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1. 개인 수련과 조사정법의 관계
내가 깨달은 것은 개인 수련은 기초이고, 조사정법(助師正法)은 사명이며 현재의 ‘임무’다. 오늘 이 양자의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하나 떠올랐다. 구우주는 해체되고 있고, 중생이 미래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구세력의 존재와 그것의 배치에 있다. 현재는 정사대전(正邪大戰)인바 전장(戰場)이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다른 공간은 바로 전쟁터다. 그렇다면 조사정법(助師正法)이란 바로 우리가 전투에 참전해 사부님 휘하의 일원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인 수련은 자신의 체백(體魄 체력과 기백)과 수중에 든 무기다. 체백이 충분히 강하고, 무기가 충분히 날카로우며,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음은 수련 공부(工夫)의 체현이다. 그러면 당신은 전장에서 일당십(一當十 한 사람이 열 명의 적을 상대)이 되고 충분히 쓸 수 있는지, 아니면 들것이 필요하거나 또는 이미 퇴각했는가, 더 심한 자는 심지어 배반자가 되기도 한다. 당신이 어느 정도 사부님을 돕는가 하는 이것이 바로 수련과 조사(助師)의 관계다.
아마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나는 항목에서 대체 불가능하고 또 많은 일을 했다.” 사람 마음을 지니고 하는 것의 효과가 어떠한가? 우리는 진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가? 우리의 부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영원히 기연(機緣)을 잃었는가? 이런 것들조차 모른다면 우리는 자신을 평가할 수 없다. 진정한 제고는 내려놓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心性(씬씽)이 얼마만큼 높으면 공도 얼마만큼 높은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다.”(《전법륜》)
지금의 법난(法難)은 우리 정체(整體)가 사부님을 돕는 힘이 없고 구세력의 교란을 막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때문에 ‘원수(主帥 역주: 총사령관 즉 사부님을 지칭)’께서 번거로움에 봉착한 것이다. 제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 배반자가 된 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와 손실을 보충해야 하며, 퇴각한 이들은 가급적 빨리 돌아와 전투에 참여해야 하며, 들것에 실린 이들은 빨리 건강을 회복해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 또 이미 능력이 충분한 이들도 다시 일어나 더욱 정진해서 돕는 힘을 늘려 일당십으로 계속 용맹하게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지만, 단지 형세가 더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 가지 일을 하는데 두 배로 노력해야 하며, 더 잘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동수들이 발정념을 강조하는 동시에 또 늘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며,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단지 사부님께서 더 많은 감당을 하실 때, 당신은 정말 조금도 조급하지 않은가? 정말로 발정념을 조금 더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마음이 물처럼 고요한가? 정념(正念)이 정말로 이만큼에 불과한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살인 방화하는 것마저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상관할 것인가?”(《전법륜》)
2. 구세력을 철저히 부정
구세력의 존재야말로 현재 거난(巨難)의 근본 원인이므로 당연히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 위에서 아래까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일체 생명과 배치[반(盤)]을 근절하고, 그것들의 인간 세상에 있는 모든 도구, 즉 사람들 중의 쓰레기를 깨끗이 청리하고, 우주의 청명(淸明)을 회복해야 한다. 우주 중생은 이미 아주 많이 도태되었고, 사부님께서 감당하신 것도 너무 많으며, 대법제자들도 손실이 너무 많다.(법난을 잘 걷지 못했기 때문) 이 모든 것은 이미 그것(그)들이 갚을 수 없는 업력이니 반드시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을 수호하고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부터 장래에 반드시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이는 대법제자로서 우리가 미룰 수 없는 의무이자 사명이다.
사부님의 감당은 자비(慈悲)지만, 그렇다고 이를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제자로서 이 점을 심각하고 똑똑히 알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법난》에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구도 받는 세인은 역사상 남겨진 죄업 전부를 스스로 갚을 방법이 없으므로 신(神)이 사람에게 일부분을 선해(善解)해 줘야 하고, 그 자신이 일부분을 없애도록 하며, 사부인 나 또한 사람을 대신해 일부분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구하는 생명이 많을수록 사부가 감당하는 것도 더욱 커진다.”
“이것은 중생구도 20여 년간 남겨진 것으로”
내가 이해하기에 이 15%의 업력은 우리 자신과 자기 세계 중생의 업력이다. 우리 세계 중생의 업력조차 사부님께서 감당하셨는데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가?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어떻게 분담하는가? 언제 분담할 것인가? 아마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자신이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려해 보자. 사부님 문하에서 철이 든 제자가 되자.
