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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에 돌아보니 푸른 산빛만 이어지누나

섬섬(纖纖)

【정견망】

문인(文人)들은 승려들과 교류하길 좋아하고 승려들도 문인과 늘 교류하곤 했다. 이는 흔히 연분 때문이다. 어떤 문인은 전생에 승려였다.

당조(唐朝) 시인 기무잠(綦毋潛)의 시 《융 상인(上人)의 수행처를 지나다(過融上人蘭若)》는 벗(승려)을 방문한 시인이 만나지 못한 것을 표현했다.

산꼭대기 선방에는 가사만 걸려 있고
창밖에는 아무도 없고 물새만 나는데
황혼 무렵 산길을 내려오다
종소리에 돌아보니 푸른 산빛만 이어지누나.

“산꼭대기 선방에는 가사만 걸려 있고
창밖에는 아무도 없고 물새만 나누나 ”

시인이 스님을 방문한 세세한 대목에서 배후에 담긴 함의를 엿볼 수 있다. 먼저 승려의 옷(가사)이 걸려 있다는 것은 이때 승려가 아직 외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만약 정식으로 외출했다면 분명 가사를 입었을 것이다. 이때 융 상인(上人 승려에 대한 존칭)은 아마 밭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창밖을 나는 새들은 한편으로는 이곳의 새 소리와 꽃의 향기를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스님이 사는 환경이 인적이 아주 드문 곳임을 나타낸다.

“황혼 무렵 산길을 내려오다
종소리에 돌아보니 푸른 산빛만 이어지누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아침에 종을 치고 저녁에 북을 울린다. 저녁에 돌아온 승려가 종을 친 것은 그가 시인을 배웅하기 위해 사용했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인은 이미 산을 절반쯤 내려간 뒤라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깨닫게 된다. 시인은 분명 승려가 멀리 가지 않았음을 알기에 밤늦게까지 기다리면 만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떠났다. 반면 승려는 일부러 시인을 만나지 않았고 시인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종소리로 시인에게 일깨워준다.

고대 출가인(出家人)들은 흔히 세속적인 생각과 단절하곤 했다. 때문에 융 화상은 시인을 보고 싶지 않아 급히 그를 피한 것이다. 시인은 세간의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지 않으면서도 또 도를 닦고자 하나 이는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시는 마치 우리를 자연의 조화와 순정(純淨), 활기가 넘치는 세상 밖 무릉도원으로 보내준 것 같다. 마지막의 저 종소리는 은은하면서도 또 감동이 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확실히 곳곳에서 자신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 아득한 종소리는 우리를 아득히 먼 과거 우리가 애초 세상에 올 때로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은 대법(大法)이 전해졌는데, 사람들이 종소리를 따라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대법 사부님은 《인류사회는 왜 미혹의 사회인가》라는 경문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죄업을 없애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세상에 온 진정한 목적이다. 사람마다 세상에 와서 전생할 때 모두 창세주에게 맹세했다. ”

세인은 모두 법을 얻기 위해 왔으니 절대 이 만고의 기연(機緣)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92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