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真愚)
【정견망】
(6)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자신의 목적을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위사(爲私)한가 아니면 위타(爲他)하고 법(法)을 위하 정체(整體)를 위하는가? 만약 위사의 성분이 전혀 없다면, 그럼 이 목적은 곧 순정(純正)한 것으로 이 일의 기점이 올바른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위사한 성분이 있다면 설령 조금이라도 이 일은 곧 순정하지 않게 된다. 이럴 때는 일단 멈춰서 잘 찾아보아야 하며 자신을 바로잡고 자신의 목적을 순정(純淨)하게 하고 불순한 요소를 모두 깨끗이 제거해 완전히 무사무아(無私無我)에 도달한 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한 일만이 신성(神聖)한 것으로 부면(負面) 작용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고 설사 나쁜 일이라도 좋은 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목적을 순정하게 한 후 일을 하기 전에 목적(결과)을 손으로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일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게 되어 방향이 빗나가지 않는다. 이 한 점을 파악하면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만 가지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 분명히 교란이 있을 텐데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 속에 있어서 많은 업력을 없애야 하고 또 내려놓아야 할 사람마음이 많아서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자아(自我)’를 충분히 내려놓아야 하는데 끝까지 내려놓아 ‘자아’가 전혀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법(法)에 입각할 수 있고, 그 누구도 건드리거나 움직일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분명히 많은 것들이 연루될 것이며 많은 요소들을 건드리게 될 것이다. 무릇 내려놓지 못하는 그런 일체는 이 과정에서 모두 외래 요소에 의해 붙잡히고 외재환경에 이끌려 당신의 발목을 잡는 밧줄이 될 것이다.
만약 무엇에게 잡히면 곧 그것을 제거하고 무엇에 연루되면 곧 그것을 잘라버릴 수 있다면 그럼 우리는 전반 과정에서 ‘무형(無形)’적으로 되어 그 무엇도 우리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고 법에 동화된다. 이렇게 차례차례 여러 가지 일을 거치고 나면 최종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으며 무사(無私)하고 누락이 없는 대법의 한 입자가 된다.
만약 줄곧 결과를 자신의 손에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면 일을 하기 전에 이 길은 사실 이미 통(通)한 것으로 남은 것은 그저 과정에 불과하다. 설사 이 과정이 아무리 천변만화(千變萬化)할지라도 오직 대법을 굳게 지키며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럼 변하지 않음으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할 수 있고 길은 반드시 통할 것이다.
대법은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지혜를 열어주고, 법(法)속에서 화안금정(火眼金睛)을 단련시켜 많은 일이 일목요연해지는데, 한눈에 그 근본을 잡을 수 있고, 모든 것이 그것의 진형(真形 진짜 모습)을 드러나게 할 수 있으며, 그 어떤 표상이나 외재 요소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 전반 과정이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은데, 몸은 연극 속에 있지만 마음은 연극에 들어가지 않는다.
(7)
“당시 왕조 인연사 상관 말지니
원만에 이르러 귀가하면 만사가 통하리라”
(《홍음 2》·〈득도명〉)
개인적인 깨달음은 만장(漫長)한 세월 속에서 우주는 모두 변이되었고 모든 생명이 다 법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사존께서 비로소 법을 바로잡고 일체 우주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 매 하나의 대법제자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 체계를 대표하는데, 이렇게 대표하는 체계의 일체 생명 요소는 모두 우리 자신과 대응한다. 우리가 대표하는 체계의 특성 및 빗나가거나 변이된 요소들은 모두 우리 몸에 대응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층층 아래로 내려온, 인간세상 역사의 윤회 과정 속에서 이 체계의 일체는 다 우리 몸에 대응해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한 차례 연기를 했을 것이다. 그런 변이되고 빗나간 요소들이 인간 세상에 대응되면 각종 욕망・집착・사심(私心)・사념(邪念)을 형성한다. 이런 변이된 요소들의 작용 하에서 우리는 역사 윤회 속에서 아주 커다란 업력을 지었을 것이다.
이번 한 세(世)에 우리가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대법에 동화해 자신을 바로잡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동시에 또 역사상 형성된 일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를 우주에 대응하면 곧 우리가 대표하는 체계의 일체 문제를 바로잡고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련 성취하면 전반 윤회 역사 과정 중에서 일체 연원을 다 선해(善解)할 수 있으며 우리가 대표하는 우주 체계와 일체 중생이 모두 바로 잡히고 동화되어 구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윤회전세(輪回轉世)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역사상 그 누구를 연기했었든 상관하지 말아야 하는데, 특히나 천목(天目)으로 본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진실한 역사를 똑똑히 볼 수 없는데 아주 많은 것은 구세력에 의해 고쳐지고 파괴되어 미혹속의 생명은 진실한 상황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아주 많은 것들은 가상(假象)이며 많은 경우 자신의 집착을 만족시키고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런 복잡한 역사연원과 요소를 현재에 끌어들여 현재를 방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을 잘 닦는 것으로 나머지 일체는 이 과정에서 해결될 것이다. 인위적으로 자신에게 마난(魔難)을 증가시키지 말아야 한다.