3. 일사일념(一思一念)을 잘 닦자
만약 우리 모두 성숙했다면, 그럼 이렇게 큰 난은 없을 것이다. 결론은 정체적으로 잘 수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락이 있고 아울러 아주 크기 때문에 비로소 사부님께서 이렇게 감당하시게 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시각각 일사일념에서 늘 법으로 걸러내고, 바르지 못한 것을 즉시 바로잡을 수 있다면, 수련 중에 또 얼마나 많은 집착심과 생각(思念)이 있겠는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가? 이상적인 상황에서 하루에 얼마나 많은 집착을 버릴 수 있는가?
정법시기에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아주 많은 요소를 제거해 주셨고, 우리 자신이 넘어야 할 관(關)을 남겨주셨는데 아마 모두 ‘주요 모순’일 것이다. 국내 제자들은 모두 깊은 체회(體會)가 있는데 일단 생사를 내려놓으면 아주 많은 집착심도 아주 빨리 바로잡힌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는 우리 자신이 집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해 주셨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생사관(生死關)은 주로 명, 리, 정(情), 색(色), 욕(慾), 사(私), 자아(自我) 등의 큰 방면에 반영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더욱 보편적인 것은 ‘사(私)’와 ‘자아’다. 사심(私心)이 너무 무거우면 수련인의 자비를 보기 어렵고, 일에 부딪혔을 때 우선 자신의 득실과 감수를 생각하게 된다. ‘자아’를 제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타후아(先他後我)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동수들 사이에 모순이 더 두드러지게 한다.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가급적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화제를 교류하지 않고 모순을 피하려 하는데 이러면 수련할 수 있겠는가?
무조건 안으로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단지 자신의 수련 시간을 늦출 뿐이며, 최후에 성취하는 과위(果位)는 자신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각지 설법 2》 〈2002년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항목에서 명예를 얻고 이익을 얻고 자아의 만족을 얻고, 다른 사람들의 소위 ‘존중’을 얻고 지질투심의 만족을 얻거나 또는 순간의 안일을 얻고 논쟁에서 승리를 얻는 등등. 하지만 잃는 것은 아마 층차를 제고할 기회일 것이며 최후에 잃는 것은 아마 과위일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란 제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서, 매 학습반마다 언제나 100분의 5, 100분의 10의 사람이 따라오지 못한다. 사람마다 모두 도를 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연마(煉)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여전히 당신이 수련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고, 또한 당신이 결심하고 수련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사람마다 성불(成佛)한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전법륜》)
자신의 일사일념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으면 정말 안 된다.
4. 당문화
해외 일부 지역에는 또 이런 현상이 존재하는데, 책임자가 일시적으로 바쁘거나 상태가 나빠서 이 일을 책임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개입할 수 없고, 자신의 제안을 내거나 또는 항목의 전개와 소통에 더 유리한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번거로움’이 생긴다. 누구도 감히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수련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인가? 이는 속인 중의 상하(上下)관계가 아닌가? 협조에 문제가 없다면, 누락을 보완하는데 할 수 없는 말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당 문화 사유는 오히려 많은 항목이 정체되거나 흐지부지한 상태가 되게 만들거나 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감히 채용하려 하지 않는데, ‘선을 넘을까’ 두려워한다.
또 이런 현상도 있는데 진짜로 사람이 부족한 항목임에도 적당한 사람을 찾기 어렵고 정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런 누락이 크지 않단 말인가? 또 어떤 새로운 책임자는 남에게 죄를 지을까 두려워 책임지지 않고 방임한다. 마치 수련에 선후(先后)가 있는 것처럼 오래된 사람이 권위를 갖는데 이는 진수(真修)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실수할까 봐 두렵고 번거로움이 두려워 가급적 일을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다. 자신이 적게 하고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이 하는 것도 가로막는데 이런 협조인도 있다. 이는 사부님을 돕는 것인가 아니면 부면(負面) 작용을 하는 것인가?
5. 자비를 닦아냄
속인 회사에서도 수양이 잘된 선배들은 여전히 겸손하고 온화하다. 하지만 대법제자 단체에서, 특히 협조인 중에서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겸손하고 온화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慈悲(츠뻬이)하게 할 수 있고, 누구에게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것은 정말로 일반인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특히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중생에게 慈悲(츠뻬이)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대법도(大法徒)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각성하라》).
