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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이백의 권고 《내일대난(來日大難)》

천청(泉清)

【정견망】

“이백의 시는 무적(無敵)으로 표연(飄然)한 사상이 독특하다.”

이것은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가 이백을 평가한 말이다.

애석한 것은 현대인들은 아마 거의 이백 시가 “무적”을 말하면서도 그의 “표연”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백 시에 담긴 신선에 대한 의도를 낭만이나 과장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이백의 수많은 유선시(遊仙詩)들은 이백이 신선 세계의 허망함을 비판한 것이라고까지 해석하는데, 이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사실 이백이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무궁한 재능이 신선과 같다고 찬탄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선(神仙)과 대도(大道)를 추구하는 그의 경건함을 인정한 것이다. 그의 표일(飄逸)한 시풍(詩風)은 그가 도(道)를 수련한 후 세간의 명예와 이익을 담담히 보게 된 진실한 내심의 경지를 정확히 반영한다. 이 점을 깨닫고 나서, 다시 이백의 작품을 감상할 때라야,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내일대난(來日大難)》

지난날 홀로 식량 들고 땔감 지고
갈 길은 먼데 양식 떨어져 입은 쓰고 입술 탔네
오늘 실컷 먹고 마시니 그 즐거움 천 번의 봄보다 낫네
신선이 찾아와 멀리 배우러 가자 권하니
바다로는 삼산(三山)을 넘고 땅에서는 오악(五嶽)에 쉬며
용을 타고 하늘을 날며 두 뿔을 보네
선약을 내게 주시니 금단이 손에 가득하네
매미가 은혜 입어 단명함을 한탄하고
동해를 메우고자 하나 나무 하나 문 격일세
도는 천지보다 중하니 황제는 광성자를 사부로 모시고
제위를 가볍게 내던지고 장생을 구했다네
하사(下士)들 큰 웃음소리 쉬파리 소리와 같았다네

來日一身,攜糧負薪。
道長食盡,苦口焦唇。
今日醉飽,樂過千春。
仙人相存,誘我遠學。
海凌三山,陸憩五嶽。
乘龍天飛,目瞻兩角。
授以仙藥,金丹滿握。
蟪蛄蒙恩,深愧短促。
思填東海,強銜一木。
道重天地,軒師廣成。
蟬翼九五,以求長生。
下士大笑,如蒼蠅聲。

이 시는 전형적인 유선시(遊仙詩)로, 사람들에게 도를 닦도록 권유하는 이백의 진심이 담겨 있다. 제목 또한 아주 흥미로운데 “내일대난”이란 이백이 “제목을 빌려 설파하는” 것으로, 세인들에게 도를 닦지 않으면 “대난(大難)”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체 시에는 층차를 명확히 구별한다. 속인의 각도에서 시작해 “내”가 신선의 인도를 받아 도를 닦고 도를 얻는 과정을 개괄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평범한 사람들(즉 하사)의 관점으로 되돌려 구성이 마치 하나의 원과 같아 사람들에게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지난날 홀로 식량 들고 땔감 지고
갈 길은 먼데 양식 떨어져 입은 쓰고 입술 탔네
오늘 실컷 먹고 마시니 그 즐거움 천 번의 봄보다 낫네”

처음 6구절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속인의 현실 생활을 적었다. 다시 말해 그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무슨 목표나 희망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실컷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천 번의 봄보다 낫다”며 만족감을 느끼기 쉽다.

[역주: 천 번의 봄이란 수련에 성취를 이뤄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삶을 의미한다.]

“신선이 찾아와 멀리 배우러 가자 권하니
바다로는 삼산(三山)을 넘고 땅에서는 오악(五嶽)에 쉬며”

다행히도 나는 기연(機緣)이 맞아떨어져 선인(仙人)을 만났으니 그가 대도(大道)를 전하고 수련을 가르쳐 주었으며 아울러 세간에서 행각하며 단련하게 했다.

이백 많은 유선시를 썼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과장이나 상상이라 여긴다. 그러나 사실 이백은 평생 신선을 추구하며 도(道)를 찾아다녔다. 바로 그가 말했듯이, “나는 오악(五嶽)의 선인(仙人)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평생 명산(名山)에 노닐었다.”

이백은 사실 자신의 시 여러 곳에서 신선을 만난 경험을 언급했다.

“그 가운데 머리 푸른 노인이
구름 헤치고 눈 쌓인 솔 밑에 누워
웃지도 않고 말도 없이
바위 굴에 숨어 사노라
내가 와서 진인을 뵙고
무릎꿇고 보결을 여쭈니
하얀 이 찬연히 드러내며
약을 단련하는 법 전수해주셨네

中有綠髮翁
披雲臥松雪
不笑亦不語
冥棲在岩穴
我來逢真人
長跪問寶訣
粲然啟玉齒
授以煉藥說”

(《고풍(古風)》 5)

즉 이백이 일찍이 푸른 머리의 신선을 만나 단약을 만드는 비법을 전수 받았다.

이백은 또한 신선 안기공도 만났다.

“객 중에 학을 탄 신선이 있어
훨훨 날아 태청 위로 솟구치더니,
푸른 구름 속에서 소리치기를
자기 이름이 안기(安期)라 하더라.

五鶴西北來
飛飛凌太清
仙人綠雲上
自道安期名”

(《고풍》 7수)

이백은 또 수련 성취한 후 화산 선녀과 함께 선계(仙界)로 놀러가 선인 위숙경을 배알했다.