수련이란 단지 더욱 잘 닦을수록 더욱 간단해지며, 진정한 지혜를 수련해 내면 그 진형(真形)을 볼 수 있고, 그 근본을 잡을 수 있으며,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만 가지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
(8)
“여러분 알다시피 대법제자는 많은 일을 미래에 남겨 둘 것이다. 반드시 사람에게 남기는 것은 아닌데, 아마 우주 중에서 당신들이 법을 실증하고 있기에, 어떤 방면에서 되는지 안 되는지, 미래의 길을 걸어 나오는지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지설법 4》〈2004년 시카고법회설법〉)
“당신이 극단으로 나가는 일사일념(一思一念)이 있고, 후과(後果)를 고려하지 않고, 더는 대법이 어떤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당신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잘 걷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미래에 남겨주는 것으로, 당신들은 반드시 이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당신들이 수련하는 목적은 단지 개인의 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며, 당신들은 중생을 구도해야 하고, 당신들은 또한 미래의 중생을 도와 미래를 창립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여기서 개인적인 깨달음은 이렇다. 법에서 깨달은 것은 반드시 해내야 하며 반드시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지만 법을 실증(實證)한 것이다. 법에서 깨달은 것에 따라 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만약 길이 통(通)하고 바르게 걸으면 그럼 곧 깨달은 법리를 실증한 것으로, 이 법리는 곧 남겨져서 미래 우주에서 영원한 참조가 될 것이다. 만약 길이 통하지 않고, 깨달은 법리를 실증하지 못한다면 그럼 미래 우주에 남겨질 수 없다.
이 과정을 가리켜 ‘증오(證悟 역주: 깨달음을 실증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실증이 앞에 있고 깨달음이 뒤에 있다. 반드시 먼저 실증해야만 끊임없이 더 높은 층의 법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실증하지 않으면 더 높은 층의 법리는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다. 깨달은 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 깨달음은 바로 ‘공리(空理 텅 빈 이치)’가 되며 이 길은 통하지 않고 남길 수 없으니 자신의 것이 아니다.
내 기억에 법 공부 초기에는 여전히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몰랐다. 《전법륜》을 몇 번 배웠지만 늘 보다 높은 층의 법리는 볼 수 없었다. 다른 동수의 말을 들어보니 한번 볼 때마다 본 것의 의미가 다르다고 했는데 그때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글자와 구절만 파고들었고 여전히 보다 깊은 것을 볼 수 없었다. 이에 동수의 말에 대해 의심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나중에 서서히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진정으로 실제 행동으로 법을 실증하고, 진수(真修)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러자 무형 중에 고층의 법리가 눈앞에 층층 펼쳐졌고 비로소 수련의 기묘함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세 가지 일을 다 하고, 심지어 법 공부, 연공 등도 매우 적극적이고, 표현이 매우 확고하지만, 결코 진수(真修)한 적이 없다. 법으로 자신을 대조하지 않았고 착실히 닦지 않았으며, 법을 실증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년간 수련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그저 속인의 복덕(福德)만 쌓았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법을 배워도 법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이는 마땅히 가장 비참한 것이다.
법은 이미 이뤄져 있는 것으로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그는 늘 거기에 있으며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깨달았다 해도 이는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니며 반드시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실증해야만 한다. 실증해야만 비로소 이것이 자신의 것이 되고, 이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중에 참조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이 실증했으면 곧 그만큼 얻은 것으로 이것이 바로 법을 얻는 과정이다. 끝없는 대법 속에서 우리가 실증할 수 없는 부분은 영원히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법을 실증할 수 없다면, 보다 고층의 법리 역시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제아무리 깨닫고 생각하며 파고들어도 보다 고심(高深)한 것을 파고들지 못하고, 단지 사오(邪悟)하고 빗나갈 뿐이다. 오직 한 층의 법리를 실증해야만 보다 고층의 법리가 펼쳐질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법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알기에, 세외(世外)의 많은 수련인들이나 세간에서 인류가 신선(神仙)이라 부르는 이들 역시 대법(大法)을 배우고 있지만 그들은 그 어떤 보다 깊은 내함도 볼 수 없고 그저 표면만 볼 수 있으며 법을 얻을 수 없는데 절대 우리만 못하다.
우리가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통(通)할 수 있고 바르게 걸은 길이 바로 우리가 증오(證悟)한 것으로, 우리 체계 세계의 특성과 법칙을 성취하는 것이자 또한 미래 신우주가 장주불괴(長住不壞 역주: 장기간 머물러 괴멸로 나아가지 않음)하는데 참조가 될 것이다.
