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5. 오류를 바로잡고 세계를 정확히 인식하자
그렇다면 마땅히 진정한 정신성, 도덕성, 정체성(整體性)과 개방성은 어떻게 해낼 수 있는가?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 정도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우리는 중국 역사와 현재의 과학기술 발전의 번영과 쇠퇴를 전형적인 예로 삼아 몇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현재 공산체제하의 중국인들은 십수 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60년이 넘도록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인들은 원래 창의력이 부족하고 여기고 또 어떤 이는 열등감으로 중국인들은 본래 그다지 총명하지 않고 지능도 낮다고 여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뼛속까지 소위 ‘열등감’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역주: 이 글은 원래 2012년 작성된 문장으로 당시까지 중국 대륙 출신의 과학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해외에서 교육을 받은 노벨상 수상자는 포함하지 않는다. 2015년 전통의학을 연구하는 중의사(中醫師) 투유유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사실 역사는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중화문명(中華文明)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하나이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통일적이고 연속적인 문명이다. 중화민족은 일찍이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천문, 역법, 수학, 기계, 예의(禮義), 철학 등 서양보다 수백 년, 심지어 천 년 이상 앞선 수많은 성과들이 있었다.
1975년 상해 인민출판사에서 발간한 《자연과학연표(自然科學大事年表)》 통계에 따르면 16세기 이전에 전 세계적으로 270가지 중요한 과학 발견 중 중국이 136개를 차지한다. 또 독일의 베르너 슈타인이 펴낸 《인류문명편년기사(人類文明編年紀事)》(과학 및 기술 분책, 1981년 판)에 따르면 16세기까지 전 세계에서 발견된 주요 과학 발견은 모두 152건인데 이중 유독 두 나라 가장 많다. 바로 고대 그리스가 54건이고 중국이 24건이다. 이 통계들이 비록 어느 정도 편향이 있고 꼭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6세기 이전의 자연과학에서 중국은 확실히 세계 선두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86년 로버트 템플은 조셉 니담의 《중국과학기술사》 자료를 토대로 《중국: 발견과 발명의 나라》라는 책에서 중국의 100가지 세계 최초를 소개했다. 이 책은 미국도서관협회상, 뉴욕과학원상 등 5가지 상을 수상했다. 유네스코 기관지 《더 유네스코 쿠리어(The UNESCO Courier)》는 1988년 이 책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중국의 과학천재》를 발표해 전 세계에 추천한 뒤 43개 언어로 번역했다.
템플은 《서양이 중국에 진 빚》에서 “역사상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비밀 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는 바로 중국 문명과 서구 문명이 결합된 산물이며, 현대 세계의 발명과 발견은 대부분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17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온 이래 중국인들은 서양의 기술에 놀라 자신의 성취를 망각해버렸다.”라고 썼다.
이어서 중국 고대 과학 기술의 몇 가지 구체적인 사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 천문학: 태양풍과 태양흑점의 관측은 각각 다른 문명보다 1400년과 2000년 앞섰고, 관측에 의한 지도제작은 1300년, 메르카토르 투영법은 600년 앞섰다. 고대 중국은 또 세계 최초로 신성(新星) 및 초신성을 관측했을 뿐 아니라 관측 기록이 아주 완벽하면서도 상세하다. 세계 최초의 음양합력(陰陽合曆)은 적어도 상대(商代) 이전부터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태양, 지구, 달의 운행주기를 조화시켜 음력과 양력의 장점을 종합하고 단점을 조화시킨 역법이다.
[주의: 현대에는 흔히 ‘음력’이라 부르지만 본질적으로 말하면 음양합력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법은 순양력이다. 우리가 음력이라고 말하는 역법은 엄밀히 말하자면 양력과 음력이 결합된 음양력이다.]
◎ 엔지니어링: 독특한 누차(樓車 일종의 파종기계), 풍차 및 가슴 형 말띠는 모두 1800~2000년 앞섰다. 증기기관의 핵심 기술은 1,200년, 지멘스 식 제강법은 1,300년 앞섰으며, 아치형 돌다리는 500년, 구동 체인은 800년, 주철 제강 및 수력을 이용한 송풍기는 모두 1900년을 앞섰다.