“서쪽 연화산에 올라
저 멀리 샛별선녀(화산 선녀)를 본다.
하얀 손에 부용을 들고
허공을 걸어가며 태청(太淸)을 즈려밟누나.
무지개 옷에 너른 띠 끌며
훨훨 몸을 날려 하늘로 올라가누나.
나를 맞이해 운대에 올라서는
위숙경(衛叔卿)께 공손히 읍하도다.”

西上蓮花山,迢迢見明星。
素手把芙蓉,虛步躡太清。
霓裳曳廣帶,飄拂升天行。
邀我登雲台,高揖衛叔卿

(《고풍》 19수)

그 후 이백은 제남(濟南)에 가서 화부주봉을 올라가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만난다. 적송자는 시인에게 흰 사슴 한 마리를 빌려주었다. 시인은 적송자와 함께 선경(仙境)에서 노닐었다.

“전에 제(齊)나라 도읍에서 노닐 적에
화부주(華不注) 봉우리에 올랐었네.
이 산은 어이 그리 뾰족하던지
짙푸른 모양이 연꽃 같았네.
사뿐히 날아온 옛 신선이
알고 보니 바로 적송자였네.
내게 흰 사슴 한 마리 빌려주고
자신은 두 마리 청룡을 양편에 거느렸네.”

昔我游齊都,登華不注峰。
茲山何峻秀,綠翠如芙蓉。
蕭颯古仙人,了知是赤松。
借予一白鹿,自挾兩青龍。

(《고풍》 20수)

신선을 찾음은 바로 도(道)를 구하는 것이니, 이백의 일생은 확실히 마난이 첩첩한 수련의 일생이었다. 이백은 비록 뛰어난 문학적인 재능으로 천하에 유명했지만, 상인의 후예라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고 그저 각지의 왕공 귀족들만 찾아다녔다. “하늘이 나를 낳으심에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음에도, 연거푸 좌절을 겪으며 조롱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기러기 털처럼 업십여기네”(《양보음(梁甫吟)》), “내가 큰소리 친다며 모두 비웃었네”(《이옹께 바침》).

우여곡절 끝에 현종 황제의 인정을 받았지만 또한 너무 뛰어난 재능 때문에 여러 차례 배척당했고, 결국 현종 황제는 그에게 황금을 주며 돌아가게 했다. 그 후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크게 어지럽자 이백은 창생(蒼生)을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출산했지만 실수로 이린 사건에 연루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

사람들은 줄곧 수련에 대해 한 가지 오해가 있다. 즉 수련이란 단지 가부좌나 연단(煉丹), 또는 청등고불(青燈古佛 역주: 홍루몽에서 연유한 말로 고독하고 적막한 수련인의 삶을 표현)과 함께하는 것이라 여긴다. 사실 진정한 수련이란 마음을 닦는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행각을 말하고, 불가(佛家)에서도 탁발을 나가야 하는데 즉, 고생을 통해 사람의 심성을 단련하라는 것이다.

이백은 삶의 시련에 대해 분명 수련자의 담담함을 지니고 있었다. 좌절할 때면 “언젠가는 바람과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갈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또 야랑(夜郞) 유배길에 “강 양쪽엔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고 가벼운 배는 이미 첩첩 산을 지났네.”라고 노래했다.

이백은 비록 공업(功業)은 이루고 싶어 했지만, 명리(名利)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살아있을 때 한 잔의 술이라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에 천년의 명성을 바라겠는가”(《행로난》 3수)

이런 경지의 이백에게 “용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 그저 그의 환상이겠는가? 바로 그의 수련 경지를 진정으로 반영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백은 여전히 인간 세상에서 아직 완수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어 세간의 미혹을 타파하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그는 《호주 가섭사마가 이백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 것에 답하다(答湖州迦葉司馬問白是何人)》에서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청련거사는 귀양 온 신선인데
술집에 이름 깔은 지 어언 30년.
호주거사여 어찌 꼭 물어봐야 하오
금속여래가 후신이라네.

青蓮居士謫仙人,酒肆藏名三十春。
湖州司馬何須問,金粟如來是後身。”

하지만 이러한 대답이 오히려 대다수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후세 사람들은 이백을 “낭만주의” 시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사실 이백의 수련 경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럴듯하게 둘러댄 말이다.

사실 이백은 “선약을 내게 주시니 금단이 손에 가득” 했으니 이미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매미가 은혜 입어 단명함을 한탄하고 동해를 메우고자 하나 나무 하나 문 격일세”라고 했다. 이백은 신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은혜에 보답하기는 진실로 어렵다고 했다. 이는 수련자가 사부의 은혜에 감사하는 심태와 같다. 사부님이 대도를 전수하지 않았다면 이백이 어떻게 “내일대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백의 수도(修道)하려는 마음은 반석처럼 굳건했지만, 세인들은 오히려 미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또 이렇게 권고한다.

“도는 천지보다 중하니 황제는 광성자를 사부로 모시고 제위를 가볍게 내던지고 장생을 구했다네”

천지(天地)에서 도(道)가 가장 중요하기에 황제(黃帝)는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물었다. 그는 대도를 구하기 위해 제위를 매미 날개보다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하사”들은 오히려 그런 수도자들을 크게 비웃으며, 수련이나 장생은 다 물속에서 달을 낚고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것과 같고, 오히려 물질 이익만이 가장 실속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조대나 늘 이런 “하사”가 있었고, 현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더욱 많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 피동적으로 “무신론”을 지지하고, “진화론”을 강요하며 자신을 봉폐시킨다. 수련, 특이공능, 기적 등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비웃거나 조롱한다. 여태껏 사람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오늘 취해 배불리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대난이 언제 올지”는 관심이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천 년 전 시선(詩仙)이 남긴 조언은 지금 들어도 여전히 귀가 번쩍 뜨인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97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