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대법제자
【정견망】
오늘 여러분들과 교류할 제목은 신이 종래로 잊은 적이 없는 생명이다.
2년간 멈춰섰던 션윈(神韵) 순회공연이 마침내 재개되었고 2022년 제14회 대만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다. 지난 5~6월부터 동수들은 전력을 다해 션윈을 널리 알리고 있다.
우리 지역 보도원이 내게 전화를 걸어 시장에서 명혜주보(明慧週報)와 션윈 DM을 돌리다가 한 할머니를 만났는데 자신이 파룬궁을 알고 있고 또 나를 안다면서 손녀딸이 나한테 배운 적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도원이 나더러 그녀를 공연에 초대해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원래 그녀들을 초대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이미 2차례나 션윈 공연을 보았고 또 나와 일부 인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두 아이를 출산한 후 연속으로 4년간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아이들이 계속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정식으로 학교에 사표를 내고 집에 작은 사설학원을 열었다. 내 아이들에게 중국 성철(聖哲)들의 경전을 가르쳤고 또 학교 동료들과 주변 이웃들 중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내게 보내 배우게 했다. 다년간 학원을 운영하면서 오고 간 아이들이 정말 적지 않았는데 날마다 오전이면 우리 집에 와서 낭랑하게 책을 읽었는데 우리 집 마당에는 아이들 신발이 가득했다.
어느 해 여름 방학, 세 살이 채 안된 여자 아이가 우리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희고 불그레하면서 통통한 얼굴에 눈물자국이 있었다. 아이는 왕방울처럼 큰 눈에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입을 우물거리면서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잠시 후 그녀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 골목 앞쪽 끝에 살았는데 우리 집은 골목 뒤쪽 끝에 있었다. 우연히 두어 번 마주쳐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때 할머니가 말했다.
“이 어린 손녀딸이 너무 불쌍해요. 누구 하나 글자를 가르쳐줄 사람도 없고, 저는 아는 글자가 몇 개 없거든요!”
내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 공부하게 하면 어떨까요?”
할머니가 의심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어린데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방학이 끝난 후 다른 아이들은 휴일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학교에 갔다. 나는 아이 할머니에게 이 아이를 매일 나한테 보내면 글자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줄곧 “이렇게 어린데 가능할까요?”라고 의심하며 말했다.
하늘은 아이들에게 아주 민감한 귀를 주셨다. 생각이 가장 단순한 아이 때는 먼저 들어간 것 위주로 순정(純淨)한 원소를 받아들인다.
우리 이곳에 오는 아이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초등학생들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수시로 들어올 수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흥미가 많고 집중도 더 잘하는데 긴 고문(古文)이나 고시(古詩)를 외우는 것도 유창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정력(定力)도 깊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는데, 말하자면 여전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어린 아이들은 대단히 성숙하고 또 순진(純真)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이 어린 아이는 매일 오전이면 나를 찾아왔다. 날씨가 좋으면 마당에 작은 나무의자를 당겨 앉았다. 제일 처음 배운 책은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로 아이는 운율이 있는 문자를 아주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고 한 글자 한 글자 가리키며 한 구절씩 따라 읽게 했다. 발음과 글자를 동시에 알려주었는데 좀 쉬운 단어들은 생각해보고 말하게 했다. 아이의 연상력은 아주 풍부해서 비유로 가득한 표현을 했다. 아이는 늘 “이런 게 아닐까요!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했다.
아이는 참을성이 아주 많아서 한 시간을 지속할 수 있었다. 때로 말을 많이 하면 금방 2시간이 지나갔는데 피곤하냐고 물으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아마도 재밌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당시(唐詩) 속의 문자에는 색채가 있고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꾸준히 읽다보면 기쁨으로 충만하고 또 한 층 한 층 보다 깊은 운치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손녀가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와서 보고는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고 여겼다. 내가 비록 우리는 아주 즐겁다고 설명해주긴 했지만 그녀는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내게 돈을 주거나 물건을 주곤 했는데 나는 직접 기른 채소만 남기고 더 이상의 돈은 쓰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가 서서히 자기 집안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고 둘 다 마약 중독자였다. 아빠가 마약치료센터에 있을 때 엄마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출산 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당시 할머니는 이 아이를 맡아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다고 한다. 혹시라도 모체의 마약성분이 아이에게 남아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마 자기 핏줄을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병원 검사를 거쳐 아이에게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집에 데려왔다는 것이다.
