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필성(必成)
【정견망】
나는 2012년에 정식으로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한 중년 대법제자다. 오늘 나는 법회(法會)에 대해 교류하고자 한다. 법회라는 형식은 우리 대법에서 한 가지 독특한 방식이다. 여기에는 스승님의 자비와 대법 신우주의 위타(爲他)한 속성이 스며들어 있다. 이 기간에 대륙 지역은 여전히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지역마다 법회 형식에 대한 방식과 이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서는 줄곧 사부님께서 남겨 주신 이러한 교류 방식을 중시해 왔고, 나도 다행히 동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지난 몇년간 내가 법회를 통해 배우고 느낀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1. 처음 법회에 참가했을 때 마치 세례를 받은 느낌
2015년 나는 사존(師尊)의 인도 하에 다행히 우리 지역 노동수(老同修) 두 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줄곧 법회라는 이런 형식을 아주 중시해왔다. 그 후 나는 운 좋게 대법을 수련한 후 첫 번째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내 기억에 단체 법 공부를 마치고 동수들이 법회를 개막한다고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해외 법회 형식이 떠올랐다. 내 인상에 법회란 사부님께서 설법하시고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수련생 교류에 대해서는 전혀 인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교류할 내용이 있으면 평소에 이미 교류했는데 왜 또 법회라는 형식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을 품고 처음으로 우리 지역 교류 법회에 참가했다.
노동수는 이전 법회 전 몇 차례 법 공부 때 명혜 법회 원고 모집의 내용과 요구를 공유했다. 그런 다음 동수들이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작성한 원고를 노동수들에게 건네주었고, 그들이 수정한 후 발언 순서, 개막사 및 사회자 등 기타 구체적인 사항들을 확정했다.
법회 전날 밤, 나는 이번 법회가 원만히 성공할 수 있도록 발정념을 해서 내일 법회를 방해하는 일체 교란 요소들을 제거했다. 발정념할 때, 나는 먼저 아주 많은 사악이 제거되었음을 보았고, 그 후 우리 지역 여러 장소에서 크고 작은 연꽃이 솟구쳐 올라와 회전하면서 천천히 법회 장소인 노동수의 집에 모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떨어질 때,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는데, 원자폭탄이 터질 때의 그런 두려움은 없었지만 노동수의 집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떨어진 연꽃이 뿜어내는 버섯구름(에너지)의 영향으로 노동수의 집이 있는 곳이 투명한 색으로 변했다. 이 에너지는 점차 우리 지역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때 나는 법회가 결코 단순한 하나의 교류가 아니라 진정한 군웅(群雄)들의 모임임을 깨달았다.
법회가 시작되었고 동수들이 차례로 발언할 때 나는 교류하는 동수들이 모두 각기 다른 불도신(佛道神)의 형상임을 보았는데, 어떤 이는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신(神)이었다. 나는 이것은 동수의 부동한 층차의 모습임을 깨달았다. 나도 법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수련 심득을 발표했다.
매 차례 감동적인 이야기와 법에 대한 동수들의 이성적인 인식이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법회가 끝날 때쯤 나는 마치 완전히 세례를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 과정에 사부님께서 여러 차례 관정해 주셨다. 이렇게 내가 참여한 첫 번째 법회가 끝났다. 나는 동수들의 얼굴에서 모두 선한 미소가 퍼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여러 차례 법회에 참가했고 아주 많은 수승한 장면들을 보았다.
2. 법회를 주관하니 회의장의 모든 물질이 대법 에너지의 가지로 신성해져
최근 들어 우리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매년 두 차례 법회를 조직했다. 주로 명혜망 ‘513’ 대법의 날 원고 모집 및 대륙 법회 전후에 거행한다. 내가 여러 차례 법회에 참가한 후, 노동수는 나더러 법회 사회를 보라고 격려했다. 처음에 나는 자신은 신수련생이라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노동수의 격려에 힘입어 염치 불고하고 나섰다. 법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나는 노동수 집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나는 본래 매체에서 일하고 또 여러 행사에서 진행을 해봤기 때문에 자신은 당연히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멈추란 말을 들었다. 노동수가 나더러 걷는 데 기세가 없다며 법회의 신성함과 장엄함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법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나를 인도했고 매 한 걸음을 신성하고 장엄하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또 개막사를 읽을 때 한 글자 한 글자씩 정확히 발음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 나는 좀 거부감이 있었다. 내 발음은 꽤 분명해서 별 문제 없고 다른 동수들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니 그렇게 진지할 필요는 없으며 교류야말로 핵심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매번 법회에 참가할 때마다 다른 동수들의 장엄하고 신성한 눈빛을 보고, 또 사부님의 법상(法像)을 보고, 다른 공간의 수승(殊勝)한 장면을 볼 때마다 비로소 자신의 당시 마음이 얼마나 차(差)했는지 깨닫곤 한다. 법회는 단순히 동수들 사이의 교류뿐만 아니라 사부님과 뭇신이 가지하는 성대한 모임이다. 만약 사부님께서 현장에 계신다면 그럼 우리는 마땅히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는가? 나는 사부님께서 실제로 행사장에 계시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나는 이는 자신이 법에 대한 엄숙함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임을 아는데 또한 구우주가 패괴한 표현임을 안다. 두 노동수가 매번 세부사항까지 엄격히 요구하며 진지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니 그 차이가 한 눈에 봐도 확연했다.
