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子微)
【정견망】
신(神)은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 예절을 가르치셨으며, 사람이 응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생명의 흐름과 영혼의 의지처, 미래의 행방에 대한 거시적이고 전반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일체는 우주에서 더 높은 신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천계(天界)의 런 한 무리 생명들은, 우주가 괴멸(壞滅)로 나아갈 때 자신을 구하려고 했으며, 자신의 것을 성취하려고, 자구(自救 자기 구도)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치밀한 한 세트의 체계를 배치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바로 창세주(創世主)께서 이미 계획한 구도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들은 그 음암(陰暗 음침하고 어두운)한 힘을 방임하고 있다. 하지만 불법은 끝이 없고, 암암리에 창세주는 음암하고 부패한 안배를 타파할 계획이 있으셨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려고 하는 곳은 티베트[西藏]다. 역사적으로 신(神)의 신앙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신불(神佛)과 깊은 불연을 맺기 위해, 이 지역 중생들이 말세(末世)에 대법이 널리 전할 때 낙오되지 않도록 수많은 수행인들이 불법(佛法)을 널리 알리는데 공헌했다. 예를 들면 마르파상사, 밀레르빠 존자, 연화생 대사, 원조(元朝)의 파스파(八思巴) 국사 등이다.
나는 7세기경 토번 왕조 송첸감포 치세 때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송첸감포는 당조의 문성공주(文成公主)와 결혼했고, 문성공주는 주동적으로 티베트에 불법(佛法)을 전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천상의 생명이 전생(轉生)한 것이기 때문에 생명 소중히 여겨야 하며 해독과 타락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험악해서 사람의 영성(靈性)을 잃기 쉽다. 수행은 사람의 경지를 높여주고, 부패한 도덕을 만회하며, 생명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불법의 유전(流傳)에 공헌한 그런 분들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1) 성황(聖皇)이 정하신 혼사
역사적으로 당 태종 시기에는 눈부신 업적들이 많았다.
성황(聖皇) 이세민(李世民)은 어진 정치를 베풀고 백성을 보존하며 국운을 개척하고 문치(文治)로 나라를 수호했다. 주변 소수민족들이 당조(唐朝)에 투항해 당 태종을 ‘천가한(天可汗)’으로 존경했다. 당 태종은 “자고로 모두 이적(夷狄)를 천대했고, 중화를 귀히 여겼는데 짐만은 유독 한 집안처럼 사랑한다.”라고 했다. 성황의 말씀은 마치 천정(天庭)에 핀 연꽃처럼 아름다운 향기를 풍긴다.
예로부터 ‘화합을 귀(貴)하게 여겼고’ ‘중용의 길’은 중원(中原) 왕조가 추앙하는 사상이다. 기본적으로 ‘평천하平天下’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무공(武功)이 아니라 문치(文治)이며, 그것이 실행하는 것도 패도(覇道)가 아니라 왕도(王道)였다. 소위 “먼 나라 사람이 불복하면 문덕(文德)을 닦아 그들이 오게 한다”(역주: 논어:계사)는 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왕자(王者)의 몸에 짊어진 ‘평천하(平天下)’란 역사 사명이다.
한 왕조(王朝)는,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약속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여러 민족과 인연을 맺는 과정에서 역사의 안배가 차근차근 질서 있게 전개되는 것을 보았다.
당 장안(長安)에서 서쪽 8천 리 떨어진 토번에서 송첸감포는 찬보(贊普 군주)로 즉위하고, 수도를 라싸(현재의 티베트 라싸)로 옮겼다. 송첸감포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고, 관제를 설치했으며, 율령을 공포하고, 네팔, 천축 등지에서 문화와 기술을 도입해 토번 사회를 발전시켰다. 송첸감포는 일찍이 당조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토곡혼과 돌궐 모두 당조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당조에 사신을 보내 청혼했지만, 당 태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자가 토번으로 돌아와 거짓말을 했다.
“처음 장안에 갔을 때 당조가 매우 우대하여 통혼을 허락했습니다. 그 후 토곡혼 왕이 입조하여 이간질 하자 혼인을 파기했습니다.”
송첸감포는 이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출병해 토곡혼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토번은 당항과 백란 두 부족을 공격한 후 송주(松州 현재의 사천성 송반현松潘縣) 서쪽에 20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금은화 비단을 장안으로 보내며 공주와 혼인하기 위한 예물이라고 주장했다.
사신이 말을 전했다.
“만일 대국에서 공주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즉시 내륙으로 진격할 것이다.”
