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3. 정체성(整體性)—“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안 돼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는 거의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이때부터 서양과학은 마치 분석과 환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 같다.
이 길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위 분석이란 실제 세계를 무한히 많은,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서로 내적 연계가 부족한 기본 입자로 쪼개는 것이고, 환원이란 만사만물(萬事萬物 사람도 포함)을 움직이는 한 더미 원자들의 단순한 중첩으로 간주하고 일단 한 원자의 구조와 활동 법칙을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3의 물결》의 저자인 앨빈 토플러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책의 서문에서 “현대 서양 문명에서 가장 발달한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쪼개기로, 우리는 이 기술이 너무 뛰어나 흔히 이런 작은 부분들을 다시 조립하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라고 말했다.
현대의 핵물리학자 젠커밍은 이런 연구 방법에 대해 일찍이 예리하게 논술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론은 더욱 어려워지고 학문은 더 고도로 세분화되며 사람의 전문 지식은 범위가 더욱 좁아진다. 만약 당신이 어떤 과학자에게 연구 분야를 물어본다면 그는 아마 화학연구소 물리화학부 이론화학연구소 양자화학연구실 순이론방법 연구팀, 다원자 분자 과제에서 포텐셜 에너지 곡면 계산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순이론방법’ 방면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와 토론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범위를 벗어난다면 쌍방이 모두 난처해질 것이다. 한번 물어보고 침묵하고, 또 물어보면 얼굴이 굳어지며 세 번 물으면 정색하고, 다시 물으면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릴 것이다.
이는 마치 궁궐 어선(御膳)방의 요리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나중에 어떤 대갓집에 고용되었다. 주인이 그의 경력을 자랑하고 싶어 손님들에게 궁중 연회 음식을 준비하고 명령했지만, 자신은 간식 전문이라서 연찬은 준비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주인이 그럼 궁중 간식이라도 만들어 손님에게 접대하라고 하자 그는 간식 중에서도 특정한 간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파만 전문적으로 썰었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아마 요즘 다양한 전문직 종사자들 중에도 이렇게 ‘파 썰기’만 전문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바로 이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나마 코끼리 자체를 연구했다면 근대 과학자들은 코끼리 다리, 코끼리 귀, 코끼리 꼬리, 코끼리 상아 등 지엽적인 것에 몰두한 지 오래 되었다. 현대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들은 이미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코끼리 다리 중에서도 코끼리 발목, 코끼리 발가락, 코끼리 다리 역학 등 더욱 세분화된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이 세계 정체(整體)에 대한 인식, 즉 우리 전반 ‘과학’은 이미 수많은 극히 작은 학문 범주로 분해되어 현재로선 이미 세계 전체에 대한 인식을 얻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소위 전문가란 단지 아주 작은 범위에서 다른 사람보다 깊이 파고들 뿐, 여러 분야에서 진정한 인재를 양성하기란 어렵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다학제 과학[邊緣科學]이 등장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소위 다학제 학문이란 둘 이상의 학문을 연구하는 교차 영역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기존 지식을 통합하는 것은 ‘다진 파’와 ‘반죽’을 통합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진정한 궁중 연회를 만드는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모른다.
이렇게 세분화시키는 방법에서 ‘기본 입자’를 하나씩 연구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설사 모든 종류의 ‘기본 입자’ 법칙을 안다고 해도 이렇게 무한히 많고 무한히 작은 ‘기본 입자’들을 ‘중첩’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대형 컴퓨터들이 필요하겠는가?
또한 시야가 너무 작으면 또한 사로(思路)의 폭이 좁아져서 사물의 인과관계를 투철하게 정리할 수 없다. 때문에 잎 하나만 눈을 가려도 태산이 보이지 않는다. 현대 서양의학에서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치료하고 발이 아프면 발을 치료하는” 것 역시 인체에 대한 정체적인 인식이 부족한 직접적 결과이다.
사실, 일률적으로 세분화하는 방법으로 한 사물이나 전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사람들은 시각(視覺)으로 숲을 인식한다. 우리는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씩 자신의 사유에 넣고 나중에 이 나무들의 수량이 어느 정도 된 것을 귀납해서 숲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한눈에 정체적인 이미지를 보고 이것이 곧 숲임을 안다.