◎ 수학: 중국 남송의 수학자 진구소(秦九韶)는 1247년 고차방정식 해법을 발견했는데 이는 영국의 호너(1819)를 500년 이상 앞선 것이고, 조충지(祖沖之)는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7자리까지 정확하게 계산했는데 이는 외국보다 1천여 년 앞선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 정리는 기원전 11세기 상대(商代)의 상고(商高)가 발견했는데 이는 서양 최초 발견자인 피타고라스보다 500년을 앞섰으며 위(魏)나라의 수학자 유휘(劉徽)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원주율을 구했으며, 그가 저술한 《해도산경(海島算經)》은 피타고라스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세계보다 천여 년 앞선 네 번의 중차(重差 역주: 일종의 삼각측량법) 측정술로 발전시켰다.
◎문자: 문자는 인류 문명의 상징으로 다양한 민족의 사유방식과 발전 수준을 대표한다. 한자(漢字)가 다른 문자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기호성과 전식성(全息性)으로 매 글자마다 모두 풍부한 정보량을 담고 있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의 일종으로 간결하면서도 함의가 깊으며 음(音 발음), 형(形 형태), 의(義 뜻)가 일체가 되어 영어나 불어 등을 훨씬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표음문자는 단지 소리만 대표할 뿐 실질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 한자교육진흥협회 사무국장 히데카와 히로유키는 어머니가 수유 중인 아기를 가르칠 때 만약 독음(讀音)만 가르치면 아기가 곧바로 기억하기 어렵지만 한자를 보여주면서 독음을 가르치면 아기가 금방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아기와 한자 사이에 마치 선천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1982년 5월, 심리학자 채들린 박사가 《네이처》에 발표한 글이 세계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영국, 미국, 프랑스, 서독, 일본 등 5개국 어린이의 IQ를 조사한 결과 구미 4개국 어린이의 IQ는 평균 100인 반면 일본 아동의 평균 IQ는 111이었는데 원인은 일본 어린이들이 한자를 배웠기 때문임을 발견했다. 한자 흥국론(興國論)의 원조인 동경 교육위원회 연구원 이시이 이사오(石井勳) 교수는 《유아지능 개발법》이란 책에서 여러 차례 반복 테스트 결과 일본 어린이들도 어려서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구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평균 지능이 100이었다. 하지만 한자를 배우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만약 5세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에 1년을 배우면 110이 되고, 4세부터 2년간 배우면 120, 3세부터 3년간 배우면 125~130이 되었다. 그래서 한 프랑스 교사는 프랑스 아이들에게 중국어와 한자를 가르치는데 목적은 일종의 언어 도구에 숙달하려는 게 아니라 지능을 개발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했다.
호주의 노수현(盧遂現) 박사는 또 “중국어 문법이 수학 문법에 가장 부합합니다. 수학은 단지 10개의 숫자만 가지고 있어 모든 수치를 표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유연한 조합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부호의 순서를 변경할 수 있으며, 세 번째는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성격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중국어와 한자는 바로 이 세 가지에 의존해 단지 7000자 정도의 글자만으로도 현대 사회의 모든 측면을 처리할 수 있으며 이점이 중국 어린이들의 수학 지능이 높은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라고 했다. 한자는 또한 사람의 연상(聯想) 능력을 가장 증진시키는 문자다. 이상의 여러 가지 측면을 종합해보면 한자는 인류 문명의 큰 보물이자 기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의료: 중의(中醫)의 기원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현대 서양의 실증과학 틀에 갇힌 서양 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발전 경로를 밟았다. 중의의 많은 신기한 현상들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는데, 앞장에서 언급했다시피 적어도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경락학설(經絡學說)은 지금까지 과학기술계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그 객관성과 정확성을 검증해 왔지만 여전히 다 파악하지 못했고 고인(古人)이 어떻게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중의학의 신비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반복하지 않겠다.
