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纖纖)
【정견망】
예술의 경계(境界)는 그 신운(神韻)에 달려 있는데 다시 말해 즉 예술 배후의 내함(內涵)에 달려 있다. 청대(淸代) 시인 원매(袁枚)의 시 《품화(品畵)–그림 품평》는 회화의 진정한 의미를 아주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한다. 이 시는 총 20글자다.
그림 품평에는 신운(神韻)이 우선이요
시를 논함에는 성정(性情)을 중시하네
교룡이라도 생기를 다하면
쥐가 함부로 날뛰는 것만 못하구나
品畫先神韻
論詩重性情
蛟龍生氣盡
不若鼠橫行
“그림 품평에는 신운(神韻)이 우선이요 시를 논함에는 성정(性情)을 중시하네”
“그림 품평에는 신운(神韻)이 우선이요”라는 구절은 그림을 감상하려면 가장 먼저 신운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림 품평’을 요즘 말로 하면 그림 감상이다. 대체로 고인(古人)은 그림 감상을 차를 품평하는 것과 연계시켰다. 여기서 ‘품(品)’이라는 글자가 아주 흥미롭다. 세 개의 입(口)으로 구성되니 즉 세 사람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러 사람들의 견해가 되고 보편적인 가치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신운(神韻)’이란 두 글자의 내함은 더욱 깊은데, 그것은 바로 신의 운치[神味]또는 운율(韻律)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神)이 가리키는 것은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을 초월하는 것으로, 고대에는 좀 더 명확했는데, 그것이 신의 존재였다. 다시 말해 그림에도 생명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를 논함에는 성정(性情)을 중시하네”란 이 구절은 시사(詩詞)를 담론할 때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여부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정(性情)이란 진심(真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널리 전해지는 그런 시사들을 보면 종종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실한 감정이 흘러나온다.
“교룡이라도 생기를 다하면 쥐가 함부로 날뛰는 것만 못하구나”
이 구절은 당신이 그림으로 그린 교룡(蛟龍)이 정기신(精氣神)이 없다면 차라리 함부로 날뛰는 쥐를 그리는 것만도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생기(生氣)’란 바로 정기신을 의미하는데 다시 말해 내면에 지니고 있는 그런 용맹과 위엄이다.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호랑이를 그리려다 오히려 개를 닮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대체적인 의미는 “호랑이도 평지에 떨어지면 개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기신을 잃은 교룡은 아주 연약하고 무기력해지는데, 이는 그림 그리기에 대한 시인의 매우 예리한 총결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신(神)의 내함을 잃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무신론을 믿는 사람의 형상(形象)은 어떠한가? 무신론을 믿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고급 동물로 생각하는데 그럼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정말로 아주 슬픈 일이다.
예술이 예술로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신이 전해준 문화[神傳文化]라서 배후에 신운(神韻)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신(神)이 만들었기에, 배후에는 또한 신(神)적인 요소가 있다. 사람이 만약 신에 대한 경앙(敬仰 공경과 신앙)을 잃게 되면 마찬가지로 신(神)의 일면을 잃게 된다. 사람이 일단 신에 대한 경앙을 잃으면 신의 버림을 받아 신의 가호가 사라지며 사람은 아예 생존할 수도 없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