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수련의 길에서 적막(寂寞)이란 참으로 큰 관(關)이다. 이전에 나는 줄곧 이 관이 너무 크다고 여겼고 적막을 마주해 너무 어려워서 감히 마주할 엄두도 못 냈기에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법을 외우자, 사부님의 여러 차례 점오(點悟)하에 ‘적막’이란 이 법리(法理)에 대해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써내어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나는 수련의 길에서 27년간 고난의 세월을 지나왔다. 일찍이 대법 수련에서 법리를 명백히 알고 난 기쁨, 심성관(心性關)을 넘길 때의 고통, 사람을 구하며 중생이 구도 받을 때 느낀 자랑스런 희열, 그리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도하는 과정에서 사악이 틈을 타 박해당한 눈물을 겪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지난 수년 동안 풀리지 않는 한 가지 곤혹스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기나긴 수련의 여정에서 이 길은 대체 얼마나 긴 것인가? 이번 박해는 대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이 문제가 줄곧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2019년부터 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점화해 주셨다. 나중에, 사부님의 각지 설법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미혹을 해결할 수 있었다. 자비하신 사존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나는 줄곧 이야기하는데, 나는 수련에서 사실 가장 고달픈 것은 (사부님 웃으심) 바로 기나긴 세월이라고 말하는데, 마련(魔煉) 중의 그 기나긴 세월이다. 끝을 볼 수 없고, 최후의 그 날을 볼 수 없는바, (사부님 웃으심) 사실 이것이 가장 고달프다.”(《각지 설법 15》 〈2018년 워싱턴DC 설법〉)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수련한 시간이 길다고 해서 나태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고, 설법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우리를 일깨워주셨다. 만약 정진하는 동수라면 절대 수련한 세월이 그리 길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며,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바꿔오신 사람을 구하는 이 시간이 아주 소중하다고 여기면서, 시간을 다그쳐 사람을 구하고 사람을 많이 구할 것이다. 그런데 왜 ‘적막’을 느끼는가? 이는 정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적막’을 두려워하는 사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수련이라, 가장 어려운 것은 단지 고생뿐만이 아니다. 고생을 좀 하는 것은 아주 빨리 지나갈 수 있고, 잘하지 못하면 지난 후에 바로 명백해진다. 가장 어려운 것은 가망이 없는 가운데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오히려 줄곧 정진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해내기가 가장 어렵다.”(《각지 설법 9》 〈엔티디(NTD) 방송토론회설법〉)
사부님께서 보시기에 희망이 없는 가운데 수련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셨지만, 정진하는 동수들은 줄곧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진하는 그런 동수들이 보기에는 어렵지 않은데 그들은 희망이 없는 가운데서 수련의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황금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 더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을 구도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적막’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고생을 겪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아직 결과에 집착하는 요소 있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은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사람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적막이다. 적막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고, 적막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일체를 잊어버리게 할 수 있으며, 적막은 심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언어를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데 또한 가장 두려운 고통 중 하나이다.”(《각지 설법 11》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그렇다, 사람이 수련하려면 고생을 겪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수련하지 않았다면 역시 속인처럼, 하루 종일 방탕하게 술이나 마시며 살거나, 마작이나 포커를 치거나, 속인처럼 방탕하고 음란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련인이고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있으니 마땅히 아주 신성(神聖)하고 즐거운 대단한 일이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왜 적막이란 사람 마음이 나왔을까? 이것은 적막을 두려워해서 온 것이 아닌가? 적막은 두려워할수록 나를 더욱 통제한다. 나는 마땅히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해 ‘적막’에서 걸어나와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2019년부터 일종의 ‘적막’이 분명히 나를 습격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고 그저 예전 친구들과 가족들이 점차 내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꼈다. 예전에는 자주 찾던 친구들이 이제는 내가 친구를 찾지도 않고, 친구들도 기본적으로 나와 연락하지 않는다. 일부 친척들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 이 때문에 나는 약간 당황하고 불안했다.
수련하는데 왜 이럴 수 있을까? 일 년 내내 찾아오는 친구와 가족이 너무 적다. 이건 전혀 과거의 나답지 않다.(수련하기 전에 나는 가족, 친구들과 아주 사이가 친밀했다) 왜 그럴까? 나는 종종 자신에게 반문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그들이 내게서 멀어졌을까?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차례 심성관에 부딪혔다. 때로 나는 자신이 수련인으로서 적막을 수련할 때가 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생각만 했을 뿐 그것을 이성적으로 인식하진 못했다.
2020년 팬데믹 이후 이런 인식이 더 심해졌다. 팬데믹 때문에 하나뿐인 딸조차 설날에 집에 오지 않았다. 설 연휴 동안 나와 남편만 있었는데, 조금 외로웠다. 나중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법을 공부했다.
“고생이라,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지나온 다음에는 명백해진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적막 속에서 묵묵히 수련하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수련이든 모두 이러한 고험을 겪게 되며, 모두 이러한 길을 걷게 마련이다.”(《각지 설법 9》 〈2009년 대뉴욕 국제법회설법〉)
문득 명백해졌고 나는 정말 명백해졌다. 이것은 수련인이 수련의 길에서 모두 반드시 이 난(難)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모두 이런 길을 걸어야 하고, 수련인은 또 반드시 이 단락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한다.
법리를 깨달은 후 나는 또 훨씬 편해졌다. 금세(今世)에 친척이나 친구들과 어떻게 왕래했든 모두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온 것이다. 내가 오직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그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면, 더 이상 그들과 억지로 왕래할 필요가 없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았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사부님 말씀에 따라 일체를 사람을 구하는 데 놓았고 적막 속에서 적막을 닦아 없앴다. 한 동안 시간이 지난 후 적막이란 사람 마음이 아주 담담해질 정도로 닦았고 그것은 이미 더는 나를 좌우지하지 못한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살핌에 감사드린다.
