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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노트 (상)

진우(真愚)

【정견망】

20여 년을 수련하면서, 나는 천박하고 무지(無知)한 생명에서 신(神)의 길을 걷는 대법제자(大法弟子)로 되었다. 생명이 서서히 각성하는 과정에서, 구도해주신 사존(師尊)의 홍대한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

부처님의 호탕한 은혜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 수련하면서 체득한 감회가 아주 많고 층층의 법리가 펼쳐졌지만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다. 마치 큰 바다를 어항 속에 쏟아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지난 2년 동안 내가 수련하고 관(關)을 넘기면서 깨달은 것들을 모아 그중 일부를 정리해 동수들과 교류하며 함께 나누고자 한다.

유한한 층차에서 개인의 낮은 깨달음에 불과하며 여러분들과 교류하고자 할 뿐이니 부당한 점이 있다면 자비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1)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참음이란 개인적으로 깨닫기에 사실 자신의 흉금과 용량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용량이 클수록 감당하는 것도 더욱 큰데 그럼 곧 참아낼 수 있고 용량이 가득 찼을 때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면 그럼 폭발하거나 붕괴된다.

마치 작은 연못처럼 그것의 용량이 작으면 작은 돌 하나를 던져도 전체 연못의 물을 휘저을 수 있지만 큰 바다처럼 용량이 크다면 해저에서 설령 원자폭탄을 터뜨린다 해도 표면적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변화도 보아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수련(修煉)이란 한걸음씩 자신의 용량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용량이 클수록 감당하는 것도 더욱 크고 내함(內涵)이 더욱 크며 경지(境界)와 지혜도 더욱 크다.

억지로 한 번 참고 난 후 용량이 조금 더 커지고 다음에 또 고험(考驗)이 왔을 때 또 억지로 참으면 그럼 좀 더 커진다. 이렇게 용량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점점 더 잘 참아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수련의 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아주 느린 것으로, 이는 단지 과거 소도(小道)・소법(小法) 수련의 길에 불과하다. 대법수련은 하늘로 통하는 대도(大道)로,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기에, 한걸음에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만약 처음 용량이 어항이었다면 여러 차례 고험과 참음을 거쳐 용량이 연못만큼 커질 수 있고, 다시 여러 차례 고험과 참음을 거쳐 또 점차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고험과 참음을 거치면 결국 용량이 큰 바다만큼 확대되는데 그래도 여전히 한계는 있다. 바다가 아무리 커도 결국 변두리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득 찰 날이 있다. 만약 직접 그것의 변두리에서 착수한다면, 그럼 곧 하늘로 통하는 대도(大道 큰 길)가 있는데 이 변두리가 바로 ‘사(私)’다.

만약 애초 어항의 바닥에 직접 구멍을 뚫었다면, 그것의 용량은 바닥이 없어서 끝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 전체의 물을 다 담을 수 있으며 영원히 물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대법수련이 역사상 그 어떤 다른 법문의 수련과도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사무아(無私無我)의 대각(大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하며 직접 이 변두리에서 착수하는데, ‘사(私)’에서부터 착수해, 직접 사람마음을 가리킨다. 만약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모든 것을 버리며 중생과 대법을 위해 사아(私我)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면, 그럼 곧 변두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대법 속에서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린 후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대법 속으로 회귀해 대법의 한 입자가 되어 대법의 힘을 갖추게 되면 우주의 그 어떤 생명도 우리를 흔들거나 건드릴 수 없게 된다. 만약 직접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아(私我)가 없다면 그럼 참는 문제도 존재하지 않고, 억울함이나 원망은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

