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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는 것과 무시당할까 두려워함을 말하다 (하)

대법제자 추원(秋遠)

【정견망】

4. 소홀히 넘기기 쉬운 무시

나는 일찍이 동수와 사적(私的)으로 교류할 때, 다른 동수의 법에 어긋난 일을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동수는 자기 항목에서 일부 동수들이 법에 부합하지 않는 일들을 언급했고, 나도 평론했다. 또 어떤 동수는 자신이 속한 지역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누구에게 심각한 병업이 생겼고, 누구는 어떻다고 했는데 나도 맞장구를 쳤다. 또한 나는 일부 동수들의 법에 있지 않은 언행을 보고 역시 뒤에서 담론했다. 이런 것들은 과거에 서로 교류할 때 각자 의견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나중에 배후(背後)에 더욱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동수가 언급한 일에 대해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한쪽 말만 믿고 따라서 논의했다. 동수가 말을 하다보면 또 불가피하게 그 자신의 관념과 사람 마음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동수에게 맞장구치며 다른 동수를 담화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며, 다른 동수에게 불공정할 수 있다.

또 설사 어떤 동수가 하는 방법이 법에 부합하지 않거나 심지어 심각한 문제가 있을지라도 배후에서 담론하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의 방법을 무시하는 것은 잠재적으로는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기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남들이 너무 문제가 많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또한 수련인이 해야 할 수구(修口)와 수심(修心)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고 의논할 때 신마저도 옳게 보지 않는다.”(《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늘 心性(씬씽)상의 집착을 불만으로 바꾸어 사람을 찾아 쏟아내는데, 어떤 사람은 도리어 맞장구치고 부추기는바, 정말 그런 경지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게 마련이다.”(《크게 꾸짖다》)

동수와 함께 다른 사람을 논의하고 일부 현상을 담론할 때 또 아주 미묘한 심리가 있다. 서로 간에 모두 일부 문제를 볼 수 있고, 공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며, 유유상종한다. 서로 맞장구 치고 이해하는 가운데 각자의 사람마음을 조장한다. 사실 서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폄하하는 것이다. 배후에는 자신의 강점을 과시하며(인식이 좋고 행동이 바르다), 남의 약점(남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을 비웃고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형편없는 방법을 나열해 놓고 ‘평점’을 매기면서 자신이 한 수 위에 있는 것처럼 우쭐대는 심태다.

직설적이고 분명하게 남을 무시하고 비웃는 것보다 이런 ‘교류’라는 이름으로 남을 평가하는 것은 미혹성이 더욱 강해서 종종 배후에 자신을 높이고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명혜편집부 문장 《아첨과 자심생마》에서는 “그중 타인에게 아첨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현상이 많은 지역과 항목에서 적지 않게 존재해 일상화된 듯하고, 적지 않은 사람이 이미 습관화되어 파란을 조장하기까지 이르렀다.”라고 했다.

나는 ‘교류’할 때 남을 의론하고 평가하는 배후에는 아첨과 자랑이 있음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관점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아첨이며, 동조하면서 사람 마음을 조장할 수 있다. 또 남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배후에는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자랑하는 것이 있다. 당신이 한 마디 내가 한 마디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양측의 사람마음이 모두 조장되어 만족감을 느끼지만, 사실 무의식중에 자랑과 아첨에게 시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비록 나는 이런 사람 마음이 아주 감춰져 있어서 마치 없는 것 같았지만 신(神)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 정말로 ‘교류’중에 본의 아니게 많은 업(業)을 지었다. 나중에 그만두긴 했지만, 일단 조심하지 않으면 함부로 입을 놀릴 때가 있다. 나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모두 후과(後果)가 있음을 발견했는데, 마치 아주 사소한 일념이나 한 마디로도 다른 공간의 정교한 기제를 작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느 날 가족과 속인 아무개가 얼마나 형편없다고 말했는데, 겉으로 보기에 그 사람의 행동은 확실히 도덕적으로 좋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해 한두 가지 일을 말했는데 배후에서 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분명했다. 가족도 내 말에 동조했는데 대체로 그가 정말 형편없다고 했다. 아주 빨리 나는 신체가 불편해졌고, 이는 남을 무시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즉 수구(修口)하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지는 모두 신(神)이 관장하시는 것으로 매 사람의 위치를 배치하고 화복(禍福)을 조절하신다. 내가 상관할 일이 전혀 아니다. 나는 단지 선(善)한 마음으로 남을 생각하고 좋은 말로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은 전혀 없으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해서 업을 짓는다면 자업자득이다.

