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
【정견망】
비록 우의 치수 이야기는 중국대륙에서 부녀자나 어린이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만, 구천(九川 모든 강)을 소통하고 구주(九州 모든 땅)를 개척하는 등의 공정이 매우 크고 어려웠기 때문에 실증 과학 추종자들은 ‘낙후된’ 고대에 우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지 못했으며, 오랜 시간 동안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일반적으로 신화와 전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6년 《사이언스》 잡지에 게재된 한 연구 논문은 약 4000년 전 중국에서 실제로 대홍수가 발생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글의 주요 저자는 난징사범대학교 지질학자 우칭룽 박사이다.
2007년, 우칭룽은 황하 연안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중 일부 퇴적물의 두께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번 대홍수의 퇴적물은 20미터 두께로 황하보다 50미터 높으며, 이는 드물게 심각한 파괴를 입힌 홍수임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홍수 퇴적물에 포함된 유기 물질을 분석한 결과, 대홍수가 약 4000년 전에 발생했으며, 이는 역사 기록에 기록된 요순우 시기의 대홍수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문을 공동 집필한 미국 퍼듀대 그린치 박사는 “그 홍수는 초당 약 30만~50만 입방m로 아마존 강의 최대 홍수와 거의 같다. 이는 지난 1만 년 동안 인류가 알고 있는 지구상에서 발생한 가장 큰 홍수이며, 황하의 최대 강우로 인한 홍수량의 500배 이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민족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대홍수에 대응하는 방식은 탈출하는 것이지만, 오직 중화 민족만이 이를 다스리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고고학에서도 중국의 이번 대홍수의 실제 존재를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1999년부터 중국 사회과학원 문물연구소는 라자 유적지(칭하이성 동남부 민허현 라자촌, 황하 북쪽 언덕에 위치)에서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으며, 이것이 4300년 전부터 3900년 전의 마을 유적지임을 발견했다. 발굴된 여러 구의 인류 시신이 순간적으로 동결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라자 유적지는 ‘동방의 폼페이’라고도 불린다.
연구진은 발굴된 시신과 유물을 통해 황하 북안의 라자촌이 4000년 전 대홍수에 휩쓸린 두꺼운 진흙으로 빠르게 매장된 것으로 추정했으며, 이는 우칭룽 박사의 연구와 《산해경》에 기록된 대홍수와 상호 입증된 것이다.
또한, 라자 유적지에서는 대형 석경(돌거울)과 옥칼, 옥벽이 출토되어 이곳의 문명이 한때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며,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원시 마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 박사의 연구에 대해 사이언스지 부편집장은 “중화고문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문명의 기원 및 고대문명 사회환경의 출현을 실증했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모두 중화 문명이 위 아래 약 5천 년이며, 대홍수를 분수령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위 시기 문명은 대홍수로 파괴되었고, 이후 5천 년 문명은 대홍수 후에 발전했다.
워싱턴 대학교 지질 전문가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우칭룽 연구팀이 대홍수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중국의 대홍수가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고대 대재앙 이야기들도 진짜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비록 이 전설들은 각각 다른 민족과 문화에서 발생했지만, 매우 유사한 이야기 줄거리와 전형적인 인물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증거와 현상에 대해 우연이나 교묘한 일치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만약 대홍수 설이 사실이라면, ‘신의 창조론’도 마찬가지로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홍수가 ‘자연’이 아닌 ‘천벌’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서에는 하나님 여호와가 인간의 죄악이 점점 커지고 하루 종일 악을 생각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며 내가 만든 사람과 길짐승과 곤충과 공중의 나는 새를 땅에서 없애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노아라는 완전한 사람이 있었는데, 노아는 신을 믿는 본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신의 가르침을 완전히 따르고 선한 마음을 가졌으며, 세 아들은 그의 엄격한 교육 덕분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다.
여호와는 노아가 480세 때(그때 사람의 수명이 900세까지 달할 수 있었다)에 노아의 일가를 택해 신인류의 씨앗으로 보존하겠다고 말했다. 여호와는 노아에게 말했다: 만일 내심으로 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인류는 홍수로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사람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고, 결국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하여 120년 더 연기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때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대홍수로 도태시키겠다고 하였다.
하나님 여호와는 그에게 이르되 “너는 고파우드로 방주를 만들어 여러 칸으로 나누고 그 위에 송진을 칠하라.”
또 노아에게 방주 만드는 법을 일러 주며 “내가 홍수를 땅에 넘치게 하여 천하를 멸망시키리니 땅 위에 피와 살과 숨결이 있는 모든 생물이 하나도 죽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너와 언약을 맺을 것이다, 너와 네 아내, 아들, 며느리는 모두 방주로 들어가라, 모든 피와 살이 있는 생물은 각각 수컷과 암컷이 한 마리씩, 네가 방주로 데려가서 네가 있는 곳에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라.”
이에 노아가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노아는 그들에게 전하며 여호와의 경고를 모두에게 전했다: 사람은 반드시 신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홍수로 너희를 멸망시킬 것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땅에 홍수가 넘칠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방주에 올라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 당시 지구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없었고, 지구의 외층은 물로 덮힌 층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태양이 지구를 비추면 수층의 보호 덕분에 지구에서는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었다. 안개가 땅에서 피어올라 온몸을 촉촉하게 적셔 지구에는 비가 내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비를 본 적이 없고, 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미래에 홍수가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사람들은 노아를 온갖 방법으로 비웃었다: 멀쩡한 곳에 어떻게 홍수가 있겠는가? 네가 방주를 산 위에서 만들었으니 어찌하여 바다로 옮기겠느냐?