또 할머니는 어릴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고 이후 평생 등이 굽은 채로 살아왔다. 게다가 집이 가난해서 남의 모욕을 많이 당했고 공부도 초등학교 이후로는 할 수 없었다. 남편마저 아주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혼자 일남일녀를 키워야 했다.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이 10대부터 마약에 중독되어 치료센터를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엄마가 다스릴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서 인생의 무게가 사람을 감당하기 어렵게 했지만 그러나 뿌리 깊이 박힌 자기비하 속에 생명에 대한 그녀의 불복이 드러났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을 마주한 그녀는 여전히 아이를 양육할 책임을 졌고 일도 아주 열심히 해서 마침내 넉넉한 은퇴자금을 마련했으며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바로 제구실을 못하는 아들과 이 손녀의 교육 및 장래였다.
이런 자세한 사정을 알고 나서 나는 그저 사부님께 이들을 도와주십사 기도했을 따름이었다. 고문(古文) 기초를 학습하면서 아이는 글자 인식능력이 강해졌다. 나는 날마다 아이와 함께 《전법륜》을 학습하고 가부좌를 하기 시작했다. 또 따로 시간을 내서 할머니와 《전법륜》을 배웠다. 할머니는 인생에 겪은 것이 워낙 많기 때문인지 법리에 대한 인식이 아주 깊었다.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마약치료센터로 아빠를 만나러 간 적이 있는데 할머니 말로는 아이가 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빠를 봤을 때 아이는 이미 다섯 살이었다. 아이 아빠는 어느 날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사망했는데 그때 아이가 할머니에게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작은 아이가 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런 말을 했는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지금껏 아이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아이는 내 앞에서는 영원히 앳된 얼굴에 상량한 목소리를 지닌 아이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나는 또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곤 했다. 오늘날의 교육은 아주 번잡해서 한 무더기 교과서와 참고서가 있다. 이 아이는 수학 연산에 비교적 약했다. 나는 우선 진주목걸이를 이용해 숫자를 가르쳤다. 반복적으로 만져서 덧셈 개념에 익숙해지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또 이 과정 중에 늘 “어렵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깨워주었다.
그 결과 그녀가 써낸 답은 1+1=1, 2+2=2, 3+3=3이었다.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 대체 어디서 이렇게 배웠니?”
아이는 좀 긴장한 듯 얼굴이 엄숙해졌고 눈을 크게 뜨고는 내게 말했다.
“선생님, 어렵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좋아, 어떻게 너를 가르칠 것인가는 선생님이 노력해야 하겠지만 어떻게 스스로 배울 건지는 네가 노력해야겠지. 우리 둘 다 어렵다고 두려워하지 말자!”
그녀가 마침내 긴장을 풀며 웃었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매달 내게 교육비를 주려고 했지만 내가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자 대신 좋은 음식을 박스로 보내왔다. 내가 우리 집 식구가 적어서 다 먹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삼일에 한 번씩 음식을 보내왔다. 그녀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나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다음에는 할머니가 어떤 것을 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익지심(利益之心)이 올라오는구나. 이건 안 된다. 그녀를 원망한 게 아니라 자신의 정념(正念)이 부족하고 견지하지 못한 것을 탓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3강에서 말씀하셨다.
“서서히 작은 기념품을 주면 받는 데서부터 점점 큰 물건까지 주어도 가지는데, 나중에는 적게 주어도 안 된다. 결국 그는 말한다. “나에게 그렇게 많은 물건을 줘서는 뭘 하겠소. 돈을 주시오!” 돈을 적게 줘도 안 된다.”
계속해서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고 명리심이 전부 일어나면 단번에 훼멸되고 수련을 헛되이 할 수 있다. 이에 나는 할머니에게 더는 그 어떤 물건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녀를 이곳에 보내지 않겠노라고 했다.
나는 이 골목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나와 함께 6년을 공부했지만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학부모가 감동해서 명절 선물을 보내면 나는 그들에게 이번 한번은 받겠지만 앞으로는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알려주었다. 선물이 오가면 내게 많은 번거로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그들도 잘 알기에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아주 완고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차라리 손녀더러 공부하지 말라고 하세요.”라고 했다. “그럼 휴일에 아이를 보내시면, 《전법륜》을 두 번 완독할 수 있게 합시다!” 우리 공부가 끝난 후 할머니는 책과 호신부를 모두 내게 돌려보냈다.
나와 그녀들의 인연은 여기서 일단락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 아이는 《전법륜》을 두 번 읽었고 할머니도 절반을 읽었으며 또 션윈을 두 번이나 봤으니 이미 구도된 생명이라 그만하면 됐다고 여겼다.