사진을 볼 때도, 우리는 컴퓨터처럼 픽셀 하나씩 뇌로 전송할 필요가 없다. 대신 전체적으로 아주 흐릿한 감각만으로도 사진 속에 어떤 사물과 광경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을 인식하는 것도 눈썹, 눈, 코, 입, 손과 발을 하나씩 따로 구별해 식별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전체적인 윤곽이나 추상적인 뒷모습 및 몸짓만 봐도 자신이 아는 누구라고 단정할 수 있다.
……
우리가 구체적인 사물이나 전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일률적으로 쪼갠 후 다시 재조합하는 것은 특히 종종 잊어버리거나 결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절대 유일하거나 그렇다고 효율적인 방법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분명 “일률적인 분해” 이외의 방법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류의 인지 본능에는 이방금 언급한 ‘정체(整體)’적이고 ‘모호하고’, ‘두루뭉실하며’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등의 방면에서 사물을 감지하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으로 문제를 보는 방식 자체는 그래도 꽤 일리가 있지만 일단 극단적으로 가면 좋지 않다. 사실 중국의 전통 사상에 서로 대응할 수 있는 좋은 사유방식이 있는데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 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상생’과 ‘상극’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주류 과학의 변증법이든 ‘분석’하는 연구 방법이든 심지어 사상영역에서 개인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률적으로 분해만 하고 조합은 망각하며 오직 ‘상극’만 있을 뿐 ‘상생’이 없다.
이러한 현상을 더 확대해서 보면 현재 우리가 대자연을 연구하면서 아주 작은 피상적인 법칙만을 막 수박겉핥기로 이해했음에도 조급하게 이익을 얻고 싶어 한다. 외부 세계가 모두 자신을 위해 봉사하게 만들고 맹목적으로 자연을 개조하려 하는데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상생’을 망각했다. 그러니 어찌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말할 수 있겠는가?
4. 개방성– ‘6치’ 이하 물고기와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에는 단지 하나의 공간, 하나의 층면(層面)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직접 접촉하는 세계에는 아마 보다 높은 차원 시공(時空)의 한 투영(投影)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단지 가장 표면적인 공간에서 시작해 눈으로 보는 것만 진실이라 여기는 선입견을 지닌 채 올바른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개방성(開放性)을 사용해 과학은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일반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공 체계 내에 서지 말고 마땅히 다양한 시공체계를 돌파해야 한다는 것을 개괄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어떤 해양생물학자가 6치 그물을 이용해 해양생물을 연구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을 연구해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은 후 마침내 한 가지 ‘과학’ 법칙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물고기는 ‘6치’보다 길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안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가시광선은 전체 전자기파 스펙트럼에서 단지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할 뿐이다. 또 기기의 탐지 능력 역시 한계가 있는데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이미 우리 인류의 현재 모든 탐지 방법으로는 미시적인 한 입자의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위치’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일깨워준다. 이는 기기와 우리 관측 방법의 한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특이공능자의 초상적인 감지(感知) 능력은 우리에게 우리 이 물질세계 외에 또 우리의 육안이나 기기로 볼 수 없는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많은 학문들이 전에 걸어온 발전 과정도 우리에게 개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수학에서 우리 일반인의 학습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수(數)에 대한 인식은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자연수에서 시작해 소수, 음수, 무리수, 심지어 허수에 이르기까지 매번 수에 대한 인식은 이전의 우리 관념을 타파한 것이다. 수학의 발전 역사에서 유명한 세 차례의 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이전까지 수학 이론의 근간을 크게 뒤흔들었지만 위기 후 오히려 복음을 가져다주었다.
