 파도가 칠 때 잠시라도 느슨해지면 곧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오직 다그쳐 하늘 사다리를 꽉 움켜잡고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 옆에 계시니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눈앞의 가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면 그럼 곧 환상 속의 마난이 해체되어 소위 문제가 해결된다. 정말로 ‘불법무변(佛法無邊)’하고 호탕한 사부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다.
최근 며칠간 겪은 일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것이 아주 많은데 가장 깊은 감수라면 바로 사람이 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가호해주시는 대법제자가 되어 제자 및 온가족이 함께 걸어왔고 사부님의 가호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법의 깨우침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 난세(亂世)의 난상(亂象)인 말법시기에 만약 사부님과 대법을 견정하게 믿고 다그쳐 집으로 돌아갈 하늘 사다리를 잡지 못한다면 그럼 사람 속에 떨어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에는 더 깊이 빠져 들어가 하늘로 돌아갈 문이 없고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없어질 것이다.
개인의 작은 수련체험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6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