6. 현대인의 어리석음

예전에 나는 또 일부 속인들의 형편없는 표현을 친지들에게 표현하려는 심태가 있었다. 여기에 숨겨진 대사는, “당신이 보세요, 우리 수련인은 절대 이렇게 하지 않으며 수련인은 속인보다 훨씬 낫습니다.”는 것이다. 사실 배후에는 선심(善心)과 자비심이 아니라 교활한 사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이런 방식으로 속인들에게 수련인의 좋은 점을 비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으로는 법을 실증할 수 없기 때문에 종종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다른 공간에서 사람 마음을 보면 바로 교란과 저애다. 그날 내가 한 말은 가족에게 그 속인을 강렬히 무시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외에 가족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는가? 법을 실증하는데 어떤 이점이 있는가? 이는 증오를 선동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한 사람의 내심에 증오가 담길수록 선량(善良)에서 더욱 멀어지고 반대로 대법 진상을 알기 어려워진다.

나도 과거에 스스로 총명한 척하면서 대법제자가 좋다는 것을 실증하려 했지만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과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법에서 언급하신 “현대식 어리석음”에 속한다. 즉,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긴 행동은, 머리를 짜내고, 감각에 의존하며, 사람 마음으로 일을 하면서 오히려 신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것은 바로 전통문화가 부족한 현대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다.

명혜편집부에서 최근 발표한 문장에서는 많은 현상들을 언급했는데, 예를 들어 말주변이 좋아 번지르르한 말로 남에게 아첨하고, 각종 기회를 이용해 자신을 선전하고 내세우며, SNS를 이용해 자신을 치켜세우고, 자신을 자랑하며 자아가 팽창하는 등등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모두 ‘현대식 어리석음’에 속한다. 스스로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큰 손해를 입고서도 모르는 것이다.

문장에서는 또 ‘과장’을 말했는데, 내가 이해하기에 말을 과장하면 손해다. 남을 칭찬하는 사람은 좋은 말로 남의 환심을 사려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해서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며 남의 인정을 받아 만족하고 명예와 인정에서 좋은 점을 얻으려는 것이다. 사실 전통문화에 따라서 본다면, 아마 양쪽 모두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즉, 칭찬받는 사람은 내심이 팽창해 자만하며 심성이 떨어지는데, 이렇게 계속 내려간다면 아마도 자심생마의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러므로 듣기 좋은 말은 자신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디에 이득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칭찬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남을 치켜세우는 것과 같다(의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음), 사람을 팽창시켜 아래로 떨어지게 하면 이는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상대방의 환심을 산 다음 스스로 기뻐하고 아주 작은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고, 또 업을 지어 반대로 자신도 해치게 된다. 그렇다면 쌍방이 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어디에 좋은 점이 있는가?

7. 자랑

자랑하는 목적은 남에게 칭찬을 받아 만족을 얻으려는 것인데, 동수 문장에서는 무엇을 자랑하면 곧 그것이 부족해진다고 말했다. 아마 이것이 진상(真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랑하는 심태를 본다면 이 역시 현대인의 어리석음이 아닌가? 고만한 내심의 만족을 얻기 위해 도리어 미래에 아주 실재적이고 좋은 것을 잃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닌가?

속인은 흔히 부를 과시하고,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옷을 과시하며, 좋은 집과 차를 과시한다. 반면, 일부 동수들은 뛰어난 재능과 도덕적인 인품을 자랑하고 정진(精進)을 자랑하며 자녀를 자랑하지만 사실 내심은 같은 것이다. 단지 형식만 다를 뿐이다. 오히려 더욱 미혹성이 강해서 종종 자신조차 자랑과 과시를 인식하지 못한다.

