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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과 인체 생명에 대한 정견 (5)

【정견망】

제4장 현대 과학 발전의 오류

현대인들은 흔히 이번 차례 인류 문명이 날고기를 먹고 동물 가죽을 입던 원시시대와 작별한 이래 과학 기술이 거대한 진보를 이뤄 인류 생활이 천지가 개변될 정도로 크게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비약적인 발전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에 또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각종 정교한 발명과 창조에 따라 우리의 업무 효율이 향상되고 시간도 절약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더 바빠져서 더 착실하게 살지 못하고 현대병 및 퇴폐적인 문화가 범람했다.

의학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의료 수준과 조건은 개선되었지만 동시에 바이러스도 변이되어 우리의 과학 기술에 뒤떨어지지 않거나 종종 의료 발전 속도를 초과한다.

경제와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의 생활수준은 향상되었지만 환경 역시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지구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각종 천재지변(天災地變)도 흔해졌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의 지구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지구를 빌려 쓰는 것이다.

통신과 컴퓨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지구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지만 인간관계는 더욱 냉담해졌고 사람들 사이의 벽도 더욱 두터워졌다. 카페와 블로그의 댓글에는 전통적이고 순박한 마음가짐과 상호 존중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 욕을 하거나 타인의 지능에 대한 경멸, 질투에서 비롯된 각종 풍자와 비난으로 대체되었다.

물질문명이 크게 향상됨에 따라 GDP는 빠르게 증가했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마음과 도덕은 오히려 떨어져서 두 살 여자 아이가 두 번이나 차에 치었음에도 행인들은 무시했고, 좋은 일을 하려던 사람이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썼으며, 아이들은 독 분유에 중독되어 죽거나 학교에 난입한 불평분자의 칼에 맞아 죽거나 또 부실공사로 학교건물이 무너져 죽는다.

전반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세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자연에 적응하는 생존 능력은 더 강해졌지만 인류의 많은 근본적인 문제와 평화, 건강, 충실한 즐거움과 같은 아름다운 바람은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졌다. 오늘날 인류는 원시인보다 자신을 파괴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으며 핵무기 등의 출현으로 지구가 여러 차례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번 차례 인류 문명의 과학 발전에 무엇이 누락되어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많고 이렇게 큰 폐해들이 모두 사회와 과학 기술의 발전에 필요한가? 아래에서 우리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한다.

1. 정신성(精神性) : ‘수학’은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과학기술계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는 흔히 물질만 중시하고 정신적인 측면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걸러낸다.

현대 과학기술이란 거대한 빌딩을 구축한 이론적 토대에 해당하는 수학(數學)부터 살펴보자. 수학의 발전은 자연환경 현상에 대한 인간의 감각적 인식에 의해 확립된 증명할 필요가 없는 법칙(소위 ‘공리’)을 기초로 삼은 한 다음 객관적인 물질세계의 수리적인 특성을 추출해 사상(思想) 속에 하나의 수학 체계를 구축한다. 이런 조작을 통해 수학은 수(數)의 세계를 빌려 인간의 감각으로는 직접 느낄 수 없는 영역까지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현상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 심지어 수학을 인간의 새로운 ‘감각’이라 부르는 경우도 한다.

그러나 이 수학이란 ‘감각’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의 정신현상이든 수학으로 추상화될 때면 그것은 더는 정신현상이 아니다. 수학으로 추상화하는 이 과정은 마치 여과 과정처럼 정신적인 측면을 ‘여과’한다. 하지만 정신의 존재는 우리 인류 의식이 느끼고 이해해서 확립된 것이다. 이를 통해 보자면 수학이 우리의 시야를 구속하는 협애한 틀을 가져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살아있는 것이고 무엇이 생명이 있는 것인지 똑똑히 판단할 수 있는데, 무슨 부품을 해부할 필요 없이 단정적으로 알 수 있고, 또 누가 우리더러 정신이 무엇인지 증명해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하려면 얼굴의 다양한 특징을 하나씩 대조해 자신의 기억 창고에 맞출 필요가 없으며, 매우 포괄적인 전체 이미지나 뒷모습, 심지어 정신 영역의 일부 추상적인 표정과 기질만으로도 그가 자신이 아는 누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수학은 근본적으로 생명이 아니고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수학 체계에 의존해 만들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비생명적이고 비정신적이다. 이 점은 현대 과학이 생물을 연구하는 방법에서도 알 수 있다. 생물학에서 생명의 정의(위키피디아 참조)는 “물질과 에너지 대사가 안정적이고 자극에 반응하며 자기 복제가 가능한 반(半)개방적인 물질 시스템이다.” 이 정의에서 사실 그것의 연구 대상이 생명의 물질적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현대 생물학은 생명의 구조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 조직을 해부하거나 냉동 절편 등의 방식을 통해 연구하는데 종종 ‘닭을 죽이고 알을 얻는 식’으로 일부 지식을 얻는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그 비생명(非生命)의 물질적 징후를 인식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생명, 특히 사람의 핵심 특징과 의식 영역 내부에 대해 그것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수한 물질화(物質化)의 각도에서 생명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완전히 수학에 기반을 둔 현대 과학은 본질적으로 생명과 정신 현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법칙이 되었다. 앞 장에서 우리가 열거했던 많은 사례들은 정신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심지어 물질을 직접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물질과 정신은 마땅히 통일적이고 일성(一性)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 주류 과학은 오히려 기점에서부터 정신의 측면을 거의 완전히 무시했다.

