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불가 이야기 – 지초화상(志超和尚)

불가 이야기 – 지초화상(志超和尚)

작가 : 대륙 대법제자

[정견만 2007년 12월 15일]

지초화상은 남북조시대 섬서 풍익 전(田)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전선우(田善友)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일심으로 부처님을 믿어 식구들에게 불문에 귀의하겠다고 했으나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몰래 그를 위해 혼사를 준비했다. 지초가 이 말을 듣고는 곧 산으로 도망갔다. 가족들은 전부 그를 찾으러 나섰고 그는 숨을 수 없어 강제로 집으로 끌려와 혼례를 거행했다.

신혼초야에 신혼방에서 지초는 엄숙하게 신부에게 불법(佛法)을 알렸다. 신부는 신랑의 불법(佛法)에 대한 일편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이후 지초와 서로 떨어져 살기로 동의하며 이름만 부부로 하여 부부의 결실이 없었다. 매일 밤 지초는 늘 선정(禪定)에 들었다. 27세 되는 날 지초는 마침내 출가했으며 병주(산서태원) 개화사 혜찬선사 문하에 들어갔다.

처음에 혜찬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절에서 각종 잡일을 하게하여 그를 고험했다. 지초는 이에 대해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 일을 하고 밤이 되면 매우 늦게 잠이 들었다. 절에는 스님과 신도가 수백 명이 있었다. 매번 가장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지초는 반드시 도맡아서 했다. 혜찬은 이런 시험을 통해 지초는 매우 규율에 엄격하고 지혜가 있으면서도 고생을 겪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비로소 지초를 제자로 거두었다.

계를 받은 후 지초는 불경을 매우 잘 배웠으며 나중에 고향에 돌아와 산을 찾아 고향에서 계속 수련했다. 지초는 산속에서 선림(禅林)을 만들어 아침부터 밤까지 힘들게 수련했다. 사람이 반듯하고 뛰어니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다.

수 대업(수양제 연호) 초년에 수양제는 영을 내려 절을 닫게 하고 승려들이 무리를 지어 여행다니는 것을 금지했다. 지초는 이를 듣고 매우 조급해 의연히 불교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초는 가사를 입고 군성을 방문하여 집행하는 관리를 만나 그의 의견을 상소하려고 했다.(현재 중국 대륙의 통속적인 말로하면 이것은 지초가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상방한 것이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에 대해 본체만체 했다. 비록 지초가 법을 보호하려는 길은 층층이 벽에 부딪혔지만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단숨에 강도로 뛰어가 그의 의견을 수양제의 내시에게 전하여 그가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수나라 말년에 전란이 분분히 일어나 도적이 횡행하고 민중에는 난이 많았으며 백성들의 시체는 들에 널려 있었다. 이 때 지초는 사람들을 모아 불법을 공부했다. 그들의 주위에는 또 일부 남은 양식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도적이 빼앗아갈까 두려워 양식을 가지고 각자 흩어지려고 했다. 지초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며 수련은 중도에 그만두면 안 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불법을 수련했다.

어느 날 밤 지초와 사람들이 정좌하고 있을 때 돌연 하늘로부터 불꽃이 충천하더니 도적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는데, 그들의 손에는 모두 번쩍이는 칼을 들고 있었다. 지초와 사람들은 단좌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며 한 사람도 이에 대해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적은 사람들이 침착한데 감화되어 엎드려 절을 하며 사죄했고 지초에게 귀의했다. 지초는 사람들의 사정에 따라 잘 인도하여 각자의 자질에 따라 법으로 교화했다. 도적들은 내심 감복하여 일심으로 부처님을 향하고 부지런히 불법을 닦아 자기 지난날의 죄업을 갚았다.

당 고조 이연이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전국 여기저기에서 호응이 있었다. 지초는 백성을 구조하려고 고조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옹호했다. 지초는 승려를 이끌고 진양으로 가서 법을 폈으며 그에게 불법을 배우러 온 제자는 수백 명에 달했다. 사람들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질서를 지켜 세인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으며 당시 사회질서를 유력하게 안정하게 하는데 공헌했다.

나중에 당나라 대군이 남쪽의 내란을 평정한 후 국내는 평안했다. 지초는 제자 20여 명을 데리고 경성에 가서 축하했다. 당고조 이연은 지초를 존경하여 신선을 대하듯이 대했으며 태극전에 오르라고 청하며 예를 더했다.

지초는 부귀안일을 탐하지 않았으며 황상과 대신들과 이별하고 또 진주(산서)에 도착하여 그 지방에서 수련하기 좋은 거처를 선택하려고 했다.