동수와 나누는 아주 일상적인 왕래, 사진 찍기,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하고, 동수의 아이에 대한 칭찬 몇 마디, 동수의 법리에 대한 깨달음을 칭찬하는 것 등이 아마 자랑과 아첨일 수 있다. 쌍방 모두 사람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데 비록 다 평범하고 작은 일이지만, 그 안에도 사람 마음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은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계속 축적해 내려가면 이렇게 좋지 않은 사람 마음을 자양하고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닦아 없애지 않는다면, 그럼 또 무엇을 닦아 없애는가?

이렇게 보면 성실한 사람이 가장 수지가 맞는 것 같다. 그는 가장 손해 보지 않고, 말도 많지 않으며, 자랑하거나 아첨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덕을 잃거나 업을 짓지 않을 것이다. 말이 소박하고 성실하며 관대해서 조금의 과장도 없다. 사실 과장이 많은 것은 모두 ‘진선인(真善忍)’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모두 사람 마음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자신에게 보다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해서지만 실제로는 도리어 나쁜 것을 더 많이 얻는다.

주위에 보면 일부 동수들은 정직하고 순박하며 소통이 간결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데 무슨 꽌시(關係)를 맺으려 하거나 친한 척 하지 않으며 자랑이나 아첨과 같은 사람 마음이 없다.

나는 그들과 대조해서 자신에게 무엇이 더 많은지 찾아봐야 한다. 오늘, 한 이웃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이웃이 여행을 갔다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웃을 만났을 때 자연스레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곧 깨달았다. 나는 왜 습관적으로 뒤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고 남의 말을 하는가?

성실한 그런 동수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여 한마디 인사만 하고 끝냈을 것이다. 이웃에게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예 묻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렇게 묻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사실 자세히 비교해 보면, 성실한 사람은 그다지 말이 많지 않고,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염탐하지 않으며, 또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도 없으며 (자신의 관찰력이 강하고 무엇을 알아챘는지)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연스레 꺼낸 말 한마디에는 사실 많은 사람 마음을 담고 있다. 모두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반응한 것이지만 이런 사람 마음을 지닌 대화를 없애려면 세심하게 생각해서 하나하나 제거해야 하며 쓸모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순정(純淨)한 것만 남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런 습관을 고칠 수 없으며 늘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는데 그 배후에는 자랑, 아첨, 호기심 등의 사람 마음이 많다.

사실 많은 습관과 사람 마음이 모두 어려서부터 점차적으로 형성되어 조금씩 쌓인 것이다. 그러나 수련하려면 다시 하나하나 떼어내고 없애서 쓸데없는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마음이 비로소 차분해질 수 있으며 수련인의 행동에 부합한다.

나는 성실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무슨 이익을 더 얻으려는 마음이 없고, 인간관계에 끌어들이려 하지 싫고, 자신을 과시하거나 상대에게 아첨해서 잘 보이려 하지 않으며, 호기심도 적기 때문에 하는 말이 적다고 보는데 배후에 사람 마음이 적은 것이다.

반면 나는 습관적으로 말이 많고 오지랖이 넓은데 사실 이런 사람 마음이 배후에 있는 것이다. 늘 대인관계를 이용해 좋은 점을 얻으려 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아첨하고 자랑하면 늘 더 나쁜 것을 얻기 때문이다.

또 도덕적인 인품을 자랑하는 것을 말하자면, 내 생각에,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무엇을 했거나, 또는 단지 인식했을 뿐임에도 이런 표준을 사용해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길 좋아하고 모두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남들이 해내지 못하면 곧 무시하는데, 사실 자신의 심성이 너무 낮고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다 게으르고 의욕이 없어서 마치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여긴다.

또 자신이 한 시간 포륜(抱輪)을 할 수 있으면 한 시간 포륜하지 못하는 이를 보고 다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고 본다. 또 자신이 수구(修口)해야 하며 솔직하게 말해야 함을 깨달으면 여전히 잡담하는 동수를 보면서 그야말로 수련인답지 않다고 여긴다. 또 자신이 화를 내지 않으면 곧 성격이 나쁜 동수들은 다 착실히 수련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이런 심태들이 바로 명혜편집부 문장에서 언급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부 대법 일을 하고는 비할 사람이 없을 만큼 자신이 너무 대단하다고 여기며, 나아가 매사에 자신의 기준을 따르도록 다른 사람을 강요한다.”