억울함이나 원망 등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다. 만약 사(私)가 없다면 그 어떤 생명도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일체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은 ‘무(無)’이며 건드리거나 만질 수 없다. 이는 마치 어항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아서 변두리도 없고 용량도 없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으며 대법과 일체가 되어 대법 속으로 되돌아가 대법으로 싣는데 어떤 물건이 도망갈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을 해내기란 매우 어려운데 왜냐하면 구우주(舊宇宙)의 모든 것은 사(私)의 기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범인(凡人)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며, 평생을 위사(爲私)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또 어렵지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하나의 관념과 기점의 문제인데 이 관념이 바뀌고 기점이 바로 잡히면 곧 완전히 달라진다.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데 단지 일념(一念)의 차이에 달렸다. 당신은 중생과 대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2)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전법륜》)

내가 깨달은 것은 이렇다. 생명의 능력은 층차의 높낮이나 개체의 크기에 달린 게 아니라 그가 완전히 법에 동화해 완전히 법에 서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만약 한 생명이 완전히 법에 동화해 자아(自我)가 전혀 없고 사(私)가 없다면, 그럼 그는 바로 대법의 한 입자이며, 대법의 구성 부분이 되기에 그는 곧 대법의 힘을 지니게 된다. 우주에서 아무리 높은 층차의 생명일지라도 그를 움직일 수 없다. 그를 움직인다면 이는 우주대법을 흔드는 것과 같고, 전반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생명은 없다.

(3)

원(圓)을 하나 그리면 아무리 크게 그려도 원 안의 공간은 모두 유한(有限)하지만 원 밖은 무한하다.

만약 원 안을 선택한다면 그럼 자신을 봉폐되고 유한한 공간에 가두어 영원히 그 원을 넘지 못하게 하며, 만약 원 밖을 선택한다면 그 속박에서 벗어나 무한(無限)을 갖게 된다.

매 생명은 다 자신을 위해 하나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안에 갇히게 되는데, 이 원이 바로 ‘사(私)’다. 그러나 생명이 이 원의 ‘보호’만 보고 ‘갇힘’을 모르는 것은 생명의 지혜 역시 원(圓)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구우주에서 매 하나의 고층차(高層次)의 생명은 모두 우주대법에서 한 세트 자신의 것을 증오(證悟)한 것이다. 하지만 기점이 모두 위사(爲私)한 것으로 매 한 생명이 증오한 것은 모두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주 중에 각종 크고 작은 ‘원’들을 형성했는데, 어떤 원은 다른 원을 에워싸고 있고, 어떤 원은 다른 원과 포개져 있는 등등….

단지 생명의 층차가 높을수록 이 원이 더욱 둥글고 더욱 커지지만, 원이 아무리 크더라도 경계가 있다. 경계가 있으니 정수(定數)가 있고 끝이 존재하며 성(成), 주(住), 괴(壞), 멸(滅)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데 즉 원용불파(圓容不破)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원(圓) 때문에 자신을 우주대법과 격리시키고, 또 이 때문에 우주대법을 접하거나 소통할 수 없게 되며, 대법 속에서 원용불파(圓容不破)하고 자신을 고칠[修補] 수 있는 끝없는 지혜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신과 우주 사이에 나타난 편리(偏離)를 고칠 수 없게 되어 성주괴멸(成住壞滅)의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구우주는 결국 훼멸로 나아간다.

(4)

무도 없고 공도 없고 아무것도 없나니
선도 없고 악도 없고 극을 벗어났도다
나아가면 만만물(萬萬物)을 이룰 터이고
물러서면 전무하나니 영원히 헤매리로다

(《홍음 2》〈무〉)

개인적인 깨달음은 미래 신우주에서 우리 대법제자들은 일체 중생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수승(殊勝)한 생명이다.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우주 생명들이 모두 갖출 수 없는 일체 능력을 주셨다.

우리는 자신이 소재(所在)한 모든 우주 층차에서 공(空)에 의지해 사라져 일체 우주 생명이 우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또 우리가 소재하는 모든 우주 층차에서 공(空)에 의지해 생겨날 수 있는데 일체 생명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볼 수 없게 할 수 있다.

