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생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우주 중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얻었다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하며,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유럽법회설법》)
이 우주는 대법(大法)이 만든 것으로, 대법은 온 우주에 두루 퍼져 있어, 어디든 없는 곳이 없으며, 전체 우주의 모든 것을 제약하고 균형 잡으며 배치한다.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니 누구든지 막론하고 무엇을 얻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잃은 후에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인간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먼저 잃어야 한다.
이런 잃음은 세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인간 세상에서 고생을 겪거나
둘째, 인간 세상에서 돈으로 대가를 치르거나
셋째, 다른 공간에서 덕(德)으로 대가를 치른다.
자사(自私 이기적)한 사람은 분명 인간 세상에서 감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가 인간 세상에서 뭔가를 주려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얻는다면 곧 다른 공간에서는 덕을 잃고 덕으로 교환해야 한다. 즉, 이기적인 사람이 무언가를 얻으려면 마찬가지로 잃은 후라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사람의 계산은 하늘의 계산만 못하며 사람이 사심(私心)을 움직여 아무런 대가도 치르려 하지 않는 것은 헛수고로, 근본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사(自私)는 남을 해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조성하고, 자신 역시 그 속에서 업(業)을 짓게 되어 나중에 또 업을 갚는 고통도 감당해야 한다. 아울러 자사하게 남을 해칠 때는 또 남에게 덕을 주어 보상해야 한다. 따라서 자사(自私)는 자신이 업을 짓고 덕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자신을 해치는 일종의 자해행위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법해》〈광저우설법 문답풀이〉에서 말씀하셨다.
“대가를 얼마나 치르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데 틀림없이 이러하다.”
내가 이해하기에 위타(爲他)를 선택하면 선량(善良)을 치른다. 잃은 것이 있으니 반드시 얻는 것도 있고, 선량하게 치른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나중에 대법이 배치한 보답을 받는다.
이를 통해 보자면 자사(自私)는 남을 해치고 또 자신을 해치는 것이며 선량은 남을 이롭게 하면서 또 자신도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선량과 위타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한 우주 생명의 정확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선량하고 위타할 수 있는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고려하지 않으며 완전히 남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동수는 이렇게 하기란 아주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렇게 하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다. 행동 자체만 말하자면 일반인들도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모두들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공법을 수련하는 그 자체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층차를 제고하는 자체도 무슨 어려울 것이 없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여 그는 비로소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 이익 중에서 그것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이 이익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그는 어렵다고 여기는데, 실제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전법륜》)
분명한 것은, 문제는 행동이 어려운 게 아니라 사상 의식에서 비롯되는데, 다시 말해 사심(私心)이 여러분들이 선량하고 위타한 행동을 하는 걸 가로막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사상 속에서 사심을 발견하기만 하면 즉시 정념으로 깨끗이 제거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행동상에서 단호히 위타를 선택해야 한다.
당신이 오직 사람을 접촉하기만 하면 곧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데,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한 생명으로서, 일할 때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관용을 표현할 수 있음은, 기점이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우리가 오직 위타라는 이 기점을 지키기만 하면 선량하고 관용할 수 있으며 남을 이롭게 하고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선(善)의 출발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에서 나온다. 내가 좋은 일을 해서 남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선행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정한 선은 반드시 상대방의 필요에서 나오는 법이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도와줄 필요가 있는지 보고 전력을 다해 가서 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다.
항상 자기중심으로 자신의 각도에서 남을 가늠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남의 어려움과 고충을 이해하고, 그가 과거에 한 잘못을 용서하고, 현재의 부족함을 포용하며, 완전히 위타한 심태로 남을 잘 대해야 한다.