송첸감포는 과연 군대를 이끌고 송주를 공격했고, 송주는 적을 얕잡아 보다 대패했다.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해 토번을 크게 물리쳤다. 송첸감포가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청혼할 것을 다시 청하자 당 태종은 통혼 요구를 들어주었다.
서기 640년, 송첸감포가 재상 록동찬을 왕조에 파견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병진(丙辰)년에 토번의 찬보(贊普)가 재상 록동찬(祿東贊)을 보내 금 5천 냥과 진기한 물건 수백 개를 보내 혼인을 청했다. 황제가 문성공주를 그 아내로 삼게 했다.“
(2) 문성공주의 기이한 재능
문성공주는 당 태종 이세민의 사촌동생인 이도종(李道宗)의 서녀(庶女)로 이름은 빙안(冰雁)이고 어릴 적 이름은 홍아(虹兒 무지개란 의미)다. 빙안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꿈속에서 한 줄기 맑은 무지개를 보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무지개를 따라 나풀나풀 내려왔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난 후, 아기의 이름을 무지개라는 뜻으로 ‘홍아’라 했다.
홍아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이해력이 뛰어나며, 특히 기이한 책을 즐겨 읽었다. 그녀는 별을 관찰하고 시대 상황을 연관 지을 수 있었고, 풍수를 보면 길흉을 알 수 있고, 사물을 보면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종실의 딸로서 그녀는 스스로 티베트 왕에게 시집갈 것을 청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당과 토번 전쟁 때 10대였던 홍아는 밤에 서쪽의 천상을 보고 말했다.
“토번은 반드시 패할 것이다.”
당시 집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전쟁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야 모두가 신복(信服)했다.
나중에 토번 사자가 장안에 도착하기 전에 홍아는 서쪽에서 온 붉은 줄이 자신의 발목을 묶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몰래 자신을 위해 점을 쳐보니 홍란성(紅鸞星)이 움직여 서쪽 군왕에게 시집가는 상이 나왔다. 그녀는 시녀를 데리고 몰래 나가서 점집을 찾아보니 또 홍란성이 움직이는 점이 나왔다.
홍아는 천성이 소탈하여 ‘목숨을 다투지 않고, 다투어도 소용없으니 명(命)에 순응해야 번창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토번 사자가 장안에 도착한 후, 황실 공주는 모두 멀리 이역으로 시집가는 것을 꺼렸고, 태종은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 홍아는 아버지께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청해서 토번으로 시집가겠다고 했다.
태종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홍아의 이름에 있는 ‘얼음 빙’자를 제거하여 이안아(李雁兒)라고 하고, 이안아에게 ‘문성공주’라는 봉호(封號)를 내리며, 공주가 문(文)의 힘으로 토번 군왕을 돕기를 바랐다.
공주는 밤에 토번 지형의 꿈을 꾸었는데, 항상 토번 지형이 기괴함을 느꼈고, 깨어났을 때 토번 지형을 그려서 반복해서 관찰한 결과, 지형 배후에 누워있는 마녀의 형상이 있어서 지형이 험악하여 중생과 국운에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당(大唐)은 불법을 흥성하게 하고, 사상을 넓혔다. 문성공주는 남장을 하고 친오빠와 함께 원천강(袁天罡)을 만나러 갔다. 원천강은 매우 유명한데 그는 이순풍(李淳風)과 함께 왕조를 연기했고, 《추배도推背圖》를 남겨 이후의 왕조를 예언했다. 문성공주가 원천강을 만났는데, 원천강이 뭐라고 했을까?
원천강이 말했다.
“공주님은 천계(天界)의 사명을 띠고 왔으며 토번의 찬보와 불연(佛緣)이 있습니다. 토번의 왕과 함께 토번의 열악한 풍수를 바꾸고 불교를 전수하는 것은 토번 민중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주님의 보살(菩薩) 몸, 여래의 자리, 공적(功績)이 만고에 빛나고, 아름다운 명성이 대대로 전해질 것입니다.”
원천강은 나중에 문성공주에게 호신부가 들어 있는 여의낭(如意囊)를 선물했는데, 이 부적은 원씨 집안의 공력이 있는 사람이 여러 차례 가지(加持)한 것으로 공주더러 휴대하되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문성공주(文成公主)는 불교를 독실히 믿었고, 절의 노승(老僧)도 그녀를 점화하여 서토(西土)에 올라 불연(佛緣)을 널리 알리고, 절을 짓고, 포기하지 않고 지켰다. 공주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감당했다.
태종 이세민은 백관을 거느리고 문성공주를 장안성 밖으로 배웅하며 당부했다.