이는 구우주에서는 아무리 고층차의 생명일지라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무극(無極)의 능력으로 사존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조사정법(助師正法) 과정에서 사존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신 것이다. 지금 조사정법 과정에서 만약 중생을 위해 자아를 모두 버리고 대법을 위해 생명의 일체를 버릴 수 있다면 그럼 사심(私心)이 없고 누락이 없는 완전한 ‘무(無)’를 이룰 수 있다. 그럼 사존께서 주시는 이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버림으로써 ‘무(無)’를 이룬 후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 우주생명은 우주대법을 몰랐기 때문에 ‘무(無)’를 이룰 수 없었다.

우리 대법제자는 버림으로써 ‘무(無)’를 이룬 후 대법 속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법을 위해 우주 중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린 후에는 대법 속으로 되돌아가 완전히 대법에 용해되어 대법의 한 입자가 되며 대법의 일부분이 된다. 우리는 장차 미래 신우주에서 우주생명과 대법을 소통하는 ‘다리’가 되어 미래 신우주의 원용불파(圓容不破)를 지키게 될 것이다. 이는 그 어떤 생명도 상상할 수 없는 수승한 영광이다.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다.”(《전법륜》)

우리가 중생과 대법을 위해 생명 속의 모든 것을 다 버린 후, 곧 이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우주 모든 층차에서 공(空)에 의지해 사라져 ‘무’가 되어 우주 생명들의 ‘미혹’이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주와 물질에서 물러나 법(法)의 한 입자가 되며 법의 일부분이 된다. 동시에 우리는 또 언제든지 그 어떤 층차 속에서도 공(空)에 의지해 생겨나 일체 형체를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법은 일체 능력을 갖추고 있어 마음에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사존께서 정법시기에 만든 법 입자로, 미래 신우주가 오랫동안 불괴(不壞)하고 원용불파(圓容不破)할 기제를 수호하는데 바로 미래의 신우주의 수호신이다.

사존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구세력이 우리를 이렇게 질투하는 것이며 우주 중생들이 우리를 이렇게 부러워하는 것으로 모두들 대법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의 감당 역시 마찬가지로 큰 것으로 이런 수승(殊勝)함에 도달하려면, 사존께서 주시는 이런 것을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현재 조사정법 과정에서 완전히 법에 동화해서, 사존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라 해야 하며, 이렇게 높은 표준과 요구에 도달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높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미래 신우주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해 일체가 다 훼멸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깨끗이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럼 이 부분은 대법에 동화할 수 없다. 그럼 우리를 잡아당기는 줄이 되어, 미래 신우주의 오염원이 될 수 있으며, 사존께서 주신 이런 위대하고 수승한 능력을 얻을 길이 없으며 대법제자가 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일찍이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았고, 이 과정에서 자아를 모두 버렸으니 우리는 사존께서 만드신 대법입자다. 대법이 불괴(不壞)하니 우리는 불괴하며 대법이 불멸(不滅)하니 우리는 불멸한다. 이것은 우주의 그 어떤 생명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이다. 우리가 영원히 보답할 수 없는 불은호탕(佛恩浩蕩)이다. 그저 용맹정진해서 세 가지 일을 잘 해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

(5)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당신의 형상(形像 이미지)을 만들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남의 일이고 당신과는 무관하다. 당신은 매 사람의 공간장(空間場) 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있는데 비록 당신의 그림자지만 다른 사람의 것에 속하며 마음에 따라 연화(演化)하는 것으로 당신과는 무관하다. 당신은 매 사람의 공간장 안에 있는 거울에 하나의 형상이 비춰지는데 당신이 할 일은 자신을 아주 깨끗히 닦고 당당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 얼굴이 더러워졌다면 스스로 얼굴을 깨끗이 닦으면 된다. 남의 집에 있는 거울을 닦으려고 손을 뻗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신 것이 아니니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그저 할수록 더 검어질 뿐이다. 무함(誣陷)과 오해에 직면해 마치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여기고 당신이 깨끗하고 당당히 맞선다면 남의 거울에서 아무리 더러울지라도, 그 더러운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한차례 마난(魔難)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다.

[역주: 원문이 너무 길어 상하 두 단락으로 나눠서 올립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