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簡之)
【정견망】
최근 대법 수련인이 어떻게 식사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부님 설법을 공부하면서 마치 전에는 공부한 적이 없는 것 같았고 또한 지금껏 진지하게 깨달은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약간의 심득(心得)이 있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모두 수련인인데 수련인과 속인은 어떤 같지 않은 점이 있는가? 당신들이 밥을 먹으면 속인도 밥을 먹지 않는가? 본질이 다르며 근본적인 목적 기점이 같지 않고, 도달하고자 하는 인생목표가 같지 않다. 또한 근본적으로 신체의 변화도 같지 않다. 인류는 추구하는 중에 끊임없이 업력을 누적하게 마련이지만, 대법제자는 끊임없는 수련 중에 업력을 깨끗이 제거하여 자신의 신체(身體)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의 몸(神體)을 향해 전화(轉化)되도록 한다. 이것이 같을 수 있는가? 보기에는 같아 보인다. (박수)”(《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수련인과 속인이 식사하는 본질, 목적, 기점은 어떻게 다른가? 개인의 얕은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속인은 신체 건강, 영양 획득, 몸매의 아름다움, 외모의 아름다움, 명예와 이익 등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사람이 기본적인 생계유지와 건강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음식에 대한 그 어떤 추구는 모두 업(業)을 짓고 업을 쌓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음식을 지나치게 섭취하고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추구함으로써 각종 현대병을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음식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탐욕스런 욕망, 색욕과 강렬한 소유 심리를 강화한다.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음욕(淫慾)이 떠올라 초래하는 보다 큰 업력과 악과(惡果)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 수련인이 식사하는 실질과 목적은 무엇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끊임없는 수련 중에 업력을 깨끗이 제거하여 자신의 신체(身體)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의 몸(神體)을 향해 전화(轉化)되도록 한다. 이것이 같을 수 있는가?”(《대뉴욕지역법회 설법》)
만약 대법제자의 정념이 충족하다면 식사하는 전체 과정은 사실 업력을 제거하는 과정이고, 자신의 신체(身體)를 끊임없이 신체(神體 신의 몸)로 전화(轉化)시키는 과정이다.
식사 과정에는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는가? 누구의 취향을 기점으로 삼아 식재료나 조리법을 선택하고, 먹을 때는 오미(五味)에 대한 선택 음식 양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즉 너무 많이 먹으면 살이 찌지 않을지, 기름진 것을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은지 등등이다. 또한 남은 음식과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태도가 있는데, 이미 배가 불러도 남은 음식을 가족이 먹거나 버린다. 여기에는 또 음식을 살 때 가격에 대한 이익심도 포함된다.
이렇게 겉으로 보면 아주 간단한 한 차례 식사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각종 사람 마음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는 대법 수련인들의 고상한 자질과 신성(神性)을 더욱 드러낼 수 있다. 이 과정이 바로 사람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업력을 제거하며 이를 통해 신체(身體)를 신체(神體)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수련인의 신체(身體)는 이미 불체(佛體)로 전변되고 있기에 더욱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다. 더 필요한 것은 공(功)이고 덕(德)이며 다른 공간의 고에너지 물질이다. 이러한 기초는 수련인의 심성제고, 세 가지 일을 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대법 수련인이 지금 단계까지 수련하면서 육신이 필요로 하는 음식은 이미 아주 적어졌다. 다만 아직 바뀌지 않은 최후 인피(人皮)를 유지해야 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이런 인식을 가지고 되돌아본다면 음식에 대한 우리의 추구나 두려움은 모두 집착이 아닌가? 우리가 만약 음식의 영양, 맛, 양, 특히 양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많은 여자 동수들이 과식하면 살이 찔까 두려워한다. 너무 많이 먹어 살찔까 두렵고, 찬 것을 먹으며 비위를 상할까 두려우며, 밤에 전분을 너무 많이 먹으면 체중이 증가할까 두렵고, 고지방·고칼로리 단 음식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을까 두렵고, 기름지고 짠 것을 많이 먹어도 양생(養生)에 좋지 않다고 여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속인의 마음이고 속인의 이치가 아닌가? 우리는 속인의 이치에 속박되지 않는 대법 수련인인데, 그렇다면 속인의 음식에 대한 모든 갈망과 두려움은 모두 우리가 마땅히 제거해야 할 마음이 아닌가?