여기서 일부 동수들에게 일깨워주자면, 일을 할 때 가급적 남의 감정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불선(不善)한 행동으로 남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오만, 자기의견 고집, 거만해서 남을 무시하고, 높이 자처하면서 아래로 내려다보기, 무시하기, 상대를 거들떠보지 않음,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기, 화내기, 조급함, 짜증, 혐오, 원망, 비난, 배척하기, 냉담, 남의 재앙을 즐거워하기, 억지로 강요하기, 뒷 담화 등등,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신도 업을 짓고 덕을 손상하며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해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사람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하면 겉으로 보면 마치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생각해보라, 그가 도처에서 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주동적으로 대가를 치르면, 곳곳에서 대법이 배치한 보답을 받을 수 있다. 이는 곳곳에서 모두 얻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그는 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그가 가장 “약은” 것과 같다. 그는 최대한도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며, 결국에는 공을 이루고 원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수들에게 건의하는데 지금부터 시작해 근본적으로 자신을 개변시켜, 위아(爲我)에서 위타(爲他)로 전변해야 하며, 사람에서 신(神)으로 가는 막다른 관을 철저히 돌파해 진정으로 사람에서 신에 이르는 근본적인 전변을 실현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지금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하늘의 신(神)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많은 이들이 각 대궁(大穹)의 왕이나 주로 그들은 모두 아주 소중한 생명들이다. 한 생명의 전체 과정이야말로 이 생명의 정체적인 표현이다. 이들 신들은 세상에 내려와 윤회전세(輪回轉世)하면서 정법을 위해 길을 다지고 생생세세 정법을 위해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금생금세(今生今世)에 구세력이 만들어낸 중공사당에 기만당하고 독해되어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생명을 보려면 전반적으로 봐야지, 그들이 일생일세(一生一世)에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달리 대해선 안 된다.
입장을 바꿔 보자면, 그들은 중공사당(中共邪黨)에 독해된 생명으로 이미 위난(危難)의 심연에 빠져 스스로는 이미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대법제자들은 이미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옥에 들어가 끝없는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흉금을 활짝 열고, 이미 구제할 수 없는 극히 개별적인 악인(惡人)을 제외하고, 나머지 절대다수 세상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구해야 한다. 일시적으로 좋지 않은 그들의 표면적인 행동을 보지 말고, 그들의 소중한 본질을 보고, 최대한의 자비와 관용으로 그들을 구도해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대법의 호탕한 불은(佛恩)을 느낄 수 있게 하고, 대법제자의 순정(純正)과 선량을 느끼게 하여, 그들이 위난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문제를 볼 때 표상을 꿰뚫고 본질을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표면적인 행동이 매우 악랄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진정한 표현이 아니다. 진정한 그 자신은 바로 주원신(主元神)으로 완전히 법에 동화되어 완전히 자비롭고 선량하다. 그들은 또 애초 세상에 내려올 때의 소원을 품고, 사부님의 정법에 협력해 힘을 보태는 한편, 자신이 대표하는 중생을 구도하려 하는데, 그들은 시종 초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삼계(三界)에 들어오면, 특히 인간 세상이란 이 미혹된 환경 속에 와서, 중공이 전력을 다해 패괴시켜 도덕이 붕괴된 사회 환경에 직면하면, 좋고 나쁨을 똑똑히 구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고 나쁨까지 뒤집혀버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그더러 자신을 잘 파악하게 하기란 정말로 아주 어렵다! 그는 이미 후천적으로 형성된 그릇된 관념과 집착에 주재되어 자주를 잃었고, 이미 명실상부한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나쁜 일은 그 자신이 한 게 아니라 모두 관념과 집착이 그의 대뇌를 통제해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중공사당이 거짓말을 이용해 주입한 대법(大法)에 대한 좋지 않은 사상에, 인간 세상에서 이익에 대한 집착이 더해지면, 아주 쉽사리 중공사당에게 통제되고 이용당해 대법(大法)을 파괴하고 대법제자들을 박해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주원신(主元神)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진정한 자신은 이렇게 하면 얼마나 무서운 후과(後果)가 있을지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이미 어찌할 능력이 없다. 생각해보라,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무력한가! 얼마나 비참한가! 얼마나 가련한가! 누가 대법을 파괴하고 장차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감수하고 싶겠는가?
생각해보라, 애초 이 신들은 대법(大法)에 대한 충만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正法)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고, 법이 반드시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기꺼이 신(神)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정의를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삼계로 내려왔다. 윤회전생하면서 사부님께 협력해 정법을 위해 기초를 다지며 이미 수많은 고생을 겪었는데, 지금 만약 정법 중에 구도 받지 못하고 결국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고통이다. 이 얼마나 원치 않는 결말인가!
