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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작은 일들을 통해 속인 관념을 닦아 버리다

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명혜 사이트에서 수련의 근본 집착에 관한 문제를 읽고 나는 자신의 근본 집착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2》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적인 집착인가?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관념을 양성했으며, 관념에 이끌려 동경하는 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자신의 과학 관념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람 되는 도리에 부합한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치에 대한 불만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부패한 인류의 도덕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과 사부님이 바르다고 여기는 등등이다.”

나는 자신이 애초에 왜 대법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대조해 보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람 되는 도리에 부합한다고 여기며”라는 말씀이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수련하기 전에 나는 줄곧 사람은 선량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부님의 설법 영상을 보고 나서 대법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고 느꼈다. 특히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손해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니 설사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전해진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 누군가 우리에게 다단계에 참여하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가입하면 얻을 수 있는 온갖 혜택과 돈에 대해 이야기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큰 저택과 요트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은 오히려 이익의 유혹에 불과할 뿐이며 바르지 않다고 여겨 가입을 거부했다. 비교해 보면 파룬궁(法輪功)은 올바르고 사람이 되는 나의 원칙과 부합했기 때문에 배우기 시작했다.

다년간 나는 자신이 대법에 입문한 첫 동기가 매우 순수했다고 여겼다. 무슨 병을 치료하거나 무슨 공능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기공에 대한 인식도 전혀 없었다. 때문에 지금껏 “관념”이라는 이런 근본 집착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집에서 노인을 모시면서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대가 다르니 일처리 방식과 생활 습관에 큰 차이가 났다. 밤낮으로 함께 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모순이 더 많아졌다. 나는 왜 그런지, 아울러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겉보기에는 모두 아주 사소한 일들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물건을 특정한 자리에 놓고 손이 가는 대로 집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면 서랍을 다 뒤져야 한다. 찾는 과정에서 머리가 무겁고 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어머니는 내 생활 규칙을 아예 따르지 않으셨고 늘 당신 방식대로 행동하면서 내 말을 무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순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고정관념이 되었고, 어떤 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며, 집안의 최종 결정권은 내게 있다고 여겼다. 일단 이런 고정관념이 깨지거나 도전받으면 모순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직면해 내가 처음에 한 방법은 높은 자태로 남과 다른 식견을 보여주며 상대를 건드리지 않거나 회피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방법을 써서 모순이 생기는 것을 피했다. 표면적으로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수련하지 않았고, 심성도 제고되지 않았고, 관념도 개변하지 못했다. 사람의 방법으로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근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만약 모순 속에서 모순이 생긴 배후의 원인을 파고들어 법에서 인식하고, 그런 고유한 관념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수확이 있고 개변될 수 있고 제고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행동 방식과 일처리 방식 및 규칙이 있어서 습관을 형성한다. 또한 고유한 관념이 생기면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미 하나의 틀이 형성되면 사상 속에도 고정된 절차가 생기고 이를 개변하기란 아주 어려우며 또한 쉽게 발견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사람 속에서 다년간 사회 경험을 총괄하고 축적해서 내려온 것이다. 그것이 일정한 사회 환경에 부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법(法)에 부합하는가?

법은 부동한 층차의 중생에 대하여 부동한 요구가 있고, 이치는 끊임없이 승화한다. 한층 높은 층차에서 한층 낮은 층차의 이치를 보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높은 층차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 속에서 자신의 처세 이치를 고수하는 것은 줄곧 한 층차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제고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개변하려면 절차를 다시 쓰고 사유 방식을 바꿔야 한다.

반대로 상대방 입장에서 본다면 어머니는 당신이 한 일이 옳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늘 상대방을 바꾸려 하니 아무리 여러번 말해도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다른 사람을 바꾸려는 마음이고,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해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고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이러한 마음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과연 우리가 누구를 개변할 수 있는가? 문제는,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개변하려 하는가? 사람마다 다 각자 인생의 길이 있다. 수련인은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이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다 해도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강요이다. 심지어 우리가 홍법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을 뿐, 수련 여부는 사람 자신의 선택이며,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무루〉에서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법은 부동한 층차가 있으므로 법에 대한 수련자의 인식도 자신이 이 한 층까지 수련된 인식이며, 매 수련자의 법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도 매 사람이 있는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또 “부동한 층차의 수련자에 대해, 법은 그에 대해서도 부동한 층차의 요구가 존재한다.”라고 하셨다.

나는 오랫동안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람 되는 도리에 부합한다고 여기며”라는 사부님의 이 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 어찌 사람의 근본 집착이라 할 수 있을까? 명예, 이익, 재물,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적인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나는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면 받아들이고, 부합하지 않으면 배척하는 이것이 바로 사람의 근본 집착 중 하나다. 관념 자체도 변하는 것으로 부동한 시기, 부동한 단계, 부동한 각도에서 관념은 늘 바뀔 것이다. 그것은 우주 진리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북미 제1기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흔히 우리가 장기간 인류사회에서 생활하면서 양성한 각종 관념, 그것을 버리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동(不同)한 영역에 조예가 있어 어떤 성과를 거두게 되면, 그 성과를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당신은 속인 중에서 배운 그러한 소위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데, 흔히 이러한 것이 모두 일부분 사람을 저애하고 있다. 그리고 또 우리 많고 많은 사람에게는 속인사회 중에서 양성한 각종 습관이나 세력, 혹은 사람이 되는 그런 방식, 사람이 됨에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가장 첨예하고, 건드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관념을 내려놓고, 집착을 내려놓고, “집착을 남김없이 수련하면”(《홍음》 〈미혹속의 수련〉)은 우리가 원만하는 조건으로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우리가 매번 조금 내려놓을 때마다 사부님께서는 다른 공간에서 우리를 위해 업을 조금 없애주신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감사드립니다! 오직 정진만이 사부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최근의 수련 깨달음이니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