첫번째 수학의 위기로 제출된 무리수(無理數)는 피타고라스를 놀라게 했는데 전설에 따르면 무리수를 제안한 히파소스가 심지어 바다에 던져져 익사했다고 한다. 두번째 수학의 위기는 미적분의 기초를 거의 뒤흔들었고, 세번째 위기는 집합론 전체를 뒤흔들어(집합론은 현대 수학과 논리학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논리학과 수학의 유효성과 엄밀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위기 이후 수학의 발전은 또 새로운 천지를 개척했다. 우선 제1차 위기 이후 수에 관한 정의가 완벽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이 순전히 ‘계산’을 위해 사용되던 예전 한계를 뛰어넘었다. 제2차 수학의 위기는 실수이론을 수립했고 이를 기초로 극한이론의 기본 정리를 확립함으로써 미적분과 수리분석이 실수이론을 기초로 엄밀히 확립되었다. 3차 위기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논리학의 기초 분야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역설적인 난제(難題)는 종종 이전의 정의 또는 정리와 양립할 수 없으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사고가 필요한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면 흔히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생물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생물이 견딜 수 있는 고온 한계를 자신있게 단언한 후인 2011년 4월 영국 사우샘프턴 국립해양학센터의 해양 화학자 코넬리 등이 이끄는 과학 연구팀이 카리브 해 카이만 해구 지역에서 해수면에서 5km 떨어진 해상의 ‘검은 굴뚝'(해저에 황화물이 풍부한 고온 열수 활동 구역을 말하며 뜨거운 액체가 분출되는 모습이 ‘검은 연기’와 닮아서 이렇게 부른다)에서 섭씨 450도까지 견딜 수 있는 새로운 품종의 ‘내열’ 새우를 발견했다.
또 교과서에는 미생물에서 식물, 동물에 이르기까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황과 인 등 6가지 주요 화학 원소가 필수 생명 원소라고 한다. 하지만 2010년 12월 2일 미국 NASA 과학자들은 고농도의 비소(비소화물)에서 생존 가능한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이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인을 비소로 대체해서 인은 더 이상 필수 요소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외계 생물의 존재를 탐구할 때 흔히 지구 생물, 심지어 사람 생존에 필수 조건을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간주하곤 하는데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인류의 체력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공기에 대한 인체 저항과 지면에 미치는 체중의 반작용 등의 요인에 따라 근육이 끊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의 100m 달리기 속도 한계를 9초 64라 보았다. 1970년대 미국의 생물역학 박사 기디언 아리엘은 100m를 9초 60보다 짧은 속도로 달리며 뼈가 부러지고 관절 연부조직이 분리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2009년 8월 17일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9초58로 우승하면서 이들 전문가의 단언을 깨뜨려버렸다.
1900년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켈빈은 20세기 물리학을 전망하는 글에서 “물리학이란 빌딩은 이미 거의 다 지어졌고 후배 물리학자는 자질구레한 보수만 하면 된다. 하지만 물리학이란 맑은 하늘 저 멀리 작지만 불안한 먹구름이 두 개 더 있다.”고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두 개의 ‘작은’ 먹구름은 마이클슨-몰리의 실험과 흑체(黑體) 복사에 관한 연구에서 부딪친 곤경을 말한다.
나중에 이 두 개의 작은 먹구름은 각각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변했고, 이것들이 가져온 태풍은 고전 물리학이란 빌딩을 뒤흔들었다. 아울러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새롭고 기초가 더 튼튼한 물리학 빌딩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다주었다.
상대성이론을 제안한 아인슈타인에게 아들인 에드워드가 일찍이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아빠는 왜 이렇게 유명해요?”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대답했다.
“이 큰 고무공 위에 눈이 먼 큰 딱정벌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니? 그것은 기어가는 경로가 구부러진 줄 몰랐지만 아인슈타인은 알았단다.”
이 말은 정말로 의미심장하다. 중국인들은 “여산의 진면모를 모르는 이유는 오직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데, 한 체계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그 체계 밖으로 뛰쳐나와 관찰해야만 하며, 자신에게 인위적으로 사유의 틀을 설정해선 안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 과정을 나열했다. 여기에 이르러 아주 널리 퍼진 한 가지 견해를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고대 중국에는 과학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 고대에 서양 실증 과학과 같은 ‘과학’ 체계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중국 고대에는 단지 일부 산만하고 비체계적인 과학 지식만 있었을 뿐인데 이는 ‘과학’이 아닌 ‘기술’로 간주될 뿐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에 강조하고 싶은 것인데 과학의 길은 단지 한 갈래만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과학이란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이용해 세계 개조를 지도할 수 있는 길을 말한다. 본장 앞부분의 3개 소절과 이 소절의 첫머리에 했던 논의를 통해 현재 서방 실증과학의 거대한 한계와 결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의 과학의 정의에 포함된 모든 길과 방법을 대표할 수 없다.