◎ 제조: 1976년 하남성 안양(安陽)시에서 발굴된 ‘부호(婦好)’묘(기원전 13세기 매장)의 칠기는 세계 최초의 플라스틱으로 3200년 앞선 것이다. 또 예주(醴酒 제사에 사용하는 술)는 상조(商朝)부터 지금까지 세계 최초의 좁쌀주이고, 이외에도 정교한 발명품으로는 외발자전거, 사람을 싣고 나는 연, 주마등, 활, 주판, 회음벽(回音壁 역주: 소리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보내는 환형의 벽), 동 거울, 말등자, 도자기, 비단, 성냥, 브랜디, 기계시계. 조판인쇄. 지폐. 장명등(長明燈)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묘하고 시대를 앞선 물리학 원리를 담은 기계 및 건축 분야가 있는데 노반(魯班), 이춘(李春), 유호(喻皓) 등이 수많은 정교한 발명을 했다.
또 조충지는 자동 수송기와 천리선을 만들었다.
무당산 천주봉(天柱峰) 정상에 있는 자금성(紫禁城)은 높이가 몇 장이고 둘레는 3리에 달하지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주 많다. 가령 벽을 쌓은 돌은 무게가 500킬로그램 이상이며, 공사는 매우 크고 험난하며, 콘크리트나 철근에 의지하지 않고, 돌과 돌을 매우 견고하게 연결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이 무거운 돌을 천 길이나 되는 저 위험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것들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또 옛날 사람들은 주물의 열팽창 계수를 고려해 놀라운 용접 기술로 주물의 흔적 없이 사방이 촘촘하게 만들어 전각 밖에서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불어도 안에서는 등불하나 흔들리지 않게 했으니 이는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구리와 금으로 만든 대전(大殿)이 수백 년간 천둥과 번개로 단련된 놀라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피뢰침을 설치한 후 의외로 번개 피해를 당했다. 이것 역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소주(蘇州) 호구(虎丘)의 사탑(斜塔 기울어진 탑)은 피사의 사탑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사탑이지만 고대인들이 현대식 내진기술을 사용하여 천 년 동안 지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항산의 현공사(懸空寺)는 “세 개의 말꼬리가 공중에 매달려” 기초도 없이 흔들리는 나무 기둥 몇 개만으로 천 년 동안 절벽에 매달려 여러 차례 지진을 겪었음에도 쓰러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건축 역사상 큰 기적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물론 또 예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온 4대 발명 및 이와 관련된 자기학, 무기(武器) 등의 분야에서 중국은 현저하고 탁월한 성취가 있었다. 이런 것들 현대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지금 우리가 찾아낸 고대 중국의 발명은 단지 역사상 휘황했던 성취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선진(先秦) 문명은 진대(秦代) 대화재로 문화가 크게 단절되었고 한조(漢朝)에서는 참위(讖緯)학이 흥성했는데 위서(緯書)에 자연과학에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통치자들이 전제(專制)를 강화하기 위해 위진(魏晉) 이후 금지되고 불태워졌다. 때문에 진한(秦漢) 및 이전의 수많은 과학 기술 발명들이 실전되었다.
아래에서는 그중 한 가지만 예로 들어 증거로 삼고자 한다.
1994년 3월 1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2호 용갱(俑坑) 발굴이 시작되었다. 2호 용갱에서 발견된 청동검은 길이가 86cm이고 몸통에 8개의 능면(棱面 모서리 면)이 있다. 고고학자들이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하여 측정한 결과 이 8개의 능면은 오차가 머리카락 한 올보다 작으며 이미 출토된 19개의 청동 검도 이와 같은 것을 발견했다. 이 청동검은 내부 조직이 조밀하고 검신(劍身)이 밝고 매끄러우며 무늬도 섬세해서 교차되지 않았고 황토 아래에서 2000년 이상 잠들어 있었음에도 출토 당시 여전히 새것처럼 빛나고 날카로웠다.