하지만 흔히 심령(心靈)을 건드리지 않으면 소용 없다. 고험은 흔히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일반적인 가족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마침 육친정[親情]을 제거할 큰 고험을 겪었다. 2002년 설 연휴 며칠 전, 큰오빠 회사 연회에서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바로 그날, 두 오빠와 새언니, 언니, 형부, 그리고 다른 친척들이 모두 나를 냉랭하게 대하고, 애정 어린 눈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어쩜 이럴 수 있는가? 이들이 정말 나의 진짜 형제자매란 말인가?’
집에 돌아온 후, 사부님의 점오(點悟)하에 나는 마침내 이해했다. 이는 가족의 정관(情關)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다시 한번 내게 사람 마음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동시에 이는 또 나더러 속인들 사이에서 적막을 견뎌내라는 것이 아닐까? 속인 사회에서 더는 그런 천륜(天倫)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 법리를 깨달은 후, 나는 훨씬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려놓지 못했던 사람 마음이 담담해졌다. 하나 하나의 사람 마음도 갈수록 담담해졌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 매 하나의 사람 마음은 모두 아주 완고한데, 특히 적막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그렇다. 그것을 완전히 없애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이 사람 마음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것을 보셨다. 2023년부터 내 수련 환경은 큰 변화를 겪었다. 남편이 5월에 병으로 쓰러지더니 10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나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또 오랫동안 따로 살던 딸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딸의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며, 하루 종일 바빴지만 어떻게든 버텨냈다. 하지만 흔히 문제는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내가 자식에 대한 정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구세력이 틈을 탔다. 그것들은 가족을 조종해, 비정상적으로 표현하게 했고 이를 이용해 나를 공격했다.
딸은 처음에 자주 나를 욕하고, 비난하고, 흠을 잡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비난했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최대한 참았고, 딸과 시비를 다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사부님 말씀처럼 심령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제고할 수 없다.
가정 환경과 분위기는 점점 더 나빠졌다. 예전에는 날 잘 대해주던 사위마저 점점 냉담해졌다. 특히 올봄부터는 전에 하던 출근 인사도 하지 않았고 퇴근하고 나서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부러 내가 보는 앞에서 딸이나 아이하고만 인사를 했다. 가끔 딸을 찾으러 가면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했다. 사위가 퇴근할 때 내가 “퇴근했는가?” 물으면 “네”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마치 못 들은 척했다. 사위가 이렇게 하자 조카도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방 안에 틀어박혀 가족들의 즐거운 대화와 웃음소리, 그리고 장난기 어린 놀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며칠 동안 집에서 몇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늘 차가운 말뿐이었다.
나는 심령이 흔들렸고 자신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떻게 된 걸까? 내가 마귀굴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묻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적막이 두려운가? 이야말로 적막을 닦아버릴 가장 좋은 환경이 아닌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주변 사람들이 연기하게 만들어 연화(演化)해주신 환경이 아닌가? 견딜 수 없는 적막만이 적막을 두려워하는 사람 마음을 닦아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수련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한 가지 고생이다. 이 고생을 겪을 수 없다면 내가 또 무엇을 수련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시 이렇게 냉담한 상황에 직면해도 마음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거듭 말씀드렸다.
“사부님, 제자는 적막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적막을 두려워하는 이 사람 마음을 닦아 버리겠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일념(一念)을 내보냈다.
“적막을 두려워하는 사람 마음을 멸(滅)한다.”
매일, 차가운 냉대에 직면해 나는 늘 발정념을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이런 냉담한 장면에 직면해서도 내 마음은 잔잔한 물처럼 고요했고, 작은 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너는 참 대단하다! 이 관(關)을 잘 헤쳐나왔다.”
드디어 나는 적막에서 벗어났다.
수련은 엄숙하면서도 신기했다. 내가 진정으로 이 사람 마음을 내려놓자 가족들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다시 연락을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다시 연락했을 때 나는 오히려 아주 큰 변화를 경험했다. 예전처럼 친근하고 인간적인 느낌은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진상을 더 깊이 알려 대법(大法)속에서 새롭게 거듭나기를 바랐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나는 대법에서 일부 새로운 진상 내용을 공유하고, 다양한 시기마다 진상 자료를 전해 주었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줄 호신부를 주었다. 그들의 대법에 대한 믿음은 더 강해졌고, 또한 많은 복보(福報)를 받았다. 우리 관계도 더욱 가까워졌다.
사실, 적막을 두려워하는 사람 마음을 내려놓자 나는 정말 좋다고 느꼈고 교란도 많이 줄어들었다. 스스로 더 많은 시간 차분한 마음으로 법 공부에 집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람을 구하는 세 가지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하셨으니 스스로 열심히 법 공부를 잘하고, 법에서 수련하고, 법에서 깨닫기만 하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다. 넘어가지 못할 어려움도 없다.
나는 지금 기본적으로 적막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주할 수 있으며, 저항하지 않는다. 나는 차분하고 착실하게 조금씩 닦아 나가고 조금씩 하고 있다. 적막이 기왕에 수련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관이자 걸어야 할 길이라면,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정시(正視)하고 담담하게 마주해야 한다. 나는 자신이 최후에 반드시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한 단락 법으로 여러분을 격려하고자 한다.
“희망이 없을 때일수록 희망은 바로 눈앞에 있을 것이다. 무료하게 느껴질수록 바로 당신의 위덕을 세우는 중일 것이다.”(《각지 설법 11》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최근 수련하면서 얻은 작은 체험이다. 법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감사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0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