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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바위(顽石)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요 며칠 어쩐 일인지 남편이 늘 기분 나쁜 표정이었고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답답하고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시간을 내서 시댁 친척들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만족하면 되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고 또 나와 상의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

요 며칠 그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우리 사이에 어떤 물건이 가로 놓여 막은 것처럼 말을 해도 잘 통하지 않았고 마치 서로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수련인으로서 이런 상태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우리는 이 기간에도 줄곧 함께 법을 배웠다. 비록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우리가 《전법륜》을 들고 법 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 사이의 간격이 약해지고 공간장이 상화(祥和)로웠다. 그러다 바로 오늘, 우리는 또 법 공부를 시작했다.

법 공부 전에 나는 또 고민하고 서글펐다. 어떻게 해야 남편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왜 나를 배척하는가? 심지어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 공부를 할 때만큼은 이런 생각이 사라지고 전일(專一)하게 법을 공부했다.

이때 남편의 일부 동작이 내 눈에 거슬리고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했는데, 이어서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이 나를 경각하게 했다. 즉 자신의 마음이 들썩일 때 마치 성문을 활짝 열어 내 성(城)이 위험에 처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이 섞여 들어오기 때문인데 내 느낌이 그랬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마치 누군가 계획한 것처럼 나를 짜증나게 하는 남편의 소위 결점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내 사상 속으로 수송되었다. 나는 수송된 물질들이 모두 내가 남편에 대해 오랫동안 형성한 관념물질임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그 단단한 바위와도 같았고 또한 독소물질을 발산했다. 오랫동안 형성된 관념은 업력이고 시커먼 것이기 때문에 이 물질이 발산될 때 불편함을 느끼고 남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왜 남편은 나와 대화하려 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원인인데, 내 공간장(空間場)의 완고한 바위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면(負面)물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을 때는 진위(真偽)를 똑똑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법을 공부할 때는 법을 공부하는 에너지장이 일체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내게 이 단단한 바위를 점화해주신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 어떤 모순에 부딪히더라도 늘 자신의 공간장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하셨다.

문제의 근원을 찾았으니 그것을 파내고 해체할 수 있다. 마치 앞에 놓인 한 무더기 난마(亂麻)처럼 두서가 없어서 정리할 방법을 찾지 못하다 완고한 바위가 장난을 친 것을 발견하면 난마 속에서 두서가 있어 정리할 방법을 찾은 것과 같다. 상대방의 경직된 태도도 조금씩 변했고 서로를 가로막았던 물질이 약해졌으며 아울러 끊임없이 좋은 방향으로 개변되었다.

단체 법 공부 이전과 이후의 변화는 나를 감격시켰다. 사실 한 집에서 수련하는 대법제자 중 대부분은, 때로 부부간의 갈등이 더욱 두드러진다. 가령 어떤 이는 사악의 박해 때문에 수련하지 않지만, 다른 한쪽은 꾸준히 수련하면 두 사람의 사상차이가 매우 커진다. 상대방의 심성이 속인의 기초 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소통하고 교류할 공통점이 적어진다.

또 어떤 부부는 쌍방이 수련하지만 서로 사유방식이 다르고 문제를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법에서 제고해 안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내지 못한다. 이로 인해 부부 동수 사이에 모순이 생기고 부부 사이에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이런 사례들을 나 역시 많이 보았다. 그러나 법을 배운 후의 변화를 통해 나는 단체 법 공부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이고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야만 대법 속에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최근 다른 공간의 사령(邪靈)이 철저히 멸망하기 전에 죽어라 발악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교란 요소가 확연히 심해졌고 화나는 일들이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했다. 또 사상업도 끊임없이 대뇌에 반영되었고 심지어 남편의 결점을 훨씬 크게 확대시켰다. 자신을 통제해 그와 어울리기 싫게 만들고 그를 멀리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몇 차례나 떠오르게 했다. 때때로 나 자신도 이 두려운 생각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우선 나는 구세력의 변이된 배치를 절대 승인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우리를 고험할 자격이 없는데, 우리 대법제자의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으로 다 사부님께서 주관하신다. 먼저 법에서 기점을 바르게 세운 후에 사부님의 법에 따라 자신의 부족을 찾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달프게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사람은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고난에 대항하는데, 목적은 좀 행복하게 살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중에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피해(傷害)를 받지 않고 어떻게 잘 살며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공명을 성취하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얻고 어떻게 강자가 되겠는가 하는 등등이 형성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런 경험이 있는 동시에 또한 인생의 관념이 형성되었고 경험은 또 실천 중에서 관념으로 하여금 완고(頑固)하게 변하도록 하였다.”

(《정진요지 3》〈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지금 나는 바로 이 고난에 대항했는데 고난에 대항하는 배후에는 행복하게 살고 싶고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며 그 속에서 자신의 사욕(私慾)을 만족시키려는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는 또 쟁투심이 있어서 마음속으로 상대방과 암암리에 대결하면서 끊임없이 단단한 바위를 보호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배척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내 느낌은 마치 그의 곁에 잠시라도 있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바람을 쐬고 싶었다. 사실 이것은 내 몸 안의 좋지 않은 물질이 해체되려는 것이다. 대법에 의해 바로잡힌 공간장에서 이 좋지 않은 물질을 자양할 토양이 없어지고 그것이 소각되려 하니 마치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이 단단한 바위가 바로 이렇게 반영된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참아내야 하며 심성을 지키고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비록 속마음은 만마(萬馬)가 내달리는 것처럼 시끄러웠지만 겉으로는 아주 평온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 고통, 원망, 소극적이고 어쩔 수 없는 모든 것들이 다 나왔는데 더는 그 어떤 것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고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에 나는 끊임없이 법을 외웠고,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사상을 비우려고 노력했고 가급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불가에서는 공(空)을 주장한다”(《전법륜》)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님의 법을 지키며, 이 고통을 좋은 일로 여겼고, 나를 위해 길을 닦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상대방과 대치하지 않았고 자신의 관념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관념을 바꾸고, 한 걸음 물러섰는데, 비록 심성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좀 억지로 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자신을 변화시켜 자신의 관념을 바꿨으며, 결과를 보지 않았다. 바로 행하되 구함이 없었다.

내가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았을 때 몸이 그렇게 뻣뻣하지 않고 심태도 훨씬 좋아졌으며 사람도 착해져서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따지웬회의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속인은 ‘상유심생(相由心生)’이란 이 한 층의 뜻을 모르는데, 실은 바로 자신의 요소가 자신의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다.”

사부님의 법은 내게 내 주변의 모든 게 우연이 아니며 모두 자신의 염두에서 조성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지, 밖으로 찾으며 원망해선 안 되며, 자신의 사상 내원이 대법의 표준에 부합하는지 분명히 구별해 제때에 모든 바르지 못한 요소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수련인의 상태이며 소위 단단한 바위가 사라질 수 있다.

현 단계에서 작은 수련 체득이니 바르지 못한 점이 있다면 자비로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