과학자들의 검사 결과 검 표면에 10마이크로미터 두께의 크롬 화합물 한 층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점은 크롬은 부식에 아주 강한 희귀 금속으로 지구 암석 중 크롬 함량이 매우 낮아서 추출하기가 몹시 어렵다. 또한 크롬은 녹는점이 1907°C로 고온에서 녹는 금속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크롬염 산화 처리 방법이 현대에 나타난 선진 기술로 독일은 1937년, 미국은 1950년에 발명 특허가 출원된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1호 갱 첫 번째 구멍을 청소할 때 고고학자들은 청동 검이 150kg에 달하는 토용(土俑)에 의해 휘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그 각도가 45도를 넘었다. 사람들이 토용을 옮긴 후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는데 폭이 좁고 얇은 청동 검이 단번에 튕겨져 평평해졌고 원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현대 야금학자들이 꿈꾸던 ‘형상 기억 합금’이 2000여 년 전 고대 무덤에 등장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런 기술을 자동차에 적용한다면 충돌로 차체에 변형이 생겼을 때 가열하거나 약간의 역학적 처리만으로도 바로 모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역대 조대의 국력(國力)은 비록 어느 정도 기복은 있었지만 대부분 국제적인 지위가 아주 높았고 중국의 고문화(古文化) 역시 전 세계적으로 찬양 받았고 중국인 특유의 총명함은 사실 세계적으로 공인 받은 것이다. 특히 외국 과학 연구 기관 중에서 화인(華人)은 그래도 매우 인기가 있다. 게다가, 많은 화인들이 외국에 나가자마자 상을 받는데 이것이 문제를 설명해주지 않는가가? 고인은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했다.
즉 중국인들이 선천적으로 부족하고 ‘열등감’이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고난 자질과 지능이 좋고 일찍이 휘황찬란한 문명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자세히 추적해보자. 중국 고인(古人)과 현대 중국대륙 사람들 사이에는 대체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사실 매우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중국 고인들은 ‘도(道)’를 매우 중시했다. 자고로 중국인들은 성현(聖賢)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믿었는데 즉 사람이 천지와 융합해 서로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도(天道)는 변하지 않고 순환이 규칙적이며, 땅은 천시를 따라 사계절이 분명하니, 사람은 천지를 존중하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천시(天時)・지리(地理)・인화(人和)’다. 중국인의 개념에서 천문, 지리, 역법(曆法), 의학, 문학에서 사회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은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이런 이념이 관통되지 않는 곳이 없다. ‘도(道)’에서 확장되어 중국 고인(古人)은 다차원 공간의 그런 무형(無形)의 사물을 중시했고,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신운(神韻) 등을 중시했다. 가령 ‘경락’, ‘기혈(氣血 또는 炁血)’, ‘신(神)’, ‘魂’, ‘음양이기(陰陽二氣)’ 등의 개념은 고대 문화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삼황(三皇)의 한 분인 복희씨(伏羲氏)는 “위로 하늘을 관찰하고 아래로 땅을 본받아” 팔괘를 만들었는데 그 목적은 “신명의 덕과 통해 만물의 실정을 분류하기[以通神明之德,以類萬物之情]” 위한 것이다(당나라의 유명한 역사가 사마정의 《보사기(補史記)•삼황본기(三皇本紀)》 참조).
사마천이 《사기·오제본기》에서 꼽은 헌원황제(軒轅黃帝)의 가장 큰 공적은 “하늘의 법칙에 순응해 음양의 변화를 추측하고 생과 사의 이치를 설명하고 생존과 멸망의 원인을 논술했다.[順天地之紀,幽明之占,死生之說,存亡之難]”는 것이다.
주역에서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건(乾)으로 삼아 천도(天道)를 존중했고 땅을 곤(坤)으로 삼아 곤덕(坤德)을 받들었다. 《주역・상전(尙傳)》에서는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는 이에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 땅의 기세는 두터우니 군자는 이에 두터운 덕으로 사물을 싣는다.[天行健,君子以自強不息;地勢坤,君子以厚德載物]”라고 했다. 건도(乾道)와 곤덕(坤德)에 대한 인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즉 하늘을 받들고 땅에 순응해 자연을 존중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道)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사람 역시 크다. 세상에 4가지 큰 것이 있는데 사람이 그중 하나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그는 또 “도에 부합하지 않으면 요절한다”[不道早已]고 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났을 때 노자는 간곡히 타일렀다.