내 기억에 나는 전에 화를 잘 냈는데, 고치고 나서는 거의 화를 내지 않는다. 한 동수가 작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작은 것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은 이해할 수 있고 큰일로 간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이 말에 문제가 큰데, 나는 줄곧 화를 내는 것은 착실히 수련하고 진수(真修)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고, 줄곧 이런 생각을 고수해왔다. 동수의 생각이 너무 속인화 되어 수련인의 심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다 이 교류 문장을 쓰면서 비로소 내가 어디가 잘못됐는지 깨달았다. 겉으로 보면 내 인식이 마치 동수의 인식보다 수련인에 대한 법의 요구에 더 부합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내 인식 배후에는 남을 깔보는 마음과 동시에 자신을 치켜세우며 자신이 상대방보다 (인식이)낫다고 생각하며 또 자신이 원칙적인 관점에서 옳다고 여기는 당 문화도 있었다.

여기까지 쓰면서 나는 자신의 표준으로 다른 사람을 요구하는 배후에는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이 한 것이 바로 표준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무 형편없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이 설정한 표준으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폄하하는 것이다. 과거에 나도 어렴풋이 때때로 자신이 남을 훈계하고 설교하려는 마음가짐이 있다고 느꼈는데, 마치 남의 스승이 되려는 것 같지만 또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였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똑똑히 알진 못했다. 지금 알게 된 것은, 바로 스스로 표준을 세운 후 남을 깔보고 잘난 체한 것으로 이는 거만하게 자아를 팽창한 것이다.

사실, 대법 수련은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이렇게 많은 제자들이 서로 다른 심성을 지니고 있고, 각 방면의 업력과 배후 물질이 다르며, 법에 대한 인식이 다른데, 어떻게 자신의 표준으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아마 어떤 동수는 이 방면이 부족할 수 있는데, 배후의 근원은 이 방면의 업력이 큰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방면은 아주 좋을 수 있다.

혹은 어떤 동수는 현재 정진하지 못하며 업력의 저애를 받고 있지만, 이 업(業)을 없앤 후에 앞으로 매우 정진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질서 있게 배치하신 것인데 어떻게 당 문화의 획일적인 방법처럼 통일할 수 있단 말인가? 단칼에 이렇게 하려고 시도하면 오히려 사람을 밀어낼 수 있다. 원래 상대방은 천천히 한 단락 길을 가다가 나중에 따라잡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 제 위치까지 가라고 요구하면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지혜가 부족한 방식이다.

대법의 가르침에 따라 동수의 장점을 많이 보아야 하는데, 이런 각도에서 보면 많은 동수들의 장점을 내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매 한 동수의 전반적인 수련 상태는 나로서는 전혀 볼 수 없으며 그것은 사부님과 신(神)만이 보실 수 있다. 때로 자신이 사람을 평론하는 것은 완전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이다. 동수의 수련 진도와 일체를 장악하신 것은 사부님이시며, 나는 단지 선한 마음과 선한 말만 할 수 있을 뿐 그 나머지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등 분수를 벗어난 행동은 모두 업을 짓는 것이다.

쉽게 오만해지는 것은 한 생명의 거대한 약점이자 아울러 오만한 마음은 아주 교활해서 형식을 바꿔 나타날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오만한 사람을 경멸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경멸하는 것 역시 사실 자신의 거만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이 방면에서 끊임없이 닦아 없애야 한다. 상대의 어느 방면이 약하든, 가령 사람 속에서 약하든, 도덕방면이 약하든, 그 어떤 표현에 직면해도 자신은 늘 심성을 엄밀히 지켜야 한다. 함부로 무시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겸손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지혜인데 일단 경박해지면 큰일이다.