동수들이여,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희망은 바로 우리 대법제자들이 그들을 구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소중하고 가련한 생명을 마주해, 대법제자의 책임을 마주해, 어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위난의 심연에서 그들을 끌어올려야만 한다. 우리 대법제자들이 사람을 구할 때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그것은 다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은 영원한 것이다. 그들이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감당하지 않도록, 그들이 구도 받은 후 아름다운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을 구할 때 아무리 고생스럽고 아무리 어려워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지난 몇 년간 거듭해서 정법 결속 시간을 연장하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정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부님의 정법에 대해 신심이 충만했던 이런 고층 생명들이 끝내 대법의 구도를 받지 못하고 지옥에 내려가 영원히 그곳에서 고통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그들을 차마 포기할 수 없기에 계속 미루신 것이다. 사부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무조건 원용해야 하며,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어려움 속에서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진심을 체현할 수 있으며, 고통 속에서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자비를 인증(印證)할 수 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겉으로는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은 마음에 의한 것이다. 어떤 노년 여자 동수는 오랜 세월 진상을 알리며 사람들을 구해왔는데 때로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도 세인을 구한다. 그녀는 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바로 그녀의 심태가 아주 순정(純淨)하고 자비롭기 때문에, 그녀가 진상을 말할 때, 자비의 에너지가 밖으로 방출되어, 단번에 세인의 좋지 않은 사상을 모두 해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세인의 명백한 일면이 곧 드러난다. 그 명백한 일면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더는 말할 필요가 없다. 동수가 그에게 삼퇴(三退)하라고 하면 그는 곧장 동의한다. 이렇게 간단하다! 그러므로 동수가 사람을 구함에 진정으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자비심이다. 겉으로 보면 입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실질은 마음을 써서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선(善)을 닦아야 하며, 사심(私心)을 단호히 버리고, 위타(爲他)를 선택해야 하며, 자비심을 닦아낸 후 사람을 구하면 효과가 더욱 좋을 것이다.
인간 세상의 이 환경은 수련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수련 환경은 반드시 두 가지 요구에 도달해야 하는데 하나는 미혹(迷)이고 다른 하나는 고생(苦)이다. 미혹의 필요 때문에 반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종종 반대로 되는 이치(反理)나 가짜 이치다. 즉, 당신이 세상에서 표현되는 상태에 따라 경험을 총결해서 이렇게 도출한 결론은 종종 반리(反理)나 가짜 이치다. 자사자리(自私自利)는 바로 인간 세상에서 표면 현상을 총결한 가짜 이치인데, 위사(爲私)해야 자리(自利)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심(私心)을 써서 이곳에서 살아간다.
우리 수련인(修煉人)들은 법을 공부해 미혹을 타파하고 우주의 진상과 진리를 안다. 실제 상황은, 인간 세상에서 발생한 일은 단지 인간 세상에서만 득실(得失)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도 득실이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전면적이고 입체적으로 문제를 보아야만, 일에 대해 전면적이고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속인은 다른 공간을 볼 수 없고 오직 세상에서 발생한 득실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속인이 볼 수 있는 득실은 영원히 단편적이며, 전반적인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일에 대해 단편적인 결론을 내리고, 인간 세상에서 자사(自私)한 행동을 통해 자리(自利 자기 이익)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데 때문에 자사 해야만 자신에게 이롭다고 여긴다.
또한 다른 공간에서 속인들이 볼 수 없는 득실은 인간 세상과는 바로 정반대다. 사람의 진정한 생명은 주원신(主元神)으로 주원신의 득실이야말로 자신의 득실이다. 즉, 다른 공간의 득실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득실이며 인간 세상의 득실은 진정한 자신의 득실이 아니다. 사람이 막 태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없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무언가를 얻는다. 사람이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존재했든 다 인생과정 중의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 생명의 주원신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 세상의 것은 주원신 몸에 지니지 못하며, 주원신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득실은 주원신의 득실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신 자신의 득실이 아니다. 속인은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득실을 자신의 진정한 득실이라고 생각해 사심을 움직여 온갖 방법을 궁리해 가며 자신이 물질적 이익을 더 많이 얻고 잃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속인에게 사심이 있는 한 가지 주요 원인이다.