“천지(天地)는 아무도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운행하고 일월(日月)은 아무도 밝혀 주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밝으며 성신(星辰)은 아무도 배치하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질서가 있고 금수(禽獸)는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생겨나니 이는 자연이 그렇게 함이지 어찌 사람이 애쓴 것이겠는가? 사람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영화를 누리고 치욕스러운 것은 모두 자연의 도(道)이다. 자연의 이치를 따라가고 자연의 도를 따라 행동한다면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지고 사람은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는 한평생 ‘대도(大道)’를 추구했으며 온갖 고난을 겪었음에도 힘껏 실천하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다. 그는 자신의 도(道)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한 세트의 완비된 정통 윤리체계를 만들었고 유가문화는 한 무제 때부터 중국 정통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후 불교가 동한 명제(明帝)시기 중원에 전해져 들어와 경불(敬佛)・수불(修佛)이 유행이 되었고 세대를 거치며 철인(哲人)・현사(賢士)들을 육성했다. 불교는 비록 인도에서 발원했지만 인도에서는 실전되었고 오히려 하늘을 공경하고 도를 존중한 중토(中土)에서 뿌리를 내려 큰 이채를 뿌렸다.
천도를 존중해 순종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줄곧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 내용이었다. 가령 《논어·이인》에서 공자는 “어진 이를 보면 나도 그와 같아지길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안으로 자신을 반성한다.”고 했다. 또 “나는 하루에 3번 내 몸을 반성한다”는 것 역시 유생들이 학문을 하고 사람이 되는 기본기가 되었고 특히 “남이 내 허물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 기뻐함”은 유가가 제창한 처세술이 되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업종과 지식인 및 더 나아가 학생에 이르기까지 특히 유가(儒家)가 주도적인 사상이 된 이래 모두 마음을 담담하고 조용하게 함을 중시해왔다. 송조(宋朝)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 ‘정좌(靜坐)’는 특히나 유가의 전형적인 수신자성(修身自省 몸을 닦고 자신을 반성함)의 방식이 되었다.
천도에 대조해 자신을 반성하는 이런 문화는 또한 특정 사회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민에서 위로는 군왕에 이르렀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성탕(成湯)이 재위할 때 큰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았다. 이에 성탕이 목욕재계, 상림 광야에서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여섯 가지 일에서 자신을 반성했다.
“나의 정령이 합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사람을 잘못 쓴 것은 아닌가? 궁궐을 너무 사치스럽게 건축한 것은 아닌가? 베개머리 송사가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닌가? 관리가 뇌물을 수수한 것은 아닌가?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해치는 참소가 창궐했던 것은 아닌가?”
성탕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사방 수천 리에 큰 비가 쏟아졌다. 통치자가 자기반성을 통해 재앙을 면하는 이런 문화는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천도(天道)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전통문화의 지도사상 아래 사람들은 자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고, “비굴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음[不卑不亢]”으로써 마음에 경외(敬畏)를 품어 함부로 자만하지 않았고 또한 마음이 안정되어 자신을 비하하지 않았다. 아울러 처음부터 만물을 제약하는 “천(天)”・“도(道)”란 객관적인 존재와 무형적인 다차원 공간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흔히 영감(靈感)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런 경외(敬畏)가 일종의 단속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경외는 확실한 방해라기 보다 도리어 사회 안정과 사람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촉진이 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의 생산 작업을 가속하거나 발명 및 창조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흔히 자연스러움에 따르고 마음을 담담히 한 후에 세속의 현실에 속박당하지 않아 사유가 ‘도(道)’가 통하거나 또는 세속(世俗) 밖의 영감이 충만한 ‘무형(無形)’ 세계와 직접 소통함으로써 수많은 기묘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치 고인이 말한 “문장은 본래 하늘이 만든 것으로 묘수가 우연히 얻은 것이다[文章本天成,妙手偶得之]”라는 이런 “신묘한 글[神來之筆]”을 얻는다.
사실, 지금까지 네 개의 소절을 종합하면, 중국 고대 과학의 길은 전통문화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전통문화에서 ‘도’를 존중하는 이념은 정신성, 도덕성, 정체성 및 개방성이란 4가지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중국 고대 과학의 길은 현대 실증과학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아주 완벽하고 독특한 과학 발전의 길이다.
