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顏雯)
【정견망】
망(望 눈으로 보고 아는 것), 문(聞 귀로 듣고 아는 것), 문(問 물어보고 아는 것), 절(切 직접 만져보고 아는 것)은 고대 중의(中醫)에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데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 네 방법에 매 항목마다 의사의 깨달음이 끊임없이 향상됨에 따라 기술을 극치까지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맥을 짚어서 환자의 상태나 신분 심지어 생사(生死)의 시기 및 더 나아가 장래와 운명이 어떠한지 까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즉 맥진(脈診)은 고대 의술(醫術)의 심오하고 미묘한 표현 중 하나로 이는 의술(醫術)이 의도(醫道)와 근원이 같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여기서는 청대(淸代) 세 명의를 예로 들어 맥술에 대해 알아본다.
1. 맥진으로 환자의 진위를 판별한 명의 이유극
이유극(李柔克)의 자는 종중(從中)이며 맥진에 뛰어나 산동(山東) 장구(章邱) 일대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한번은 현령의 딸이 중병에 걸렸다. 치료하러 온 의사들을 몇 번이나 바꾸고, 탕약도 여러 번 바꿨지만 그녀의 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극이 병을 귀신같이 치료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령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하녀를 장막 뒤에 숨겨, 그녀를 병든 딸로 가장하게 했다.
뜻밖에도 이유극은 맥을 짚자마자 현령에게 말했다.
“이 여자는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맥상(脈象)을 보아하니 천한 하녀의 신분이지 절대 귀한 신분이 아닙니다.”
현령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놀라 얼른 딸의 병세를 사실대로 말했다. 이유극이 곧바로 처방을 내려 하룻밤사이에 병을 고쳤다.
이유극은 이처럼 맥을 통해 환자의 진위(真偽)와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사람의 앞날과 운세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태소맥[太素脈 역주: 중의(中醫)에서 유파마다 시기마다 다양한 맥진법이 존재하는데 이중 《황제내경・태소》 이론을 근거로 맥을 보는 방법을 말함]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용산진(龍山鎮)의 한 유명한 선비에게 맥을 짚어 아들이 앞으로 벼슬길에 올라 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중에 그의 아들은 과연 진사에 합격했고 의부[儀部 역주: 의제청리사儀制清吏司의 약칭으로 예부(禮部)에서 각종 의식과 예절을 주관하는 부서]의 주사(主事)가 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셀 수 없이 많으며 현지인들은 이유극의 장기인 태소맥이 그의 처방만큼 정확하고 신기하다고 했다.
이유극의 의술은 사실 그의 이웃이자 나중에 절친이 된 왕생주(王生周)에게 배운 것이다. 그 당시 왕생주는 이미 현지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발군의 의술을 지녀 사람들은 그를 산동의 또 다른 명의 적량[翟良 자는 옥화玉華]과 비교하곤 했다. 비록 그의 의안(醫案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한 진료기록)은 점차 사라졌지만, 그가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현지인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다.
이유극은 늘 왕생주를 따르며 그가 의술을 베푸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뛰어난 의술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해 줄곧 그를 스승으로 모시려 했다. 처음에 왕생주는 이유극이 말만 앞설 뿐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유극이 스스로 의서(醫書)를 사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왕생주가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자신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기도 했다. 하루는 왕생주가 일부러 외출했다가 늦게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하니, 이유극이 여전히 자기 집에서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왕생주는 문득 부끄러움을 느껴 즉시 집안 동생을 대하는 말로 이유극에게 말했다.
“셋째 동생, 정말 의학을 배우고 싶다면 나에게 직접 말하면 되는데 왜 나를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는가?”
그 이후 왕생주는 자신이 아는 것을 남김없이 다 알려주었고, 그의 의술을 이유극에게 남김없이 물려주었다. 1년이 되지 않아 이유극의 의술이 크게 발전했다.
어느 날 왕생주가 한 사대부 집에 가서 처방전을 보고는 물었다.
“이 처방을 누가 내렸습니까?”
사대부가 이유극이라고 대답하자 그가 감탄하며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후계자가 없을까 두렵지 않다. 내가 죽으면 이유극은 반드시 나를 대신하여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다.”
