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清風)
【정견망】
귀하고 천함은 비록 달라도
문을 나서면 제각기 추구함이 있네!
홀로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아
끝내 이곳에서 한가로이 산다네!
어젯밤 보슬비 지나가더니
봄풀은 얼마나 자랐는지 모르겠구나!
청산에 이미 날이 밝아오는데
새들은 집 주위에서 울어댄다!
때때로 도인과 짝이 되고
때로는 나무꾼 따라 나선다
스스로 우둔하고 졸렬함을 편안히 여길 뿐
누가 부귀영화를 경멸한다 하는가!
貴賤雖異等,出門皆有營。
獨無外物牽,遂此幽居情。
微雨夜來過,不知春草生。
青山忽已曙,鳥雀繞舍鳴。
時與道人偶,或隨樵者行。
自當安蹇劣,誰謂薄世榮。
위응물(韋應物)은 당대(唐代) 시인으로 경조(京兆)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 사람이다. 15세부터 54세까지 40여 년을 공직에서 보냈는데, 그 중 단 두 번의 짧은 한거(閑居)만 있었다. 《유거(幽居)-한가롭게 살다》란 제목의 이 시는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한거할 때 쓴 것이다.
당대(唐代)는 전반적으로 수련의 기풍이 아주 진했는데 위응물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원래 부귀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가세가 기울었다. 이는 그가 진정으로 수련의 문으로 들어서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글은 그 사람과 같다(字如其人)”고 말하는데, 사실 시(詩)는 더욱 그렇다. 이 시는 한가롭고 고요한 경계(境界)를 묘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심성이 있는 위치를 드러낸 것이다.
“귀하고 천함은 비록 달라도 문을 나서면 제각기 추구함이 있네”
이 부분은 이해하기 쉬워서 겉보기엔 아주 평범하게 쓴 것 같다. 하지만 기점은 오히려 아주 높다. 수많은 세인들은 세상일로 복잡하고 시끄럽지만 오히려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시인이 이런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지혜와 생명의 층차가 이미 속인 층차를 뛰어넘었음을 설명한다.
“홀로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아 끝내 이곳에서 한가로이 산다네”
이 구절은 위 구절과 서로 연계되는데 자신이 외물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유유자득 할 수 있다. 여기서 유(幽)란 거주환경이 그윽하고 고상한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심경(心境)이 편안하고 담담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후자가 더 중요하고 관건적인데 단순히 환경이 그윽하고 고상하다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지 못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은거(隱居)를 단순히 표면형식으로 여기고 내심의 명리를 근본적으로 내려놓지 못한다. 목적은 자신의 명성을 더 높여 보다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것으로 솔직히 말하면 바로 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은 진정으로 둘을 고도로 통일할 수 있었다.
“어젯밤 보슬비 지나가더니 봄풀은 얼마나 자랐는지 모르겠구나!
청산에 이미 날이 밝아오는데 새들은 집 주위에서 울어댄다!”
이것은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가뿐하고 즐겁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문자를 통해 이런 유유자득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비, 풀, 산, 새는 모두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가 이미 속인의 명리에 빠져 얽매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은 비, 풀, 산, 새 등 불과 몇 개의 단어로 한가로이 거주하는 모습을 생생하고 다채롭게 표현했다.
“때때로 도인과 짝이 되고 때로는 나무꾼 따라 나선다”
이 부분은 아무렇게나 쓴 것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오히려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기 마련이라 시인은 수련인이기 때문에 늘 도인(道人)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소위 나무꾼 중에는 진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깊이 숨어 있는 고인(高人)이 적지 않다. 시인은 그들과 서로 교류하니 자연스레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
“스스로 우둔하고 졸렬함을 편안히 여길 뿐 누가 부귀영화를 경멸한다 하는가!”
이 마지막 두 구절이야말로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흔히 내가 이렇게 한가한 생활을 좋아하는 것은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을 비루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격이 어리석고 졸렬할 뿐이라고 한다. 겉으로만 보면 시인 자신의 겸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공명이록을 전혀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속인사회란 바로 이렇게 존재하는 형식이며 사람마다 모두 믿고 수련하기란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며” 사실 수련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총명한 것이다. 그들은 만약 속인의 명리(名利)속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리면 아주 쉽사리 덕(德)을 잃고 덕을 손상하며 사람의 본성에서 갈수록 더 멀어짐을 깨달았다. 반본귀진(返本歸真)해야만 생명이 진정으로 초탈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바삐 살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 사람의 내심 깊은 곳에는 여전히 불성(佛性)이 존재함을 설명한다.
위응물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그의 심성 층차가 그의 지혜와 재능을 결정한다. 이 시는 통속적이고 마치 단번에 완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글자 하나하나가 주옥과 같고 선기(禪機)가 가득하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의도적인 묘사나 의론도 없어서 통속적이고 알기 쉽지만 여운이 끝이 없다. 어떤 이는 이 시는 불과 60자로 중당(中唐) 전체를 깨우쳤다고 평가하는데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련하는 사람은 에너지가 있기에 그들의 작품도 당연히 에너지가 있고 층차가 높을수록 에너지가 더욱 강하며 지속 시간이 더욱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 역시 시인의 수련 층차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8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