우리 수련인은 대체 왜 밥을 먹는가? 개인의 깨달음은 최대한도로 속인에 부합하기 위한 것으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며, 속인 이 한 층의 생존 법리(法理)를 파괴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리 많은 대법제자들은 오늘에 이르러, 이미 그리 많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고 매일 조금만 먹어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속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미래 인류 공간에 대한 사부님의 배치를 깨뜨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식사란 이미 무엇을 먹고 얼마나 먹고 몇 번을 먹느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만약 중생 구도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하루에 세 끼, 네 끼, 심지어 다섯 끼를 먹을 수 있고 또는 하루 종일 먹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이 많고 적고, 기름지고 담담하고, 소화가 잘되고 안 되고, 차갑고 더운 것은 모두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 출발점 때문이니 우리에게는 그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만약 한 신(神)으로서, 한 위대한 대법제자로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먹고, 조사정법(助師正法)하기 위해 먹는다면, 얼마를 먹든 모두 체중에 영향을 주지 않고, 소화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건강과 몸매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람의 이치요, 사람의 걱정이며, 사람과 음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신(神)과 사람 음식의 관계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근본적으로 신체의 변화도 같지 않다.”(《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속인의 이치에 따라 먹으면 살이 찌거나 빠지고 비위가 조절되지 않거나 소화되지 않거나 삼고(三高 고혈압 고혈당 고지혈)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대법제자는 설사 속인과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아무리 기름지고 차갑거나 아무리 달콤하고 아무리 맵더라도 우리에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맛과 양, 음식으로 획득하는 영양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 속인들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먹고, 그들과 함께 먹는데 그들의 심리적인 감수를 위해 먹는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고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수련인의 선(善)한 일면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하다면 먹을 수 있다. 가족이 고기 요리를 많이 만들어 계속 먹으라고 권한다면 당신은 먹을 것인가 먹지 않겠는가? 당신이 아무리 고기를 싫어할지라도 당신이 사람을 살리는 중요한 행동으로 간주한다면 고기를 먹는 것이 그렇게 맛없고 비린내가 나진 않을 것이다. 이런 신성(神性)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오직 심성이 제고되기만 하면 공(功)을 얻을 수 있고 공이 자라오를 수 있다. 사람 신체에 표현되는 것은 갈수록 더 건강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매일 어머니와 밥 먹는 문제로 언쟁을 벌이곤 했다. 어머니는 늘 나더러 많이 먹으라고 권하는데 항상 내가 너무 적게 먹는다고 여긴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매일 조금만 먹어도 충분하다. 나는 음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매번 식탁에 앉을 때마다 남은 음식을 다 먹어야 했다. 사람 마음의 교란을 받아 여러 차례 분노가 하늘을 찔렀는데, 밤에 이렇게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되고 분명 살이 찌고 허리가 굵어질 것이라는 등 사람 마음이 끊이지 않았다. 과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거의 매일 저녁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렇다고 너무 높게 말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나는 그렇게 많이 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해하지 못해 불쾌하게 여길까 두려웠고, 음식을 먹고 나면 또 사람 마음이 범람했다. 각종 사람 마음과 표정이 한데 엉겨 정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의 법을 공부하다 문득 제호관정(醍醐灌頂 역주: 제호는 원래 우유로 만든 고급 음료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흔히 최고의 법을 뜻하는 비유로 사용된다)이 통한 것처럼 자신의 각종 사람 마음의 집착의 교란 및 대법제자가 음식에 직면해 마땅히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여야 하는지 깨달았다. 이어서 다시 식사할 때 더 이상 ‘나는 먹을 수 없다’는 반항이 없어졌고,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포함해 묵묵히 많이 먹고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 가족이 힘들게 마련해준 음식을 많이 먹었다. 음식과 자아(自我)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었고 오직 다른 사람의 감수와 음식에 대한 소중함만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끊임없이 대법 수련인의 자세로 매 끼니를 먹을 것을 요구했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고 너무나도 일상적인 식사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 마음 또는 신성(神性)에 대한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생활에서 아주 익숙하게 여기는 다른 ‘작은 일들’, 가령, 수면, 옷 입기, 말하기, 사람들과의 교제 등등에도 모두 우리를 사고(思考)하게 만들고 우리를 제고하게 하는 각종 형식의 기회와 선택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한다면 그럼 속인으로 업을 짓고 업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 수련인의 마음으로 정리하고 교정한다면 이런 일상의 작은 일들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위로 수련해 올라갈 하나하나의 계단이 된다.
우리 다시 한번 수련인의 식사에 대한 사부님의 법을 공부해보자.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밥을 먹으면 속인도 밥을 먹지 않는가? 본질이 다르며 근본적인 목적 기점이 같지 않고, 도달하고자 하는 인생목표가 같지 않다. 또한 근본적으로 신체의 변화도 같지 않다. 인류는 추구하는 중에 끊임없이 업력을 누적하게 마련이지만, 대법제자는 끊임없는 수련 중에 업력을 깨끗이 제거하여 자신의 신체(身體)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의 몸(神體)을 향해 전화(轉化)되도록 한다. 이것이 같을 수 있는가? 보기에는 같아 보인다. (박수)”(《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이상은 식사에 대한 개인의 소감을 적은 글이다. 동수들이 생활 속에 깊이 숨겨져 마치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된 각종 집착을 닦아 버리길 희망한다. 우리 함께 가급적 빨리 제고해 올라갑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2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