사부님께서는 《각성하라》 경문에서 “자비”를 여섯 차례나 언급하셨다. 자비의 표현 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겸손하고 온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공부에 불과할 뿐이며 내심의 자비야말로 진짜 자비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람됨이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法輪功(파룬궁)은 선량한 마음이 아주 빨리 생긴다. 많은 사람들이 연공하려고 거기에 척 앉기만 하면 까닭 없이 눈물이 나고 무엇을 생각해도 모두 마음이 쓰리며, 누구나 다 고생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慈悲心(츠뻬이씬)이 생긴 것으로, 당신의 천성과 진정한 자아가 우주의 특성인 ‘真(쩐)·善(싼)·忍(런)’과 서로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에게 그 선량한 마음이 생길 때 당신은 일을 아주 착하게 할 것이다. 당신의 내심에서 외면에 이르기까지, 언뜻 보아도 아주 선량해 보이는데, 그때는 누구도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가서 누가 정말 당신을 괴롭히더라도 당신의 그 크나큰 慈悲心(츠뻬이씬)이 작용하여 당신은 되받아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속인과 같지 않도록 해 주는 힘이기도 하다.”(《파룬궁》)
우리가 한번 대조해 보면, 정말로 몹시 부끄럽다.
6. 색욕심에 관해
며칠 전 어떤 동수가 명혜망 《다른 공간에서 본 뉴욕 에포크타임스 두 사무실 현황》에서 나온 문장을 말했다.
“매 한 흑색세력(너무 사악하고 나의 층차도 제한됐기 때문에 형상은 볼 수 없었음)이 파이프 하나씩 들고 사무실에 검고 끈적끈적한 검은 기를 주입하고 있었다. 아직은 액체가 아니었다. 만약 액체를 주입한다면 매우 매우 사악한 것이다.”
이 구절을 봤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이렇다. 검은 액체는 더 더러운 색욕의 물질이다. 최근 들어 많은 동수가 가부좌나 꿈속에서 색욕과 관련된 물질이 정체(整體)에서 파괴 작용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구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수련인을 교란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다.(물론 우리는 구세력을 인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구세력의 독약은 곧 독이고 어떤 것이 더 독한지는 그것들이 더 잘 안다) 현재, 많은 팀에서 젊은 동수들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 방면에서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하며, 아무런 유보조건 없이 자신의 색욕심을 깨끗이 정화하도록 일깨워줄 수 있어야 한다.
7. 노제자 협조인
법난은 1999년 7월 20일부터 인간 세상에 나타났고, 지금까지 이미 25년이 되었다. 초기에 법을 얻은 제자들은 노제자나 협조인으로서,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고 아주 대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람의 미혹 속에서 또 어떤 이는 ‘관료주의’와 ‘자아’ 등의 집착이 생겼고 또는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그런 집착을 안고 있는 사람도 있다. 동수들 사이에 서로를 업신여기고, 서로 싫어하며, 불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원만(圓滿)하려는 제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니다. 이런 사람 마음을 지니면 사람을 구하는데 방해가 되며 사람을 구하는 힘을 크게 떨어뜨린다.
어떤 동수는 교류 중에 두 가지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첫 번째 장면은 지상에서 대부분 두 손이 뻗쳐 나와 사부님께 구해주실 것을 요청했다. 사부님께서는 단호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셨다. 두 번째 장면은 몇 개 단어와 유사한데 “2025년 9월, 10월, 노제자, 협조인”이었다.
다시 우리의 정체 상태를 돌이켜보면, 마음이 떨지 않을 수 없다! 동수들이여, 정진합시다!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무조건 안으로 찾아 법에 동화해야 하며, 더 빠른 지름길은 없다.
결론
동수들 중에 각종 상태가 다 있고, 이는 또한 전장(戰場)에 어떤 사람이든 다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번 전장이 순조로울지 여부는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다. 개체로서 매 한 동수는 정말로 자신이 요구에 부합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하며, 어떻게 잘하고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은 아주 엄숙하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문제다!
당신이 협조인이고 책임이 더 클수록 당신은 솔선수범해서 자신을 잘 수련해 사부님의 제자들을 이끌어야 한다. 어쩌면 시간이 정말 많지 않을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대뉴욕지역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부가 늘 慈悲(츠뻬이)하다고만 생각하지 말라. 당신들은 사부의 慈悲(츠뻬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대법제자는 표준이 있으며 법 역시 표준이 있다.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그럭저럭 지내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 한 사람의 심령이 모두 건드려지고 있고, 매 한 사람이 모두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하고 있으며, 매 한 사람이 모두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생각하고 있다! 당신들 일부 사람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사부는 당신을 보면 정말로 조급하다! 사부는 당신을 보면 정말로 조급하다! 사부가 오늘 이 몇 마디 말을 심하게 했다고만 보지 말라. 아마 내가 큰 망치를 쓰지 않는다면 이미 안 될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유감이다. 당신이 나처럼 이렇게 조급했으면 좋겠다.”
“사부의 慈悲(츠뻬이)를 갖고 장난하지 말라. 법은 표준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성합시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