현대과학은 거의 순수하게 물질의 각도에서 연구에 착수하기에 흔히 생명의 정신적 측면과 도덕적인 측면을 무시한다. 심지어 생명과학과 의학의 연구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닭을 죽여 알을 얻는 방법을 채용한다. 즉 생물의 비생명적 물질 운반체와 표상만을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전통문화는 ‘도(道)’에서 출발해 역대로 사람의 정신 영역을 중시했으며 내면의 신운(神韻)을 중시하고 형신(形神)을 겸비해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해서 천금만큼 귀하다”거나 “정기(正氣)가 안에 존재하면 사기(邪氣)가 침범할 수 없다”는 건강의 근본원리를 제시했다.
현대 과학은 일률적으로 분할하는데 연구 대상을 그 환경에서 분리해 내고 또 연구 대상을 단지 형체만 있고 정신은 없는 수학모델 또는 ‘대상'(Java 등 기타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만물의 일반화를 의미하며 만물은 데이터 속성과 기능적 속성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데이터 속성은 일부 수치로 구성되고 기능적 속성은 일부 함수로 구성)으로 분할한다. 연구 방법도 ‘분석’과 ‘종합’으로 분할하고 ‘유물’과 ‘유심’을 분할하며, 개체와 집단, 인간과 환경을 분할한다. 반면 전통문화는 ‘도’에서 출발해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고 “상극”만 아니라 “상생”을 말하며 “천인합일(天人合一)”과 “도법자연(道法自然)”을 추숭한다.
현대과학은 ‘실증주의’와 ‘재현가능성’이란 틀에 갇혀 있고 또 ‘객관적’인 ‘공리’를 맹신하기 때문에 재현이 불가능하거나 실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임에도 거의 인지할 능력이 없다. 반면 전통문화는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표면세계 외에 또 무형의 다차원 시공의 존재를 인정하며, ‘세속’과 ‘현세(現世)’ 이외 세계의 의미를 인식하는데, 일종 내재적인 ‘도(道)’가 객관성과 보편적인 제약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고인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을 반성해 도(道)와 직접 소통했는데 많은 경우 직접 느끼거나 직관의 각도에서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고 또한 일찍이 초감(超感)능력에 의지해 정밀한 인체 경락체계를 만들었다.
본래 선진적이었던 중국 고대의 이 과학의 길이 근대에 이르러 쇠퇴하게 된 원인은 표면적으로, 발전과정에 근대가 물려받은 무기력과 후인들이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배척에 의해 서서히 몰락한 것이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이래 공산통치를 수호하기 위해 중국 정통문화를 전면적으로 파괴하는 폭력적인 운동을 펼쳐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하고 부자연스러운 당 문화 체계를 구축했다. 그것의 체계성이 잘 드러나는 것은 중공이 ‘무신론’으로 중국인들의 수천 년 된 ‘도’에 대한 믿음을 단절시켜 사람들이 법과 하늘을 무시하며 경외심을 잃게 만든 것이다. 또, 공산당의 불완전한 ‘유물론’을 절대적인 진리이자 세계와 역사를 인식하는 기본방법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해, 폭력과 투쟁을 위한 이론적 지도를 찾아내 전통문화에서 ‘천인합일’의 조화로운 이념을 대체했다.
동시에 공산당의 가치관에 따라 정화와 찌꺼기, 선진과 열등을 판단해, 중국 정통의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해, 모든 일을 ‘도(道)’에 따라 한다는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를 멋대로 파괴해 진정으로 선진적인 민족 문화의 뿌리를 잃게 했다. 그 후 “무신(無神), 유물(唯物), 문화 뿌리가 사라진” 중국인들 앞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공산당의 “사람을 신으로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이런 변이된 문화를 사용해 수많은 중국인민들의 사상을 개조하는 동시에 하늘에 반(反)하고 땅에 반하며 인성에 반하는 당 문화 이론 체계를 확립했다.
문화 영역에 당 문화가 이렇게 기승을 부린 후 과학 분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학실천 방면에서 ‘과학’을 구실로 실제로는 ‘반과학(反科學)’을 실천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과학정신에 위배해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우리는 여기서 관련된 비참한 사례 몇 가지를 직접 살펴보자.