2. 도덕성 : ‘선’과 ‘악’에는 객관적인 가늠표준이 있다

현대 자연과학은 마치 도덕(道德)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은 ‘도덕’의 객관적인 본질과 역할에 대해 진정으로 연구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기초에서부터 말하자면 당신이 선념(善念)을 내면, 1+1=2가 되고, 영하가 되면 물이 얼고, 당신의 골수는 시간당 5억 개의 백혈구를 만들어 면역계에 공급한다. 또 당신이 악념(惡念)을 내더라도 마찬가지로 1+1=2가 되고 영하가 되면 물이 얼고 골수에서는 시간당 5억 개의 백혈구를 만들어 면역계에 공급한다.

그러나 당신이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대자연에 무슨 필연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당신이 생활 속에서 여전히 복을 누려야 하면 복을 누리고 병에 걸려야 하면 병에 걸린다. 반대로 당신이 나쁜 일을 해도 대자연은 여전히 평소와 같아서 당신은 여전히 복을 누려야 하면 복을 누리고 병에 걸려야 하면 병에 걸린다. 아울러 선과 악은 과학이 그려내는 세계 속에서는 제대로 묘사되거나 정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영향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정말 선과 악은 평등하고 대칭적인 것일까?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을 비웃곤 한다.

한 천주교 신자가 신부에게 물었다.

“제가 기도하면서 담배를 피워도 될까요?”

그의 이 요청은 신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또 다른 신자가 신부에게 물었다.

“제가 담배를 피우면서 기도해도 될까요?”

이 요청은 허락을 받았고 그는 아주 느긋하게 담배를 피웠다.

이런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근거로 삼아 사람 내면의 신앙이 경건한지 아닌지, 선악과 도덕, 진실과 거짓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외부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을 찾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기도할 때 담배를 피우는 것과 담배를 피우면서 기도하는 것은 완전히 같은 두 가지 일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이 반드시 이런 것은 아니다. 표면적인 상태는 비슷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의 태도와 흐름은 정반대일 때가 많고 또한 이것 역시 ‘객관적’인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울 때 하는 기도는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울 때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려 기도로 마음을 씻기 시작한 것으로 이를 통해 악습에서 벗어나는 시초일 수 있다. 반대로 기도할 때 지루하고 집중력이 부족해서 멋대로 담배를 피우는 것은 타락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마치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되는 두 가지 과정과 마찬가지로 영점에서는 얼음과 물이 공존하는 짧은 상태가 있다. 겉으로 보면 이 두 과정에는 모두 이 단계가 있고 또 두 단계의 상태도 같아 보이지만 실제 추세는 정반대다. 이 짧은 과도기를 지나고 나면 한쪽은 완전히 물만 남고 다른 쪽은 완전히 얼음만 남는다.

방금 우리는 도덕과 사람의 염두로부터 물과 얼음의 예를 제시했다. 아래에서는 말이 나온 김에 앞서 언급했던 물 결정화 실험과 쌀 실험의 영감으로 돌아가 보자. 사실 염력(念力)에 관한 이런 실험은 정신이 물질에 직접 작용할 수 있다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정신세계 속에 도덕선악의 객관적인 확정에 관한 중대한 문제를 보여준다. 즉, 물질은 사실 직접적으로 사람의 선(善)과 악(惡)의 염두를 ‘감지(感知)’할 수 있으며 선과 악은 ‘객관적’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사람의 도덕과 심태는 직접 주변 사물에 영향을 끼치는데 마르크스주의 정치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간접’적이고 ‘측면’적인 반작용이 아니다. 아울러 악념(惡念)은 선념(善念)과 달리 물 분자가 규칙적인 육각형 결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선과 악은 완전히 대등한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객관세계에서 선악(善惡)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양자를 구별할 수 있는 아주 실재(實在)적인 표준을 찾아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왜냐하면 물 결정의 규칙성과 대칭성에서 보자면 선과 악 양자는 객관세계에서 영원히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중의(中醫)를 예로 들어 도덕의 중대한 의미를 살펴보자면, 고금을 막론하고 대의학자들은 역대로 의사의 의술(醫術)은 사실 도덕 수준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한되며 사람의 신체건강 역시 도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해 왔다. 고대 중의는 인간의 도덕이 패괴(敗壞)한 것을 사람이 병을 얻는 근본 원인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유명한 중의학 경전 《황제내경》에서는 “안에 정기가 존재하면 사기가 침입할 수 없다.[正氣存內,邪不可幹”]”고 지적했다.