사부님께서는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정념(正念)을 확고히 하고 법을 수호하는 외에 속인의 일은 하되 추구하지 말고 행하건 행하지 않건 모두 집착이 없어야 하며 고정 관념이 있어선 더욱 안 된다.”
아마 사부님께서 나더러 여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말고 보다 많은 사람을 구하게 하셨을 것이다. 나는 원래 학교에 복귀해 겸직으로 수업을 하는 외에 또 다른 두 학교에서 겸직으로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연령대의 중생을 만났다. 또한 업무에 시간을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했고 관광지에 나가 진상을 알릴 시간도 늘어났다. 아침에 일찍 나가 저녁에 돌아오다 보니 그녀들과 만남도 아주 적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는 벌써 올해 중학교를 졸업했고 대입시험[역주: 대만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5~6년제 전문학교 시험을 볼 수 있다]도 치렀다.
우리 지역 보도원이 나더러 그녀들을 다시 션윈에 초청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좋다”고 했다. 한동안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전화를 걸자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내가 물어보았다.
“션윈을 기억하니?”
“기억해요! 너무 좋았어요.”
나는 좀 의아했다. 당시 아이는 겨우 5살, 6살이었는데 그렇게 어린 나이임에도 뜻밖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물었다.
“올해 공연 보고 싶지 않니?”
“할머니한테 여쭤 볼께요. 장보러 나가셨어요.”
“할머니 돌아오시면 한번 여쭤보렴!”
사실 나는 속으로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년 전에도 몇 차례 션윈공연에 초청한 적이 있는데 늘 아이가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구실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와 SNS로 연결해 션윈 소개 영상을 몇 개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프로필 사진에 산과 은하계 사진이 있었다. 보통 프로필 사진은 개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사용하는데 15세 여자 아이들이라면 대부분 카툰의 예쁜 미녀나 아니면 내가 보기에 좀 기괴한 것들을 사용한다.
아이 할머니가 돌아와서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코로나가 이렇게 심하니 무서워요. 보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손녀라도 보게 하세요!”
그녀는 한번 생각해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나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을 초대했지만 사실 그다지 적극적이진 않았다. 그저 보도원이 일깨워주어 한번 해보겠다고 한 것이다. 적어도 하는 척은 했다. 하지만 진정한 원인은 10년 전의 일 때문이다. 나는 당시 일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나는 손녀의 길을 가로막은 할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틀이 지났지만 할머니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내 만약 할머니가 허락하시면 나와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가면 되니까 교통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법리상에서 인식한 것은 매사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인지 보아야 하며 하고 싶은 일인지는 보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수련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의 정(情)이고 위사(爲私)한 것이다. 더는 소홀히 하지 말고 이 일을 간절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녀의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가 나오기에 말했다.
“(공연) 보러가세요!”
그녀는 여전히 코로나가 무섭다고 했다.
“그럼 손녀라도 보게 하세요!”
“좋아요!”
“내년에는 어르신도 보세요!”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속으로 아주 든든해진 느낌이 들었다. 10년 전의 매듭을 오늘에야 비로소 해결한 것이다. 나는 어떤 마음을 찾아냈는가? 나는 어떤 마음을 내려놓았는가? 나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 남이 내 뜻에 따라 하길 원했지만 내가 좋다고 여기고 내가 옳다고 여긴 것을 무시한 것이다. 당시 그녀가 어떤 어려움을 넘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속에 수많은 매듭이 생겼던 것이다.
션윈 공연 당일 나는 관광버스에서 수년 만에 아이와 비교적 많은 대화를 했다.
내가 물었다.
“학교는 어디로 갈 생각이니?”
아이는 대만 중앙산맥 반대편에 있는 간호전문대학에 간다고 했다.
“할머니가 허락하셨어?”
“처음엔 반대하다가 나중에 동의하셨어요.”
그녀는 또 5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하면 취업 걱정 없이 바로 직업을 구할 수 있고 또 나중에라도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정규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울러 자신은 줄곧 간호사가 되어 다른 생명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이 대화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아주 명확했고 아주 성숙했기 때문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상당히 차이가 났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설령 대학을 졸업하거나 심지어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대부분 부모의 영향을 받거나 배치에 따른다. 자기 주관이 부족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조급해하면서도 흔히 막연하게 여긴다.
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자 국문(國文)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고문을 읽고 글씨도 잘 써서 각종 어학대회며 웅변, 낭독, 작문 대회가 있으면 교사들이 모두 그녀에게 참가하게 했다. 이렇게 단련되다보니 담도 커졌다.