몇 년 후, 이유극은 정말로 유명해졌고 그의 의덕[醫德 역주: 원문은 ‘호리병을 차고 다니는 덕’(懸壺之德)인데 자고로 호리병은 중국에서 의사의 상징이니 의덕을 말한다]은 현지에서 미담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
2. 맥진으로 환자의 관운을 안 부지현
부지현(傅之鉉)은 자가 목희(木希)로 청대(淸代)에 초(楚) 땅에 은거했던 명의다. 그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조상이 사천 장수(長壽)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부지현은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뜻밖에 각혈 증세가 나타나 오랫동안 병이 낫지 않자 스스로 의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부적으로 오성이 아주 좋고 인내심이 있어서 몇 권의 의서를 연구한 후 의리(醫理 의학의 이치)의 오묘함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을 치료했는데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심지어 이해하기 어려운 태소맥에 대해서도 아주 정통했다.
현지의 한 사대부가 그의 맥술(脈術)을 시험해 보고자 비슷한 나이와 체격을 지닌 두 여자를 데려와 어두운 장막 뒤에 앉히고 한 사람은 왼손을 내밀고 한 사람은 오른손을 내밀어 다시 부지현에게 맥을 짚게 했다. 그는 맥을 짚으면서 말했다.
“이건 두 사람입니다.”
그 사대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감탄하며 칭찬했다.
“당신의 맥술이 이렇게 심오하고 미묘하니 한대의 곽옥(郭玉)과 견줄 만합니다.”
여기서 곽옥은 한대(漢代)에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던 태의(太醫)로 침술과 맥술에 동시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화제(和帝)가 그의 맥술을 시험하기 위해 1남 1녀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 남자의 손목이 가늘어서 함께 두면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곽옥은 장막을 사이에 두고 각각 앞에 있는 왼손과 오른손을 들어 맥을 짚고 나서 말했다.
“이건 한 사람이가 아니라 일남일녀(一男一女)입니다.”
이때부터 화제는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부지현은 맥상(脈象)을 통해 관직의 승진과 좌천까지 알 수 있었다. 당시 정(丁)씨 성을 가진 한 순무(巡撫)가 예(豫) 지역에서 초(楚) 지역으로 전근되었는데, 부지현이 맥을 짚고는 말했다.
“당신은 맥상으로 보아 군상이기[君相二氣 역주: 맥에서 군상이란 군주에 해당하는 심과 재상에 해당하는 폐 두 경락을 가리킨다. 즉 심과 폐 두 맥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에서 군주와 재상이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상이니 머지않아 제부(制府 중앙 부서)로 승진하실 것입니다.”
또 장(張)씨 성을 가진 또 다른 순무가 있었는데, 부지현이 맥을 본 후 감히 직언할 수 없었다. 다만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이 순무는 맥이 거칠고 급해서 노역(勞役)에 종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 관원이 쇠사슬에 묶여서 투옥되어 조정에서 그를 요참(腰斬 허리를 잘라 죽이는 벌)으로 판결하려 했다.
부지현이 진맥한 후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놀람은 있어도 위험하진 않으니 그렇게 심한 벌을 받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노역은 해야 합니다.”
나중에, 그가 한 모든 말이 다 영험했다.
3. 맥으로 태아를 알아본 여영
만청(晚清 청대 말엽)시기 산동 황현(黃縣)에 여영(呂榮)이란 선비가 있었는데, 의술이 매우 높았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듣고 치료하러 왔다.
어떤 사람이 머리에 구멍이 나서 피가 멈추지 않아 목숨이 위태로워 보였다. 여영이 진맥 후, 단지 약을 처방했을 뿐인데 그 사람의 병이 나았다.
또 다른 여자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지가 이미 굳어 있었다. 여영은 환약을 그녀의 입에 넣고 환약이 다 녹자 깨어났다.
그가 병을 치료하면 뿌리를 뽑을 수 있었던 원인은 대부분 그의 정확하고 독특한 맥술(脈術) 때문이다. 어떤 부인이 중병에 걸려 곧 죽을 것 같았다. 진료한 의원들은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나중에 여영을 찾아가 진맥하자 그가 가족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단지 임신해서 불편할 뿐입니다. 쌍둥이를 임신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부인은 몇십 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지금 여영이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말하자, 도저히 믿으려 하지 않았고, 여영이 지어준 태아를 안정시키는 약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은 나날이 심해졌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여영이 처방한 약을 복용했다. 곧 불편한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몇 달 후, 과연 여영의 말대로 그녀는 무사히 두 아들을 낳았다.
여영의 의안은 아주 많은데 자신이 편찬한 《경험의서(經驗醫書)》에만 20권 이상의 기록이 있다. 이 책은 또한 후대의 의사들에게 귀중한 의학적 참고 자료를 남겼다.
참고자료:
건륭 20년 《장구현지(章邱縣志)·인물지(人物志)》
동치(同治) 8년《강하현지(江夏縣志)·잡지(雜志)》
동치 10년 《황현지(黃縣志)·인물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36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