사실 중국 고대 과학이 걸어간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다른 길로서, 아울러 더욱 완벽한 기점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199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윌리엄 대니얼 필립스 교수도 2010년 북경 대학에서 열린 “신앙과 철학, 과학”이라는 국제회의에서 강연하면서 “과학은 세계를 탐색하는 유일한 창문이 결코 아닙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정한 대과학자들은 종종 “Think outside the box”(사유의 틀에서 벗어나 생각하라)를 주창한다. 과학 연구자에 대해 말하자면 이전 사람들의 과학 연구에서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발견이나 정의, 법칙, 정리보다는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을 포함한 그들의 연구 방법과 지도사상이다. 인위적인 틀로 자신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낡은 이론은 결국 후인들에게 추월당하거나 돌파하거나 승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옛것을 고수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과학 정신과 지도 사상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개방성을 유지하고 과학적 탐구 정신을 견지하는 것만이 정확한 길이다.
불교에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이라 우긴다[執指爲月]’는 성어가 있다. 즉 손가락으로 달의 위치를 가리킬 수는 있지만, 손가락 자체가 달은 아니며 달을 볼 때 꼭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손가락만 바라보면 달은 보지 못한다. 이는 마치 진주를 담은 상자만 사고 진주를 버리는 것과 같다. 만약 세계의 신비를 달로 비유하자면 앞사람의 결론과 법칙은 필수가 아닌 손가락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여러 방면의 사실들은 이미 우리에게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안목이 너무 짧아서 눈에 보이는 것만 실제라고 인정해서는 안 되며 진정하게 과학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머리가 필요하고 ‘영성(靈性)’을 장려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현대 서양 과학을 전체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우리 사고를 개방해야 하는가?
첫째, 현대 서양 과학은 종종 재현성과 실증성을 중시하는데, 이것은 사실 사람을 몹시 제한하는 병목이다. 객관 세계에는 실증할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확실히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느 시각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데 이 생각은 아마 평생 단 한 번만 떠오른 생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생각은 더 이상 재현될 수 없기에 현대 실증 과학으로는 그것을 실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직접 감지한 사물이나 정신세계의 사물은 그 자체로는 아주 정확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기력하고 실증 과학이 스스로 설정한 틀 안에서는 이런 것들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정신과 도덕 분야의 일부 법칙은 모두 현대 실증 과학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일부 다른 시공(時空)의 사물과 일부 소위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실증 과학은 더욱 발언권이 없다. 그렇다면 과학이 이런 것들을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 불완전한 과학 도구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아주 실재적인 것들을 무시하거나 비판한다면 이는 매우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다른 한편, 과학이 기초로 삼는 다양한 공리(公理) 역시 과학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물론 공리의 정확성이 확보된 후 과학적이고 엄밀한 논리적 추론은 흔히 문제가 없지만 공리 자체가 제안하는 것은 보통 감각(感覺)이나 직각(直覺 보는 즉시 느끼거나 깨달은 것)에 기초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역시 상대적이며 실증할 수 없는 것으로 과학표준으로 판단해도 ‘엄밀’하지 않다. 일단 공리가 깨지면, 공리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정리와 원리의 신뢰성도 깨진다. 사실, 공리에 어긋난다는 이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기하학을 예로 들면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가 깨져도 여전히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존재하는데 이 역시 과학이다. 다만 그것이 더욱 광범위해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밖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실증성, 재현성 및 실증과학의 기초인 각종 공리는 모두 실증과학의 적용 범위가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실증과학이 효과가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있지만, 우리가 마주한 사물이 이 범위를 넘어설 때 현재로서는 전혀 실증할 수 없을 때라면, 우리는 또한 진정 객관적으로 보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로 열린 마음을 유지하고 ‘과학’ 정신으로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것이 실증할 수 없고 재현할 수 없거나 또는 우리 현재 공리를 위배한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일격에 타도하진 말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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