당 무덕(고조 이연의 연호) 5년에 지초는 전전하다가 지금의 계휴시 서남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금산에 도착했다. 산봉우리의 이름은 포복이라고 했는데 인근에서 유명했다. 이 산봉우리에 절벽이 있었는데 백장이나 깊은 계곡이 있었고 위에는 천길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이곳은 물이 맑고 바위가 수려하며 숲이 깊고 바람이 고른 것이 선경(仙境) 같았다. 이곳에 거주하면 봉우리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무덕 7년, 지초는 사람을 데리고 포복암 위에서 수련했다. 당시 제자가 거의 백 명이었다. 그들의 모든 식량은 불과 6석의 보리 뿐이었다. 처음에는 매일 5말씩 먹어, 봄부터 여름까지 보리를 많이 먹어 없어졌다. 나중에 매일 두 말만 먹었다. 그러나 보리는 다 없어지지 않아 뭇사람들은 신기하게 느꼈다. 지초의 제자 중에 심성이 나태하고 안일을 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즉시 그의 신기한 경고를 들었다. 지초가 사람들을 모이게 하면 종소리가 따라서 바로 울렸다. 산 위 바위에서 나는 샘물은 사람의 숫자에 따라 저절로 늘거나 줄었다.

지초는 일생 매우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는데, 여기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을 소개한다. 정관(당태종의 연호) 14년(640년) 협중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개휴 경내에만 비바람이 순조로와 사람들은 모두 지초화상 때문에 개휴는 재난을 면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태종 이세민은 금산을 향해 비를 구했으며 지초는 밥을 먹던 제자 막사에게 명하여 쌀뜨물을 서남방향으로 뿜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안 일대에 단비가 내리고 가뭄이 해소되어 만민이 기뻐하며 지초에게 감사하였다. 지초화상은 “금산활불”이라고 불렸다.

가뭄이 해갈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초는 절에서 심한 병에 걸렸는데, 그는 수명이 곧 끝날 것을 미리 알고 더욱 분투하여 수련했다. 정관 15년(서기 641년) 3월 11일 지초는 원적했으니, 향년 71세였다.

지초가 원적한 후 얼마 안 되어 당태종이 군신들을 이끌고 금산에 가서 지초화상을 만나려고 했다. 지초의 제자 은공은 포복암에서 어가를 맞이하면서 사부는 이미 원적하여 돌아갔다고 했다. 태종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상심하여 하늘에 긴 탄식을 했다. “이번 행차는 공염불(空望佛)이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공왕고불(空王古佛)(주1)”이라는 네 글자와 지초화상의 윤곽이 나타났고 이 때문에 태종은 지초화상을 “공왕불(空王佛)”에 봉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운봉사를 짓게 했다. 태종 일행은 순행을 마치고 공산 영계사로 돌아와 사원의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드는 것을 보고 즉시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순행 후 복지로 유람하니
눈에 무척 아름답고 새벽 향기가 노니는구나
보배로운 사찰 멀리 이슬을 받드니 하늘 꽃이 봄에 가까이 오네
범종이 두 시를 알리니 법의 날이 쌍 바퀴를 돌리는도다
적막한 그대 선경에 드니 속세에 초연하구나

태종이 순행에서 영계사에 돌아와 여기에서 6일을 머물렀다. 그래서 이절을 후에 회란사(回銮寺)라고 고쳐 부르고 아울러 절 옆에 용천묘를 지어 기념하였다.

지초화상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300여 년인데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지금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지초화상의 신상에서는 그의 불법에 대한 경건함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불법에 난이 있을 때 걸어나왔음을 볼 수 있으며 서약을 버리지 않고 불법을 수호하는 장거를 볼 수 있고 생명의 위험을 당해 생사를 내려놓고 일심으로 수련하는 사적을 볼 수 있다. 당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의 불법과 수련인에 대한 존경 역시 사람을 탄복케 한다. 개국군주로서 부끄럽지 않은 일대의 성주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오늘을 되돌아보면 중국대륙 공산당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와 파룬궁 수련생이 대법을 수호하러 걸어나오는 장거와 같음을 보게 된다. 또한 파룬궁 수련생의 선량함을 박해함에 있어서 사악한 정도를 보면 공산당은 당시 수양제보다 악하기가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

수양제는 나중에 자신도 죽고 나라도 멸망했다. 공산당의 최후의 결말은 수양제의 비참함보다 몇 배나 될지 모른다. 공산당과 함께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공산사당과 기타 조직을 퇴출하는 한 갈래 길밖에 없다.

주1) 공왕불 – 불교의 말. 과거 천세불 중의 하나. “법화경 – 수학무학인기품”에 “모든 선남자여, 나와 아난 등은 공왕불의 거소에서 동시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고 되어 있다.

(자료출처 – 역대 고승전)

발표시간 : 2007년 12월 15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2/15/498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