당대(唐代)의 대의학자 손사막(孫思邈)이 저술한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대의습업(大醫習業)〉과 〈대의정성(大醫精誠)〉 두 편은 의덕(醫德) 규범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술했다. 즉, 도덕이 고상한 사람만이 자신의 본성과 신체를 잘 기를 수 있고 더 나아가 뛰어난 의술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도덕을 버리고 맹목적으로 기술만 발전시켜서는 중의의 정수가 실전(失傳)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단지 가장 표면적이고 가장 물질적인 것에서 착안해 발전한 서양 의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매 한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그(그녀)는 물질과 정신 이 두 방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덕은 객관적인 존재이자 사실 사람의 정신세계에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어쩌면 비범한 내원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막 나쁜 짓을 했을 때 종종 양심을 어길 때의 죄책감을 느끼거나 또는 덧없는 세월의 공허함을 느낀다. 비록 이것(느낌)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것이 나타날 때면 오히려 이런 회한이나 자책은 아주 진실하고 또한 내심 깊은 곳에서 내원한 것으로 본능적이며 ‘진정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타고난 양심과 진정하고 절실한 느낌이 꼭 ‘시각’이나 ‘촉각’이란 이런 감각보다 진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이것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당연히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도덕을 낳은 요소를 중시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만이 ‘진정한 자기’와 직접 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신성과 도덕성 두 가지 측면을 종합해서 현대 과학,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지도하에 있는 중국 현대과학에서 널리 전해진 아주 유명한 신조를 한번 살펴보자. 그것은 바로 물질이 의식을 결정하고 경제적인 기초(토대)가 상부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논술과 예증을 통해 보자면 수학을 기초로 한 현대과학은 이미 만사만물(萬事萬物)의 정신적인 측면을 여과했기 때문에, 즉 현대과학 자체가 정신 영역을 인식하는데 선천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초로 한 모든 연구에서 물질이 정신을 결정하고 물질이 제1성이며 정신은 제2성이라고 발견한 것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하다. 이것은 이미 완전히 자신을 우물 안에 밧줄로 묶어 국한시키고 우물을 통해 볼 수 있는 협애한 하늘만을 몇 만 번이고 반복해서 관찰함으로써 최후에 “하늘은 확실히 우물 입구만큼 크다!”라고 소위 과학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과 차이가 없다. 사실 1장에서 분석한 진화론과 같은 극단적인 학설이 등장한 것 자체가 자연과학에서 정신적인 측면을 걸러낸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알고 나면 우리는 “인민의 도덕과 자질을 향상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경제발전을 해야 한다”는 이런 유물론적인 주장은 사실 모두 명확한 근거가 없고 아주 황당한 것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의 탐욕심을 만족시키고 팽창시킬 수는 있지만 오히려 사람의 양심과 천성(天性), 생명의 본성 및 인간세상의 천리(天理)에 위배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장의 첫머리에 열거한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인심이 냉담해지며, 사람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인류가 스스로를 훼멸하는 현상이 범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잘못된 관점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유물론과 실증적이지만 불완전한 과학에도 미룰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도덕은 정신적인 것으로 정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실증과학은 도덕의 실질과 진실한 근원에 대해 더욱 인식할 수 없다.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이런 인과관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욱이 발언권이 더욱 없고, 또한 우리 인류생활과 우주의 존재 및 끊임없이 운행하는 거대한 내재적인 작용을 인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완전한 유물론과 실증과학의 지도하에 기고만장해진 맹목적인 자연 개조란 ‘과학’이란 몽둥이로 인류세계에서 인류의 생존을 유지하는 ‘도덕’을 무자비하게 타격한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늘과 사람이 합일하는지 어떻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거대한 재난과 대가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도덕 법칙을 인식하고 설명할 수 없는 과학은 진정한 과학이 아니며 오히려 명실상부 사이비 과학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2/7/4/2596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