내가 말했다.
“하늘이 너를 돌봐주셨구나!”
그러면서 또 물었다.
“왜 은하계 사진을 프로필에 올렸니?”
그녀가 두 글자로 대답했다.
“호한(浩瀚)하니까요.”
그러면서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선생님도 그렇게 여기지 않으세요?”
너무나도 불가사의했다. 그녀는 이미 예전의 그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또래보다 침착하고 주관이 뚜렷한 소녀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아주 차분했고 묻는 말에 대한 대답도 아주 간결했다.
나는 아주 직접적으로 물었다.
“너 차 마실줄 아니?”
지금 젊은 사람이나 아이들 중에 어디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 이가 있는가?
그녀가 말했다.
“마셔요!”
내가 또 물었다.
“할머니 때문에 마시는 거니?”
“할머니는 안 마셔요.”
내가 차를 마시게 된 이유를 묻자 학교에서 야유회를 갔다가 찻잎을 보고 사서 집에 가져와 끓여서 마셔보니 마시자마자 좋아졌다고 했다.
내가 또 물었다.
“다도(茶道) 배워볼래?”
나는 매주 한 차례 동수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전법륜》을 공부하고 다도에 대해 교류한다. 이 모임에 대해 알려주고 그녀에게 할머니께 참가해도 좋은지 여쭤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뜻을 같이하는 동호인 모임이라 회비는 따로 없다.
1주 지나서 그녀는 아주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처음인데도 가부좌를 한 시간이나 틀었다. 교류할 때 모두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30분 지각한 고3 청년제자를 겨냥했는데 그녀는 그저 한마디로 말했다. “자율(自律)이 바로 자유잖아요!”라고 했다. 모두들 멍해졌고 또 웃었다.
나는 《대장금》 DVD를 빌려주었다. 그녀가 음식(지금도 할머니를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에도 흥미가 있어서 뭔가 계시나 격려를 받았으면 해서다. 또 장차 간호학을 배우는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1주 후에 다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묻자 그녀가 아주 열정적으로 말했다.
“장금이는 진선인(真善忍)을 다 해냈어요. 의지력이 아주 강해요.”
나는 또 《우리가 날아올라(扶摇直上)》란 애니메이션을 주고 나중에 본 소감을 물었다. 그러자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말대꾸하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전반 노정이 보기에는 무질서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질서가 있다.”(《각지설법 12》〈세계파룬따파의 날 설법〉)라고 하셨다.
소녀의 이야기는 이때부터 방향이 변했고 내게 비범한 의미를 펼쳐보여 주었다. 이는 신(神)이 종래 잊은 적이 없는 생명으로 사부님께서 그녀를 관할하신 것이다. 질서 있고 체계적으로 일체를 준비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뉴욕좌담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일단 사람이 수련이란 이 길을 걸으면 그의 앞날에는 우연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수련은 순서 있게 배치한 것이고 시간은 그렇게 아주 충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우연한 일이 있을 수 없으며, 모두 아주 긴박하게 배치된 것이다.”
또 《휴스턴법회설법》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기 운명이 있는 것이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하고자 해도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배치한 것이 아니라, 신(神)이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그녀를 배치하셨고 또 나를 배치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그녀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 모두 똑같이 대하신다.
사부님께서는 《2015년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사부는 중생을 널리 제도하기 위해 왔기에, 당신에게 오직 그래도 구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으면 나는 당신을 구할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나쁘든지 나는 그런 좋은 수련생을 대하듯이 당신을 대할 것이며, 당신이 구원될 수 있도록 하려 하는바, 당신은 내가 당신을 다르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특무들을 포함해서 당신은 내가 당신에 대해 다르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없고, 당신도 내게서 당신에 대한 어떤 특수한 표현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얻은 계시는 내게 다시 한 번 사람속의 관념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매 생명의 선택을 존중하도록 했다. 자신의 인정(人情)의 좋고 나쁨에 함몰되지 말아야 하는데 다시 말해 구세력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집착을 내려놓고 하면서도 구하지 않자 이것이 나로 하여금 온몸이 가벼움을 느끼게 했다.
사부님께서 우리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셨다면 제자들은 그렇게 중생을 대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매 제자를 차별하지 않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매 중생에 대해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일체는 신의 배치에 따라야 한다. 신은 종래도 단 하나의 인연 있는 생명도 잊은 적이 없다.
이상은 개인의 단편적이고 작은 심득교류다.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