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니(康妮)
【정견망】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다년간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뉴욕타임스가 션윈예술단, 에포크타임스 등 파룬궁 수련생들이 설립한 회사들에 대해 뜬금없이 사실을 날조한 보도를 연재하면서 리홍쯔 선생이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션윈(神韻) 기자는 수년 동안 리 선생님과 함께 일하거나 생활한 사람들을 인터뷰해 실상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한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중국 공산당은 1999년부터 파룬궁에 대한 전국적인 탄압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25년이 넘도록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직업과 재산, 자유, 심지어 목숨까지 잃고 생체 장기 적출을 당하는 등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부모가 파룬궁을 수련한 자녀들 중 고아가 된 이들도 많다. 해외로 망명한 파룬궁 수련생, 특히 고아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기 위해 북미 파룬궁 수련생들은 2001년 맨해튼에서 북서쪽으로 80마일 이상 떨어진 황량한 산에 파룬따파의 조정(朝廷)인 용천사(龍泉寺)를 직접 건설하기 시작했다.
용천사는 처음부터 종교 장소로 등록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페이톈(飛天) 예술대학, 페이톈 대학교, 션윈 예술단도 잇따라 이곳에 설립되었다. 그후 이곳은 일부 대법제자들이 거주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수련하는 장소가 되었다.
파룬따파 창시인이자 션윈예술단 예술감독인 리(李) 선생은 전 세계 대법제자들의 수련을 지도하고 예술 분야에서 션윈을 지도하는 외에 파룬궁 수련자들이 설립한 그 어떤 조직이나 항목에서도 행정적인 직무를 맡지 않았고, 일상적인 운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단 한 푼의 보수도 받지 않았다. 예술감독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션윈예술단도 리 선생은 전적으로 무보수로 봉사해 왔다.
용천사 책임자 조지 쉬는 “사부님은 집도 차도 없이 기숙사에서 생활하십니다. 사부님의 일상은 매우 소박하신데, 사부님 거처에는 책장을 제외하고는 벽면이 텅 비어 있습니다. 사부님은 그 어떤 대법 항목이나 조직으로부터 단 한 푼의 보수도 받지 않으시며, 대법 서적과 관련 지적 재산에 대한 저작권료가 유일한 생계 수단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또 말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사부님은 음식에 대한 요구가 아주 낮고 기본적으로 배만 부르면 됩니다. 원래는 늘 식당에서 모두 함께 식사를 하셨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사부님께서 모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에서 따로 식사를 하십니다. 션윈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는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식사 시간을 놓치실 때면 라면을 자주 드셨습니다. 요즘은 저녁에는 끓는 물에 밥을 말아 절인 야채를 조금 넣고 드시는 경우가 많고, 점심에는 보통 스튜를 드십니다. 사부님은 동북 지방 출신이라 동북 음식을 많이 드시는데, 여름에는 두부를 가장 많이 드시는데 거의 날마다 드십니다. 가끔 열정적인 수련생들이 과일이며 해산물 등을 드리면 모두 주방에 보내 수련생들을 위한 요리 메뉴에 추가하라고 하십니다.”
전에 용천사 책임자였던 량카이진(梁凱金)은 “용천사 건설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고생하셨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션윈 초창기도 그렇고 여러 방면의 예술에서 모두 사부님의 손길과 지도가 필요했을 때조차도 사부님께서는 틈만 나면 공사 현장에 나가 공사에 참여하셨고, 우리보다 앞장서서 힘든 육체노동을 많이 하셨죠. 지금 일흔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틈만 나면 육체노동을 하러 오십니다. 이 점은 건설 현장의 제자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조지가 보충해서 말했다.
“산 곳곳에서 많은 제자들이 사부님께서 브랜드는 따지지 않고 몸에 잘 맞기만 하면 입으시는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늘 카키색 바지를 입으셨죠. 나중에 션윈이 창단된 후 사부님은 모두에게 청바지를 주셨습니다. 사부님 당신도 청바지를 입으셨는데, 대부분 노티카나 에디 바우어 같은 유명 브랜드 청바지였습니다. 나중에 사부님께서 직접 바지를 디자인하고 재단사 수련생들이 더 잘 맞는 바지를 만드는 것을 도왔고, 신발도 모두 아주 평범한 가죽 신발을 신으셨습니다. 또 션윈 예술단에 지급된 유니폼도 입으셨죠.”
용천사 물자 보급을 맡았던 리잉(李瑛)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법 수련이 많은 수련생의 몸과 마음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수련생들은 모두 사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드리고 싶어 했지만, 사부님은 절대 비싼 물건은 받지 않으십니다. 일부 차나 음식 등 값비싼 선물이 아닌 경우 제자들의 성의를 고려해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끔 받으신 경우도 있지만,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수련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량 씨는 “사부님께선 자신은 소박하게 사시지만 제자들의 생활에는 관심이 크십니다. 또한 산에서 생활하는 제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고려해 특별히 제빵사를 고용해 양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조지는 “또한 학생들의 과외 활동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학교 활동 공간에 체육관, 탁구대, 당구대, 바둑이나 장기, 포커 등을 설치해 학생들이 늘 인터넷에 빠지는 대신 더 많은 운동을 하고 일부 전통적인 오락을 하도록 장려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보안팀의 스(施)는 “우리는 아주 외진 산간 지역에 살고 있는데, 고급 승용차나 요트 같은 사치품은커녕 사부님도 이곳에는 오락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이발도 산속에서 제자가 해줍니다. 사부님은 각 항목의 재정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사부님께서는 오로지 제자들의 수련에만 관심 갖고 많은 일은 제자들이 스스로 처리하게 하시는데, 잘할 수 있을 지 여부는 제자의 수련 과정입니다. 그래서 에포크타임스, 깐징월드 혹은 다른 어떤 항목에 대해서도 사부님은 일상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십니다. 가령, 에포크타임스가 설립된 지 20년이 넘지만 사부님께서는 단지 몇 차례만 가셨고, 가서 하신 말씀도 제자들의 수련과 반박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기간 션윈에 운영과 관리에 관여한 저우위(周豫)는 “우리가 매번 사부님을 뵐 때마다 늘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으셨지만 브랜드는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던 초기 중공은 사부님이 호화 저택과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고 선전했는데 지금 일부 서방 언론도 같은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제자로서 우리는 사부님께서 제자들과 중생을 위해 몇십 년 동안 수많은 고생을 겪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을 치르신 것을 직접 보고 느꼈으며, 자연히 선생님의 일상생활이 더 나아지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사실 사부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들을 그리 중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분은 물욕이 담담하고 항상 일정하신데 일부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날조한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라고 말했다.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