나는 또한 큰 법회를 사회보는 것은 다른 어떤 환경에서 사회를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드시 자신의 가장 순정한 심태라야만 이런 법회의 사회를 볼 자격이 있다.
법회가 시작되고 나는 사회자 자리에 서서 아래에 앉은 동수들을 보았다. 나는 매 동수가 수련하는 동안 사부님의 가지속에서 스스로 형성한 독특한 에너지 장과 사부님의 가지가 한데 모인 그런 신성한 느낌을 받았다. 발정념을 할 때 나는 매 한 동수의 정념이 한데 모여 법회장 중앙에 하나의 거대한 연꽃을 이루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연꽃이 하늘로 날아가더나 작은 파룬들로 변해 각 동수의 몸 위로 흩어졌다. 이 장면이 비할 바 없이 수승했고 나는 이는 법회에 참가하는 매 동수에 대한 사부님의 가지임을 안다.
법회가 시작되자 우선 나와 다른 한 동수가 함께 개막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노동수에게 사부님의 신경문을 공경히 외워달라고 청했다. 그런 다음 동수들이 차례대로 발언했고 매번 발언이 끝나면 내가 단상에 올라가 우선 발언한 동수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다음 동수를 무대에 올려 발언하게 했다. 모든 동수들이 교류를 마친 후 우리는 또 함께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이번 법회 사회 경험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법회에 대한 사부님의 가지 및 법회 속에서 매 동수마다 정념정행(正念正行)한 장거(壯擧)를 느낄 수 있었다. 법회를 사회보는 과정은 또 자신에게 존재하는 그런 신우주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패괴(敗壞)한 관념과 물질을 제거할 가장 좋은 기회였다. 내가 법회를 사회보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아내(동수)와 아들도 노동수의 격려하에 법회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아름다움은 모두 사부님의 가지와 배후에서 묵묵히 감당한 노동수들 덕분임을 안다.
3. 법회의 성공은 모두 묵묵히 원용하고 정체적으로 협력한 표현임을 견증
내가 법회에 참석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노동수는 또 내게 법회 조직에 더 많이 참여하라고 격려했다. 나는 우선 타자 작업을 도왔고, 그 다음에는 원고 수정을 배웠다. 원고 수정은 내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동수들이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먼저 동수들이 자필로 쓴 원고를 간단한 문장으로 타이핑한 다음, 이 글에 동수들의 생각을 더 추가해 내용을 충실하게 했다. 비교적 긴 문장은 소제목을 나눠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동수들이 문장에서 인용한 사부님 경문의 정확성을 일일이 확인했다.
나중에 우리 집에서도 법회가 열렸다. 이전에는 늘 동수 집에서 열었고 우리 집에서는 열어 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법회 전반 과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법회를 개최하기 몇 주 전부터 동수들에게 미리 알려 준비할 시간을 주고, 법회에 참가하기에 적합한 다른 동수를 찾아 법회가 주는 아름다움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우리는 또한 동수들에게 안전 문제에 주의하도록 일깨워주었다. 주로 수구와 핸드폰 안전에 주의하게 한다.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 휴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법회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법회장 정면 가장 상단 중앙에 사부님 법상을 배치한 다음 인쇄된 글을 벽에 붙이고 마지막으로 발언대와 방석을 배치한다. 매번 법회마다 동수들은 늘 각자의 임무를 매우 진지하게 책임졌다.
한번은 법회가 막 시작되기 전 한 노동수가 생수 한 상자를 가져와 옆에 두고는 말했다.