속인은 사심(私心)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모르기에 자사자리(自私自利)한 가짜 이치를 품고 한 걸음씩 몰락을 향해 나아간다. 수련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이미 사심의 위험성을 알고 있으니, 속인처럼 우매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사심을 철저히 버리고 개인의 득실을 중시하지 말며 득과 실 앞에서 자연스러움에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우주 중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얻었다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하며,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유럽법회설법》)
“대가를 얼마나 치르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데 틀림없이 이러하다.” (《전법륜법해》〈광저우설법 문답풀이〉)
우주가 이렇게 배치된 것으로 득과 실 사이에 대등(對等)을 형성한다. 즉, 얼마를 잃었으면 나중에 잃은 만큼 얻고 얼마를 얻었으면 또 그만큼 잃는다. 이렇게 득실이 균형을 이루니 손해를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득도 없다. 기왕에 득과 실에서 손해도 보지 않고 이득도 없어서 공평하고 대등하다면, 그럼 자신의 득과 실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자연스러움에 따르면 된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미혹의 공간이고, 속인은 인간 세상이란 이 한 층의 공간만 볼 수 있고, 다른 공간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속인은 단지 한 가지 일이 인간 세상에서 발생한 득실만을 볼 뿐,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득실은 볼 수 없다. 비록 총체적으로는 일의 득실이 평형을 이루지만, 단순히 인간 세상에서 드러난 득실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곧 인간 세상의 일에서 어떤 이는 손해를 보고, 어떤 이는 이득을 본다.
사람은 세상에서 성장하는 과정에 사회적으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위사(爲私)한 관념을 주입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물질적으로 많은 이익을 얻고 손해를 적게 보려고 온갖 방법을 찾는다. 때문에 속인은 일에 부딪히기만 하면 곧 자신의 득실을 중시하고 자연스러움에 따를 수 없다.
만약 전체 우주 속에서 본다면 인간 세상에서 이득을 얻고 손해를 보는 것은 다 가상(假相)이다. 실질적으로 대법이 균형 잡고 있기에 손해를 보거나 이득을 얻는 문제가 없지만 단지 인간 세상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곧 ‘진상(真相)’이 되며 손해 보고 이득을 얻는 문제가 존재한다.
인간 세상이란 이 미혹의 환경은 바로 사람이 수련하라고 만들어 준 것이라 반대로 만들어졌기에, 종종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모두 반상(反相), 가상(假相)이다. 즉 당신에게 이처럼 반대로 되고 가짜인 환경 속에서 수련하게 한다. 법에서 말한 것이 바로 진상이고 진리이며 당신이 믿는지 믿지 않는지 본다. 당신이 정말 믿는다면 이 가상을 돌파해 인간 세상에서 수련해 나올 수 있으며, 만약 당신이 진실로 믿지 않는다면, 인간 세상의 가상에 미혹되어 수련해 나올 수 없다.
실질적으로 이런 득실이 균형을 이루는 법리를 배치한 것은 대법(大法)이며 바로 우주중의 생명더러 개인의 득실에 신경 쓰지 말고, 모든 득실을 다 대법의 배치에 맡기고, 자연스러움에 따라서 득실을 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심(私心)이 생기지 않을 수 있고 무사무아(無私無我)한 정각(正覺)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온 우주가 오랫동안 불괴(不壞)할 수 있다.
사람의 사심(私心)은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얻을지 밖으로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지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하는 마음과 두려움은 모두 사심이다.