(9)
“고요하되 생각지 않으니
현묘함을 알 수 있도다”
(《홍음》·〈도중에서〉)
“고층차 수련에 이르면, 특별히 우리의 공법은 자동적이며 모두 완전히 자동적인 수련이다.”(《전법륜》제3강)
개인적인 깨달음은 법의 내함(內涵)은 완전히 자동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구함이 없어야 저절로 얻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집착으로 생각하면서 글자를 파고든다면 그럼 법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해서 온 것이라 빗나가게 깨닫거나 심지어 사오(邪悟)에 이르게 된다. 많은 사오자(邪悟者)들이 모두 이렇게 한 걸음씩 빗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모르며 여전히 자신이 법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법을 공부할 때 마땅히 조용해져야 하며 생각이 없어야지만 법리(法理)가 저절로 드러난다. 즉, 머릿속에 그 어떤 잡념도 없어야 하는데, 절대 정신을 팔거나, 마음이 딴 데 가 있거나, 혼란해져선 안 된다. 사상이 지극히 순정(純淨)하고, 고도로 집중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지만 법속의 매 한 글자가 사상 깊은 곳으로 치고 들어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마땅히 깨달을 때가 되면 법리가 단번에 눈앞에 입체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아마 법을 공부할 때거나, 아니면 평소 생활하면서 관(關)을 넘는 도중에 갑자기 영광(靈光)이 떠오르면서 몸이 진동하며 한 층의 우주 경계(境界)가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는데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
물론 이는 진수(真修)의 기초위에서,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법을 실증하는 기초 위에서만 한 층 한 층 드러날 수 있다.
어떻게 해야만 조용해져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내게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즉 평소 생활에서 시시각각 스쳐 지나가는 일사일념(一思一念)을 모두 놓치지 않고, 어떤 염두가 떠오르든 즉시 그것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절대로 그것을 방임하지 말고 그것에 따라 허망한 생각을 품거나 그것이 제멋대로 생겨나거나 소멸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제때 그것을 움켜잡고 소멸해야 한다.
단지 그것을 소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또 덩쿨을 더듬어 그것의 근원을 찾아, 대체 어떤 사람마음에 집착해서 이런 염두가 나타났는가? 어떤 변이된 사상이나 욕망이 이런 사념(邪念)을 자양하는가? 근원을 찾은 후 뿌리를 바로 뽑고 직접 근본을 겨냥해 소멸시켜야 한다. 비록 단번에 소멸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의 진면목은 간파할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럼 하나하나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어느 정도 과정을 거치면 제거할 수 있으며, 사상이 곧 청정해진다.
매번 이런 잡념을 잡아 소멸시킨 후 사상이 잠시 청정해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상이 느슨해지면 이런 것들이 또 저절로 뛰쳐나온다. 이때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데, 계속 그것을 붙잡아 그것을 소멸시키고 아울러 그것의 근원을 파야 하는데 이렇게 견지해 나가야 한다.
만약 이렇게 견지해 나갈 수 있다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고달플 것이다. 하지만 사상은 오히려 아주 청성하고 충실하며, 사람 역시 정력이 넘쳐나서 피로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 번 한 번,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심지어 1년을 견지해 나가면 사상이 점점 더 청정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장기간 청정을 유지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면 더는 애초의 그런 고달픈 느낌이 없어진다. 내심이 평온하고 안정되며 아주 가뿐하고 자재해지는데 점차 일종 자동적인 기제(機制)와 상태가 형성될 것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후 지혜가 갈수록 커지는 것을 발견하는데 생각을 움직일 필요조차 없이 한 눈에 많은 것들의 근본을 볼 수 있고 사상 속에서 법리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좋은 상태에 도달했을 때, 한 구절의 법을 읽으면 곧 한 층 경계의 법리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매번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한 층의 이치가 펼쳐진다. 이런 상태는 극히 현묘(玄妙)하고 또 감동적인 것으로 언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물론 평소 일을 하거나 법을 공부할 때 생각하지 않을 순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과 법 공부를 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사존께서는 《전법륜》 제8강 〈수구〉에서 이미 관련 법리를 말씀하셨다.
개인적인 이해는 바로 심태(心態)를 바르게 하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일과 학습에 관련된 문제 이외의 다른 염두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일단 한 생각이 일어나기만 하면 그것을 잡아서 제거한다. 상상을 끌어들이지 말고, 한눈팔지 말며, 허망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은 단지 개인의 수련 과정 중에서 작은 깨달음일 뿐이며, 동수들과 교류해 공동으로 정진하고 제고하고자 한다.
끝없는 법리 속에 우리의 이런 비천(鄙淺)한 깨달음은 마치 끝없이 큰 바다에서 이따금씩 솟아나는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 뿐이다. 일체는 다 법(法)에서 내원하니 우리는 반드시 법을 스승으로 삼고 세 가지 일을 잘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8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