“누구든 목이 마르면 가져다 드세요!” 나는 동수의 이런 묵묵한 원용(圓容)을 보고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신성한 법회의 성공적인 개최는 모든 사람의 단체적인 협력과 묵묵한 원용을 반영한다.
법회가 시작되면 맨 먼저 사회자가 개막사를 낭독한다. 개막사는 대부분 이번 법회를 위해 특별히 동수가 쓴 시다. 매번 개막사에는 늘 사부님과 법에 대한 동수의 견정함과 정념이 가득했다. 그런 다음 사부님의 최신 경문 한편을 듣는데 마치 사부님을 현장에 정중하게 초대한 것과 같았다. 그런 다음 사회자가 법회의 공식 시작을 알리면 모두 차례대로 교류 발언을 했다.
박해 중인 중국 대륙에서 법회는 단지 동수들이 서로 비학비수(比學比修)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예전 동수를 불러오고 중생을 구도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매번 법회에서 우리는 가급적 많은 예전 동수들 및 가족들에게 법회 원고를 쓰도록 요청한다. 쓴 원고를 보면 많은 동수들에게 모두 각기 다른 정도의 오해가 있는데, 어떤 이는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해서 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만 하면 충분하니 굳이 원고를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어떤 이는 스스로 글을 쓰고 싶어도 방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매번 원고를 모집하거나 법회를 열 때마다 늘 동수들의 격려와 협조가 필요한데 사실 교란을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류원고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이 자신의 수련과정이자 제고 과정이며 또한 위타(爲他)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수련 문장이 발표되든 안 되든, 설사 소조에서 하는 교류라도 다른 동수를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 한편의 원고는 단순히 자신의 득과 실 뿐만 아니며, 당신이 다른 사람을 돕길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이 수련에서 얻은 것을 동수들과 나누려 하든 하지 않든, 이는 모두 한 수련인의 경지와 층차의 표현이다.
한번은 한 동수와 함께 1999년 이전 수련했던 노동수 L의 집에 가서 명혜법회 원고 모집에 참여하도록 초청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은 글을 못 쓴다고 했지만 내가 아직 시간이 있고 도와줄테니 그냥 있었던 일을 말해 주면 된다고 했다. 동수가 하겠다고 했지만 줄곧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그의 집에 다시 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와 함께 갔던 동수는 ‘L 동수를 낙오시켜선 안 된다. 그가 한번 올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막 이런 생각을 하는데 L 동수가 정말 우리 집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악하다는 감옥 집중훈련대에서 어떻게 정념정행했고, 사부님께서 어떻게 신적(神跡)을 보여주셨는지, 자신이 어떻게 견정하게 착실히 수련했는지, 사악의 박해를 어떻게 타파했는지 말해주었다. 아내는 그가 말한 내용을 타이핑했고 또 일부 중요한 문제들은 동수를 인도해 당시 생각을 말하게 했다. 이렇게 하자 동수가 박해에 반대한 문장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완성되었다.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노동수는 여러 차례 우리를 감동시켰다. 그가 당시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는 또한 예전의 정진하던 상태를 되찾았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법회를 개최하도록 안배하신 의미가 있는 곳이다. 법회가 시작되던 날, 동수는 법회에서 자신의 이 문장을 교류했고 모두 듣고 나서 그가 사악한 환경하에서 정념정행한 것에 대해 비할 바 없는 감동을 느꼈다.
맺음말: 구우주의 사아(私我)에서 나와 진정으로 위타한 생명으로 변해야
내가 지난 몇 년간 법회에 참여하고 사회를 보고 또 법회를 조직한 것을 생각해 보니, 사부님께서 남겨 주신 법회라는 이런 대법 수련 형식이 우리에게 무한한 아름다움과 수확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는 또한 사부님의 무한한 자비와 무량한 법력 및 지혜가 스며들어 있다.
나는 또한 법회의 의미는 교류 자체 외에도 또한 우리가 법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정체(整體)를 형성하고 정체를 원용하며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에 있음을 서서히 깨달았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구우주의 사아(私我)에서 걸어나와 진정으로 위타(爲他)한 생명으로 변할 수 있다. 특히 사악의 박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 여전히 적지 않은 동수와 세인들이 사당이 만들어낸 붉은 공포의 압력하에서, 신성한 대법 법회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동수들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이 특수한 수련 방식을 이용해 예전 동수를 되찾아 오고 보다 많은 세인들을 일깨워주기 바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