“토번에 가면 임무가 막중하니, 양국의 우호를 닦고, 천조(天朝)의 인문을 널리 떨치고, 이족(異族)을 교화시켜라. 개인의 득실을 염려하지 말고 토번이 예의국이 되게 도우고 천자국의 위엄을 품고 있어라.”
문성공주는 약속했고 이때는 서기 641년, 공주 나이 17세였다.
(3) 이역(異域)과 인연을 맺다
중국 역사에서 화친 정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종실 남자는 피를 흘리며 싸워 영토를 지켰고, 종실 여자는 멀리 이민족에게 시집가서 변경을 순화시키는 것이 모두 직책이었다. 역사적으로 화친을 살펴보면 대개 국력이 약할 때 주변 이민족에 대한 안전을 강구하는 보완책이었다.
하지만 문성공주가 토번에 들어간 것은 역사적인 화친과 크게 달랐다. 당시 당은 세력이 강했고, 토번도 막 강성해지던 정권이었다. 당은 토번을 싸워 이긴 후, 토번의 청혼에 응하여 당과 토번이 우호적으로 왕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토번에 들어갔을 때, 행렬이 매우 방대했고, 당 태종이 보낸 혼수는 매우 두터웠다. 석가모니 금신상, 진귀한 보물, 금옥으로 만든 서궤, 360권의 불경, 각종 금옥 장신구가 있었다. 또한 다양한 음식, 다양한 무늬의 비단 이불, 점치는 경전 300가지, 선악 식별을 위한 거울, 건설 및 기술 저서, 질병 치료 약방, 의학 서적 및 의료 기기 등이 있으며 다양한 곡물과 씨앗도 휴대했다.
문성공주는 큰 무리의 호위대, 시녀, 장인, 예인을 데리고 장안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몇 달 동안의 고생 끝에 감숙(甘肅)을 거쳐 청해(靑海), 일월산(日月山)을 거쳐 대하댐(大河壩)을 거쳐 청해(靑海) 경내의 황하 발원지인 하원(河源) 일대까지 이르렀다.
송첸감포는 시종과 호위대를 이끌고 라싸에서 박해(柏海)로 나가 기다렸다가 연후에 다시 하원河源으로 마중나갔다. 문성공주는 하원에서 오래 기다리던 토번왕을 만났고, 송첸감포는 문성공주의 단아하고 고상함에 감탄했다. 송첸감포는 이도종을 알현했는데, 역사 기록에 송첸감포는 “사위로서 아주 공손했다. 또한 대국(大國) 복식 예절의 아름다움을 탄식했다.”라고 했다.
송첸감포는 공주와 함께 라싸로 돌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국민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니 온 도성이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 이와 동시에 천계의 신선이 라싸를 주목했다.
송첸감포가 집권하기 전, 토번에는 단 하나의 종교가 있었는데 본교(苯教)라고 하며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다. 전적으로 복을 빌고, 재앙을 쫓고, 비를 구하고, 점을 치고, 주술을 부리는 법이었다. 송첸감포가 집권하여 티베트어를 통일하고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불교를 처음 전파하였다. 송첸감포는 인도와 네팔의 접경 지점에 사람을 보내 관음상(이 상은 현재 여전히 포탈라 궁에 모셔져 있다)을 모셔와 공양과 복을 비는 대상으로 삼았다.
이후 송첸감포는 네팔의 척존(尺尊)공주를 맞아들였고 공주는 석가모니상, 미륵상, 부동불상(不動佛像) 등을 가져왔다.[부동불상은 현재 야마가사惹摩伽寺에 모셔져 있으며 미륵상 등은 현재 대소사大昭寺에 있다]
송첸감포가 당나라와 혼인한 것은 정치적 의미가 매우 짙다. 대국과의 혼인을 빌미로 정치를 조종하는 본교의 힘을 바꾸고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문성공주가 티베트에 들어온 것은 불교가 토번에 전해지는 길을 열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가져간 불교 보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석가모니 본존(本尊) 불상이고, 다른 하나는 360부의 불경이다. 문성공주가 불상을 모시고 토번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겪으며 불교문화를 전파했다.
본교 배후의 암흑 세력은 줄곧 불교를 배척했다. 본교의 법사(法師)는 공주가 들어온 후 줄곧 법술(法術)을 써서 공주를 모해하려 했는데, 공주는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보배 거울을 가지고 있어 귀신이나 도깨비의 그림자를 비출 수 있었다. 공주 곁에는 천룡팔부의 호법도 있고, 제천(諸天) 신불(神佛)의 보호와 점화도 받았다. 라싸에 도착한 것이 이미 본교 법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들은 원래 당나라의 공주가 하원에서 병사할 줄 알았는데 문성공주는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며 라싸의 형세를 관찰하고 있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