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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찾음”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정견망에서 동수의 교류 문장 《수련 중의 ‘왜’》를 보면서 ‘안으로 찾는’ 문제를 언급한 것에서 깊은 감수가 있었다. 안으로 찾을 줄 모르는 동수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수련 중에서 자신을 보기란 정말 어렵다. 오늘 나는 동수와 함께 법을 공부했는데 우리 둘 사이에 나눈 대화가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똑똑히 설명해준다. 우리 둘은 그래도 날마다 안으로 찾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임에도 돌이켜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가 공부한 것은 《정진요지》였는데 〈시간과의 대화〉를 공부할 때 다음과 같은 단락이 나왔다.

“신: 이러한 문제는 이미 몹시 심각합니다. 상대방이 어떠어떠하다고 그들이 본 것으로 반대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이에 대해 나와 동수가 나눈 대화의 일부다.

나: 사부님께서는 이미 설법에서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으니 바로 자신을 보고 안으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개 동수는 매번 나와 말할 때마다 누구누구는 이렇고 누구누구는 저렇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그녀에게 왜 자신을 보지 않는지 말해봤어요?(처음부터 밖을 보기 시작하는데 먼저 생각한 것이 다른 동수였다) 매번 듣고 싶지 않은데 온통 좋지 않은 것들이라 듣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져요.

동수: 이럴 때 당신은 마땅히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녀가 왜 당신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요? 방금 공부했잖아요!(동수는 책을 가리키며 한 번 더 읽었다.)

나는 당시 말문이 막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내 생각에, 내겐 이런 문제가 없는데 내가 이런 동수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반박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 수구하지 못했다)

동수: 당신은 배후에서 동수를 담론하는 게 아닌가요?

나: (생각해보니 내가 동수를 담론해선 안 되니 곧 말을 바꾼다.) 동수에 대해 담론해선 안 된다고 해놓고 또 했네요. 나도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방금 아무개 동수의 집안일에 대해 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또 밖을 바라보며 남을 탓한다)

동수: 아, 네 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당신이 애초 아무개 동수가 집에 가정부를 고용한 것에 대해 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동수 역시 반대로 나를 비난하고, 둘이 웃으면서 서로를 비난한다) 가정부를 고용하는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둘이 이렇게 신경을 써서 뭘 하겠습니까?

나: 이 일에 대해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고 (자신을 변명하면서 여전히 안으로 찾지 않음) 결국 듣고 듣지 않고는 그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동수: 당신이 말하면 남이 말을 듣던가요?

나: 그래요, 그녀는 자기 생각과 주관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동수: 그럼 우리 둘이 왜 남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죠?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녀 문제 때문에 나는 며칠 동안 마음을 조용히 할 수 없었어요.

나: 이제 우리 둘 다 안으로 한번 찾아봅시다, 남의 일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대체 무슨 마음일까요?(마침내 안으로 찾는 것을 생각하자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나: 내 생각에 이건 사심(私心)인 것 같아요. 그녀가 집에 가정부를 고용하면 가서 법을 공부하거나 교류하기 불편하고 말을 할 때도 또 가정부가 듣지 못하도록 속닥거려야 하는데 이건 수련을 교란하는 것이 아닙니까! 겉으로는 수련을 위해 생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일부 ‘이익’이 영향을 받자 사심이 장난을 친 것입니다.

동수: 나는 그녀에 대해 정(情)이 있고 또 그녀를 숭배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녀는 법리가 명확하고 깨달음이 좋다고 여깁니다. 당신도 그녀에 대해 정이 있어요!(동수는 또 밖으로 본다)

이때 사람이 와서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이 대화를 생각해 보면서 속으로 나는 안으로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하며 쓴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잠재의식에서 늘 일단 밖으로 보고 남의 부족함을 본다. 보는 게 아주 똑똑해서 한눈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은 보지 않고, 자신의 집착을 직면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숨겨진 집착심을 깊이 파헤치려 하진 않는다. 단지 남을 고치려고만 할 뿐 자신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안으로 찾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가? 나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 단계에서의 인식은 다음과 같다.