1) 열광적인 유심론 허풍떨기: “1무(畝)당 만근을 생산”한다며 전 국민이 농사를 짓지 않게 했고, “철강을 대대적으로 제련한다”며 산에 올라가 제련하고, “위성 발사 경쟁”을 한다며 대규모 홍수나 가뭄, 허리케인, 쓰나미, 지진, 서리, 동파, 우박, 메뚜기 재해 등 자연재해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인위적으로 ‘3년 대기근’이란 참극을 초래해 급속히 팽창하던 중국 인구를 갑자기 정체시키거나 심지어 역성장 하게 했고 나중에 이를‘자연재해’로 속였다.
2) 천지와 투쟁하며 자연개조: “내가 바로 옥황상제다… 삼산오악(三山五嶽)은 길을 비켜라, 내가 왔다”고 떠들어대며 자연에 순응해 길을 터서 물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가로막는 방법을 사용했다. 전문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경솔하게 강을 막고 댐을 건설해 값싼 전기는 얻었지만 댐 건설로 인해 지진 등 지질재해를 일으켰고 양질의 토지를 잃고 토사가 강바닥에 쌓이게 했고 뱃길을 막아 수질을 악화시켜 생태에 거대한 파괴를 초래했다.
그렇다면 댐 건설의 핵심인 홍수 방지 효과는 과연 어떠했는가? 삼협(三峽 싼샤) 건설 당시 “삼협댐 공정이 준공하는 날이 장강이 홍수 재난과 작별할 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신화사는 2003년 댐이 완공되면 만년에 한번 정도 홍수를 만날 거라 선전했다. 그러나 2006년 완공된 후 2008년에는 “100년에 한 번 있을 대홍수”로 변했고, 2010년에는 “올해 홍수 방지는 전적으로 삼협댐에 기댈 수 없다”고 변명했다. 사실 삼협 댐은 단지 상류에서 오는 물을 직접 통제해 형강(荊江) 구간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지금 상류인 중경(重慶 충칭) 등 지역조차 큰 가뭄과 도시를 포위하는 홍수 피해가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중하류에 이르면 댐 건설의 효과는 더욱 의심스럽다. 1976년 8월 8일 새벽 주마점(駐馬店) 비양현(泌陽縣)에서 품질이 불량한 판교 저수지 댐이 붕괴하면서 홍수가 발생해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당시 수면의 폭이 10km에 달했고 직접적인 사망자 수는 자료에 따라 2만 6천 명에서 24만 명에 달한다. 미국 디스커버리(Discovery) 프로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인재(人災)로 평가되었지만 불행히도 재해가 발생한 직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상을 봉폐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 이 사실을 아는 중국인들이 거의 없다.
3) 사실을 왜곡하고 진상 봉쇄: 2003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SARS 사스)가 발생했을 때 이를 아주 흔한 전염병인 “비전형성 폐렴[非典으로 약칭]”이며 병원성 인자는 클라미디아 한 종류에 불과하다고 왜곡시켰다. 이 때문에 강력한 봉쇄를 통한 초기 통제의 시기를 놓쳤다. 외부에서 이에 대한 의혹을 널리 제기했지만 중공은 거듭 은폐하고 부인했다. 또 각종 건강대책이란 가상을 만들어 전문가들이 제때에 진료해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해 퇴원했다고 선전하면서 이에 대한 의혹 제기는 반중(反中)세력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였다. 광주 국제박람회 기간에 외국인들이 중국여행 안전문제를 제기하가 세계보건기구 전문가가 앞장서 중공이 적당한 조취를 취해 아무 문제도 없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중공의 거짓말을 믿고 있던 4월 20일 국무원 기자회견에서 중국에 사스가 전면적으로 발생했다고 발표하면서 그동안 전염병 상황을 은폐해왔음을 간접적으로 승인했다. ‘비전형성 폐렴’을 ‘사스’의 차단막으로 삼아 하마터면 전 세계를 중국과 함께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뻔했다.