얻음이 있으면 반드시 잃음이 있는 것으로 얼마만큼 얻었으면 이후에 그만큼 잃어야 한다. 속인은 인간세상에서 무엇을 공짜로 얻은 후, 다른 공간에서 자신이 덕을 잃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이득을 얻었다고 여기며 온갖 방법을 찾아 더 많이 얻으려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이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얻은 후 다른 공간에서 상응하는 만큼의 덕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득과 실이 서로 같고, 결국에는 조금의 이득도 얻지 못했으며 한바탕 헛수고만 했음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사심을 움직여 무언가를 얻으려고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잃었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는 것으로 얼마나 잃었으면 나중에 또 그만큼을 얻는다. 속인은 인간세상에서 무엇을 잃은 후, 다른 공간에서 상응하는 덕을 얻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만약 그가 인간 세상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은 후, 다른 공간에서 자신이 상응하는 덕을 얻은 것을 보고,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서로 같음을 볼 수 있어서, 결국에는 자신이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고 한바탕 쓸데없이 걱정한 것임을 안다면, 그는 사심을 움직여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미혹 속에서 대법의 존재를 모르는데, 대법이 우주의 모든 것을 제약하고 균형 잡고 배치함은 더욱 모른다. 대법은 공도(公道)를 주관하고 있고 득과 실은 일종 공평하고 대등한 교환으로 완전히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그 누구도 손해 보지 않고, 그 누구도 이득을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사심을 움직여 추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한편, 만약 당신이 득과 실을 자연스러움에 따라 하지 못하고, 사심을 움직여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혹은 자신이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서 지키려 한다면, 곧 자신의 덕을 손상시키거나 업을 지을 수 있다. 덕을 손상시키면 자신에게 손실을 조성하고, 업을 지으면 나중에 업을 갚을 때 고통을 겪어야 하니 이 또한 자신에게 손실을 조성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신이 사심을 움직여 한 모든 노력은 오히려 자신에게 손실을 조성한다.
만약 당신이 득과 실을 자연스러움에 따라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대법의 배치에 맡길 수 있다면, 그럼 스스로 덕을 손상시키거나 업을 짓지 않을 것이고, 다시 말해 자신에게 손실을 조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심을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대법의 배치에 맡기며 득과 실을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한 우주 생명의 정확한 선택이다.
인생은 바로 선택이다.
위아(爲我)를 선택하면 업을 짓고 덕을 손상시켜, 장래에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업을 갚는 고통이다.
반대로 위타(爲他)를 선택하면 선보(善報)를 얻는데, 장래에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선보의 행복이다.
자사(自私)는 자신을 고통의 심연으로 나아가게 하고, 선량(善良)은 자신을 행복한 내일로 이끈다. 사심(私心)을 버리면 고통에서 멀어지고 선량(善良)을 선택하면 행복을 맞이한다. 무사무아(無私無我)하고 구함이 없어도 저절로 얻으면 공성원만해서 각자(覺者)로 성취된다!
한 생명의 진정한 자신인 주원신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다른 공간에 존재하며, 인간 세상에서는 그를 볼 수 없다. 미혹 속에서 살아가는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인체를 해부할 때 단지 이 육신(肉身)만 보이고 주원신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육신을 자신으로 여긴다. 이후 이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데 육신이 무엇을 얻으면 자신이 얻은 것이라 생각하고, 육신이 무엇을 잃으면 자신이 잃은 것이라 여긴다.
한평생 죽어라 싸우는데 평생 무엇을 얻었든, 마지막에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한평생 헛되이 산 것과 같은데 결국에는 한바탕 공(空)의 결말에 떨어진다. 사람이 출생할 때 무(無)에서 유(有)에 이르지만 사망할 때는 유(有)에서 무(無)에 이르니 인생 전체적으로 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무에서 와서 무로 가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인간 세상에서는 아무런 득실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인생 과정에서 다른 공간의 덕과 업력도 득실이 있을 수 있다. 때문에, 전체 인생의 진정한 득실은 다른 공간에서 나타나는데 즉, 다른 공간의 득실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득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는 결국 진정한 득실이란 없으니, 인간세상의 득실은 중시할 필요가 없다.
속인이 사심을 써서 자기를 위하는 것은, 실제로는 이 육신을 위한 생각이지 결코 진정한 자기 주원신을 위함이 아니다. 이는 육신이란 이 가아(假我)를 위해 사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반대로 진정한 자신인 주원신을 해치게 되는데, 이는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이미 법을 얻은 수련인(修煉人)으로서 말하자면, 속인처럼 그렇게 고집스레 집착하고 깨닫지 못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사심을 버려야 한다. 더는 속인처럼 진정한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하며, 선량(善良)과 위타(爲他)를 선택해 대법이 배치한 선보(善報)를 받아야 하며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유리한 선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 중에서 위아(爲我)하면 고생을 얻고 위타(爲他)하면 복을 얻는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당신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 개인의 작은 깨달음이니 부당한 점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