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林雨)
【정견망】
당시(唐詩)는 활달하고 고원(高遠)해서 늘 후인들이 모방하고 전송(傳誦)하는 대상이 되어 왔다. 당조(唐朝) 시인 유상(劉商)의 이 시 《수문사(酬問師)》에서 표현하는 것은 시경(詩境)보다 더 높은 것이다.
전체 시를 감상해 보자.
허공은 처소가 없으니
마치 유리와 같구나
시경(詩境)은 뉘라서 도달하랴만
선심(禪心)은 또 시를 넘어서누나
虛空無處所
仿佛似琉璃
詩境何人到
禪心又過詩
“허공은 처소가 없으니
마치 유리와 같구나”
여기서는 선(禪)의 경계를 가리키는데, 즉 신불(神佛)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보다 더 투철히 말한 것 같다. 겉으로 보면 ‘허공’은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다. 이 구절은 대단히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 신화를 보면서 ‘왜 우주 비행사들이 달나라에 가고 우주공간 높이 날아갔지만 신(神)을 만나지 못하는가?’라고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매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그들이 있는 허공은 마치 유리와 같아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의 과학은 또 우주 장벽이란 개념이 있어서 어떤 것들은 차단될 수 있다. 신은 확실히 존재하며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시경(詩境)은 뉘라서 도달하랴만
선심(禪心)은 또 시를 넘어서누나”
시사(詩詞)는 일종의 예술 형식으로 사실 과장하는 성분이 약간 들어 있다. 때문에 시사 속의 경계에 도달하기란 아주 어렵다. 하지만 시인이 여기서 표현하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뒷구절 “선심은 또 시를 넘어서누나”다. 선심(禪心)이란 이해하기 몹시 어려운 것으로 사실 청정심, 자비심 등을 합한 개념이다. 또한 신불(神佛)의 표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이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신불(神佛)의 위대함이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경’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정법(正法)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실 시사 역시 신전문화(神傳文化)이며 오늘날 법을 얻기 위한 준비에 해당한다. 좋은 시사는 또 신(神)의 뜻을 전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시 자체는 시(詩)이자 사람들에게 신계(神界)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게 아닌가?
파룬따파(法輪大法) 사부님의 신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가 발표된 후, 세인들은 모두 각성하고 있고 사람이 된 진정한 목적은 법을 기다리기 위한 것으로 대법이 전해지길 기다려 법을 얻을 기회를 얻는 것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이 작품은 단지 시 자체를 위한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가장 운이 좋고 가장 총명한 사람은 바로 법(法)을 얻은 사람들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