과학이론 연구 분야, 특히 첨단과학 분야는 ‘유물(唯物)’과 ‘실증’의 세계관으로 정신과 도덕의 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에 본래 큰 결함이 존재한다. 역대로 영성(靈性)이 결핍된 데다 더욱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채택된 강제로 주입하는 세뇌교육은 사람의 영성을 직접적으로 억제해 과학연구 분야도 창의력이 저하되어, 독창적인 이론적 성과가 아주 부족하다. 단지 남의 기존 성과를 “가져올 줄”만 알 뿐이다. 실제로는 제조수준이 따라가지 못해 남의 제품을 손에 넣어도 제대로 재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강제적인 교육으로 배출한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견해랄 것이 없다. 그러나 원래 중국 지식인들은 늘 독립적인 사상으로 유명했으며 역대로 충신과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한 선비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20세기 문화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사상을 견지한 강단 있는 문화인들이 많았다. 중화민족 역시 역대로 발명과 창조에 능했지만, 지금은 ‘산짜이(山寨)’이라 불리는 짝퉁이 중국 제품의 전형적인 특징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공산체제의 전제(專制)폭력 통치와 영성을 억제하는 이런 당 문화의 범람이 수많은 중국인들, 중국의 우수한 정통문화 및 오래되고 독특한 과학의 길 모두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음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이 낙후된 지금의 상황은 권력을 쥔 자들이 책임져야지, 중국 전통과학의 길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탓하거나 이 길을 부정하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너무 폄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중국인은 아주 우수한 민족이라는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무신론’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 과학 분야 노벨상을 하나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바로 공산체제와 그것의 유물론 세계관이 사람의 영성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전통문화의 많은 정수는 현대에 와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실전되었으니 앞으로 과학문화의 전승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 중국과학의 발전에 대해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평을 했다.
“진정한 이유는 무신론과 유물론이 중국인들을 세뇌해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자의 책임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과거에 믿기 어려웠던 것을 연구하는 것이지, 근시안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나 단기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과학이 발전하고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 기어코 다른 사람이 해내는 것을 당신이 보고 나서야 이를 믿고 한다면 너무 늦지 않겠는가! 늘 남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데 어떻게 상을 탈 수 있겠는가? 당신이 과학을 믿는다고 하면 아주 이지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이지적이지 못하다. 당신은 과학의 발전을 제한하고 있는데 진정한 과학자는 이미 알고 있는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미지의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보면, 오직 하조휴(何祚庥 허쭤슈)처럼 “양자역학의 운동 법칙”이 “강택민의 삼개 대표 정신”에 부합하는지 여부만 판단하고, ‘부르주아 사상’이란 말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부정하고, “계급 조화의 변종”이란 정치적인 모자를 씌워 양계초의 아들이자 중국 국방부와 우의(友誼) 호텔을 설계한 저명한 건축학자 양사성(梁思成)을 홧병으로 죽게 만든 건달들이 중국 과학계를 독점하고 좌우지하고 있다! 학술계도 모두 침묵하거나 심지어 급히 공을 이루는데 급급해 도덕이 패괴되어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썩어버렸다. 그렇다면 만약 현재 상황을 고치지 않고 어떻게 중국 과학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오류를 타파해 진정한 정신성, 도덕성, 정체성 및 개방성을 중시하는 과학만이 진정으로 건강한 과학이며 또한 오늘날 우리의 과학이 돌파해야 할 방향이다. 또한 오직 이런 과학만이 인류 발전의 요구에 부응해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과학이 될 수 있고, 진정으로 합리적으로 우리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을 보면서 오만해져서 도덕을 무시하고 또 생명을 무시하면서 끝내 세상에 대해 조금밖에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강산을 멋대로 개조하고 자연을 파괴한다면 그럼 인류의 앞길은 위험한 것으로 인류는 결국 스스로 파놓은 무덤에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네 가지 특성에 부합할 것인지에 대해 천도를 존중하고 순종한 중국 고대과학의 길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자 참고 자료를 제공해준다. 평범한 우리 보통 사람들 역시 과학의 이런 각종 오류를 제거해야만 우리가 처한 세상을 진정으로 똑똑히 보고 세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2/7/5/2596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