안으로 찾음은 자신의 부족함을 찾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 감춰진 집착심을 파는 것으로, 자신이 진선인(真善忍)에 부합하지 않는 곳을 찾는 것이다. 일단 자신을 찾으면 곧 닦는 것으로 개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의 ‘위사(爲私)’한 본성이 자신을 수호하고, 자신을 견지(堅持)하며, 개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안으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안으로 찾지 않으려 하는 뿌리는 ‘위사(爲私)’에 있다.

이것은 구우주(舊宇宙)의 모든 것을 수호하려는 구세력(舊勢力)이 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밖을 보고 안으로 찾지 않을 때면 사실 구세력과 한패가 된 것으로 이는 아주 위험한 일이다.

왜 사부님께서는 거듭 ‘안으로 찾음’을 강조하시는 걸까? 왜냐하면 ‘안으로 찾음’은 진선인(真善忍)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신우주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구우주와 결렬하는 것을 의미하며 ‘위사(爲私)’한 자아를 개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안으로 찾음은 한 차례 자아와의 결렬(決裂 찢어져서 갈라짐)이고 한 차례 신구(新舊) 자아의 환골탈태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동시에 구우주의 법리(法理)와 기제(機制) 역시 우리를 제한하며 우리더러 안으로 찾지 못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구우주의 법리는 ‘위사’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안으로 찾음은 구우주의 기제를 돌파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안으로 찾음’이 어려운 것 외에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일도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불성무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먼저 남을 생각하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매사에 “먼저 남을 생각한다”는 말은 보기에는 간단해보이지만, 실제로 해내기란 아주 어렵다. 몇 가지 작은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어머니가 이사를 나갔다. 나는 어머니한테 우리 집 생활용품을 가져가고 불필요한 것들은 사지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릇을 가져갈 때가 되자 속으로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쟁반을 가져갈까 걱정이 되었다. 모두 내가 정리하고, 포장했는데 쟁반을 손에 들고는 마음속으로 한바탕 사상투쟁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쟁반이 아까워서 그냥 평범한 것을 골라 어머니께 드렸다. 이기적인 마음이 얼마나 명확한가? 나 역시 이 이기적인 마음이 잘못임을 알았고 이렇게 해선 안 되며 마땅히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게 어디 그리 쉬운가? 이틀 후 또 엄마에게 휴지통을 가져다드렸는데, 둘 다 우리 집에서 사용하지 않던 것이다. 가져가려 할 때 또 취사선택을 했다. 하나는 남겨둘까? 어느 것을 남기지? 한참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이 사심(私心)을 극복하고 둘 다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자기 어머니한테도 늘 이렇게 이기적이며, 나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이기심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것 앞에서도, 아무리 작은 일 앞에서도 사람의 출발점은 우선 자기 자신이고 먼저 자신의 이익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사소한 일들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가?

“남을 먼저 생각함”은 선타후아(先他後我) 내지는 심지어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의미하는데 “무사(無私)”를 해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고 구우주의 기제 역시 위사(爲私)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남을 먼저 생각하려면” 자아를 내려놓고, 자아를 버려야 한다. 이는 구우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구우주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사부님의 합격한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안으로 찾음”, “남을 먼저 생각함”은 구(舊) 자아와 결렬하고 구우주와 결렬하는 과정이다. 비록 어렵다고 하지만 또 어렵지도 않다. 오직 진선인(真善忍)에 동화하려 하고 신우주에 동화하려고만 하면 그럼 어렵지 않다.

제자에게 단지 수련하려는 이런 소원만 있으면 되며 모든 것은 다 사부님께서 하신다. 오직 수련하려고만 하면 대법은 불가능이란 없고 사부님께 불가능이란 없다. 바로 자신이 수련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니 우리가 오직 충분히 신사신법(信師信法)할 수만 있다면 그럼 해낼 수 있다. 관건은 ‘믿음(信)’에 달려있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당신이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라 하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작은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