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풍(古風)
【정견망】
동방삭(東方朔)은 전한(前漢) 시기 유명한 인물로, 《사기》에서는 그를 〈골계열전(滑稽列傳)〉 속에 기술했다. 그는 기지가 있고 해학적이며 견문이 넓고 아는 게 많아서 한 무제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동시에 동방삭은 또 마음이 순수하고 정직해서 과감히 직언하는 사람으로 수많은 아름다운 일화들을 남겼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예로 든다.
《한서》에 따르면 한 무제가 18세(건원 3년) 때 시위들과 미복 차림으로 처음 사냥을 나가면서 자신을 평양후(平陽侯)라고 칭하고 자주 말을 타고 농민들의 곡식을 짓밟았다. 이에 농민들이 분개하여 현령에 고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한 무제는 상림원(上林園)을 건설해 전문적으로 자신의 사냥터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동방삭이 상림원을 건설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간언했다.
첫째, 물산이 풍부한 땅을 차지하고 농민의 논밭을 침탈하여 아무런 이득이 없다
둘째, 사슴, 토끼, 호랑이, 늑대를 기르고, 백성들의 무덤과 집을 파괴하여 어른과 아이가 모두 원망한다.
셋째, 동산에서 동서로 달리고, 깊은 도랑도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과거 은나라 주왕(紂王)이 궁중에서 9시(九市)를 만들어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초나라 영왕(靈王)이 장화대(章華臺)를 만들자 초나라 백성들이 어지럽게 흩어졌으며, 진나라 때는 아방궁을 건설해 천하를 크게 혼란시켰다.
‘이제 신이 스스로 목숨을 걸고 간언하오니 임금께서 자성하시기 바랍니다.’
한 무제는 당시 아주 젊어서 동방삭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지만, 동방삭이 충성스럽고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태중대부(太中大夫)란 벼슬을 주고 황금 백 근을 하사했다. 하지만 상림원은 그래도 지었다.
한편, 한 무제의 고모인 관도공주(館陶公主)는 남편이 죽은 후 줄곧 홀로 지내다 50대에 이르러 동언(董偃)이라는 젊은 남자를 총애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동군(董君)이라고 불렀다. 한 무제가 관도공주를 방문하러 왔을 때, 공주는 동언을 데리고 나와 한 무제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동군을 알게 되었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동언 주위에 모여들었다. 동언은 또 한 무제와 함께 닭싸움, 축구, 개싸움, 말달리기 등을 하면서 즐겼다.
한번은 무제가 선실(宣室)에서 연회를 열고 관도공주와 동언을 초대하려 했다. 당시 동방삭은 마침 대전 아래에서 창을 들고 호위하는 지극수위(持戟守衛)로 있었는데 창을 내려놓고는 동언에게 세 가지 큰 죄가 있으니 참수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첫째, 동언은 신하로서 사사로이 공주를 모셨고,
둘째, 동언은 남녀의 교화와 혼인의 예를 어지럽혔으며,
셋째, 동언은 폐하에게 옛 성왕(聖王)을 본받으라고 권하지 않고 오히려 개나 말싸움과 같은 오락을 일삼게 했으니 실로 큰 도둑이라 했다.
무제가 이 말을 듣고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나는 이미 연회를 열었으니 나중에 고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동방삭이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선실(宣室)은 선제(先帝 무제의 아버지 경제)의 정전이며, 오로지 법도를 논하는 큰일이 있을 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음란한 일은 찬역(簒逆)의 재앙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과거 제 환공의 총신 수초(豎貂)가 음탕하자 간신 역아가 난을 일으켰고, 경보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노나라가 보전되었습니다. 또 관숙과 채숙이 주살 당하고서야 주나라가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무제는 좋다고 하며 주연을 북궁(北宮)에 옮겨서 거행하고 동방삭에게 황금 30근을 하사하게 했다. 또 동언에 대한 총애도 점점 줄어들었고 그는 서른 살에 죽었다.
위의 이야기를 보면, 관도공주가 동언을 사사로이 총애를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잘못은 주로 관도공주에게 있었다. 또 한 무제가 동언을 불러 함께 놀자고 했고, 선제의 정전에서 주연을 베풀려고 한 잘못은 주로 한 무제에게 있었다.
동방삭이 이때 동언을 참수해야 한다고 한 것은 완곡한 충고로, 한 무제는 결국 말을 듣고 동방삭에게 상금을 주며 충의와 정직함을 인정했다. 또한 사람들은 흔히 한 무제가 웅재대략(雄才大略)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사회 풍조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동방삭처럼 직언하고 간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에 무제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서》에는 동방삭에 대해 “직언으로 간언하니 황제가 자주 그 말을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고대 성현(聖賢)의 이야기를 계속 칭송하는데 자신의 몸을 닦고 덕을 중시하는 한편 정의를 수호하는 직책을 맡았다.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 반고 《한서》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6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