나는 사람이 오만해지기 쉬운 이유는 자아의 마음이 배후에서 자신의 강함과 우수함을 실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울러 자아(自我)는 객관적이고 공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장점은 과장하고 남의 결점은 확대한다. 때문에 자신은 마치 꽃처럼 아름답다고 보기 쉽다.

최근에 일을 하려는 마음에 이끌려 법 공부와 연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모두 돌파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안 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자신이 조금만 잘하면 곧 이 방면에서 잘하지 못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또 오만하고 도도한 마음이 번거로움을 불러오는데, 무엇을 비웃으면 그럼 곧 정말로 그것을 직면한다. 작고 사소한 생각이 움직이는 순간, 배후에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스스로 번거로움을 찾는 것이다.

8. 무시당할까 두려운 마음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또 누구나 남에게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는데 거의 다 그렇다. 사실 남이 존중해주길 바라는 그것은 힘껏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려는 것으로 바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길 좋아하는 것이다.

‘남들의 존중을 받으려는’ 이런 생각 역시 어려서부터 보고 들으면서 형성된 것으로, 일종의 뿌리 깊은 관념이다. 또한 이런 관념은 뿌리가 깊어서 도전이나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존, 존엄 등과도 연대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무시당할 때 마치 자신의 인격마저 모욕당한 것처럼 느끼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남들의 존중을 받기 위해 각종 자본을 축적해서 자신을 실증하려 하는데 배후에는 아주 많은 사람 마음이 있다.

사실 ‘남들의 존중을 받으려는’ 마음 역시 퇴고를 거치지 않은 현대인의 우매하고 어리석은 논리다. 배후에는 남이 자신을 존중해야 자기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고, 곧 복과 행운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데 정말로 그러한가?

우리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한번 분석해보자. 양귀비(楊貴妃)는 당 현종의 눈에 띄어, 후궁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최고 권력자의 존중을 받아 실력으로 각종 수승한 영광을 얻었고, 그녀의 일가족 전체도 위아래로 존중 받았는데 대단히 영광스러웠다.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존중을 받은 최정상급일 것이다. 그러나 결말은 어떠했는가? 황제가 하늘의 이치와 양지(良知)를 어겨 마찬가지로 하늘의 징벌을 받았다. 황제 역시 스스로 운명과 복을 주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신(神)만이 주재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의 존중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는 것이 복과 재앙의 근원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느냐가 관건이다. 신이 주재하시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보다 신의 환심을 사는 것만이 자신에 대해 정말로 더 나은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양귀비는 박명했지만 아무도 대접하지 않는 시골 아낙의 복이 더 오래갈 수 있다. 때문에 누가 당신을 존중하는가 여부는 모두 중요하지 않으며 관건은 신(神)의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럼 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맺음말

내 생각에 많은 현대 관념은 모두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인데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나쁜 점을 더욱 많이 얻는다. 이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잔인한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의 생각과 방법이 모두 자신의 미래를 복(福)이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 정직한 사람에 비하면 모두들 너무 어리석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당신 이 사람이 얼마나 총명하고, 얼마나 교활하든지 간에 결국은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 사람이 아주 우둔한데, 당신은 그를 아주 우둔하고 아주 단순하다고 하고, 저 사람은 아주 교활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걷든 결말은 마찬가지로서, 결코 사람이 교활하므로 무슨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단순하므로 무슨 변화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교활함은 단지 자신을 나쁘게 변화시킬 뿐이며 업(業)을 짓는 중에서 또 사람을 아래로 미끄러지게 하는데, 주위 환경과 자신이 긴장되면 사람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진다. 복잡한 생각은 단지 자신을 더욱 좋지 않게 변화시킬 뿐이다.”(《미국수도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사람은 그래도 성실하고, 본분을 지키며, 순박한 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다.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또한 수련해서 하늘로 돌아가는 표준의 시작이자 첫걸음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랑하고 아첨하는 등의 그런 교활한 사람 마음을 가지고 그토록 착실하지 못하고 관대하지 못한데 어떻게 신(神)이 될 수 있겠는가? 아마 심지어 인생의 복분마저도 지키지 못할 수 있다.

(완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