노아는 비를 본 적도 없고 비가 어떤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신의 말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신의 말을 더 믿었다. 노아가 모든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이렇게 지으라 하셨으니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리라. 장차 홍수가 모든 산에 넘치면 그때 방주가 뜰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아가 너무 어리석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더 믿었다.
신이 연장한 이 120년 동안, 노아는 한편으로는 방주를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장차 그와 함께 방주에 들어가 홍수의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열심히 설득했다. 한 해가 지나고 또지나도 사람들은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하고 싶은 대로 악을 행하고 즐기며 회개할 마음이 없었다. 마지막 기한이 다가오자 방주도 완성되었다.
이날 노아가 600세가 됐을 때인 2월 17일 하나님이 정한 기한이 도래했다.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노아는 아내, 세 아들, 세 며느리를 데리고 방주로 이사했고, 동시에 방주에는 수컷과 암컷이 짝을 이룬 새, 가축, 땅 위의 곤충도 있었다. 각각 두 마리씩, 그리고 다양한 음식도 있었다. 온갖 생물이 다 들어가자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닫았다.
7일 후, 하늘에는 큰 비가 내렸고, 연속 40일 밤낮 동안 지상의 심연에 있는 샘물의 수원도 모두 갈라졌다. 하늘의 창문도 활짝 열렸고, 홍수가 범람하여 물이 불어나면서 방주가 과연 땅에서 떠올랐다. 모든 높은 산이 물에 잠겼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도 수면 7미터 아래로 들어갔다.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제외하고, 육지에 사는 모든 사람, 동식물들이 모두 물의 재앙에 빠졌다.
홍수는 150일 동안 범람했고, 하나님은 명령을 내려 비를 그치고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불자 물살이 점점 사라졌다. 노아의 방주는 터키의 아라라산 기슭에 정박했다. 1년 후, 물이 완전히 마르자 노아의 가족과 모든 동물이 나왔고, 인간과 동물은 점차 전 세계에 번성했다. 홍수 이후, 지구 표면은 수층의 보호를 잃고 사계절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라라산 현지 원주민들은 항상 ‘노아의 방주’의 존재를 믿어왔으며, 그들은 아라라산을 신으로 여겼지만 대대로 이 언덕들에 관한 비밀을 외부에 알리기를 꺼려했다. 13세기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그곳을 조사하러 갔고, 일기에서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썼다: 노아의 방주는 여전히 어느 높은 산의 정상에 정박해 있으며, 그곳은 일년 내내 눈이 점점 더 쌓여 천년의 눈 아래 방주가 잠기게 되었다.
아의 방주 잔해가 남아 있다는 소문이 계속 전해져 왔으며, 그중 상당수는 공군 조종사들이 높은 하늘에서 본 것이다.
1919년, 러시아 조종사 로스코비스키는 첫 번째 노아의 방주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산꼭대기의 두꺼운 얼음층 아래에 희미한 어두운 반점이 나타나 있으며, 많은 전문가들은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연합군과 미군 조종사들이 노아의 방주를 보았다. 북아프리카에서 모스크바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마침 그곳을 날아간 것이었다.
1955년, 프랑스 산업가 페르낭 나바라(Fernand Navarra)는 터키의 아라라산에서 나무 기둥 같은 것을 가져왔고 빙하 아래에 배가 있는 것을 희미하게 보았는데 이 기둥은 배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탄소14 및 기타 첨단 기술을 사용하여 이 나무 조각들이 “고파우드-일종의 백양목”임을 입증했으며, 그 연대는 5천 년 전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잔목이 노아의 방주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하며,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산에 있다고 보고 있다.
1957년, 터키의 몇몇 공군 조종사들이 비행기를 타고 아라라산 꼭대기를 조사하던 중 이 물체가 배의 모양임을 발견했다. 1960년, 미국의 오랜 잡지 《라이프》에 게재된 위성 사진은 터키의 정찰기가 만 척 상공에서 촬영한 것으로, 아리산 근처에 실제로 배 모양의 유적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진이 발표된 후, 많은 과학자들이 탐험하러 갔다.
1995년, 미국 리치먼드 대학교 교육대학의 부교수인 포처 테일러는 대량의 위성 이미징 사진을 분류한 결과, 결국 길이가 180미터가 넘는 거대한 물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그는 ‘노아의 방주’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3년 미국이 인공위성을 이용해 구소련이 남익 코카서스 경계 지역에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정보를 정찰할 때, “극히 우연”으로 일년 내내 얼어붙은 아라라 봉우리 위에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의 “이물질”이 있는 것을 촬영했다. 성경에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봉 근처에 정박해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 그 ‘이물질’이 노아의 방주라는 말이 나왔다.
미군이 촬영한 위성 사진은 절대 기밀 문서에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탐험가들이 직접 아라라봉에 가서 진실을 조사하기를 원하지만, 터키 정부는 아라라봉이 아르메니아와 이란 국경에 가깝다는 이유로 그들을 산에 오르게 하지 않았다.
1977년, 미국 탐험가 로널드 엘던 와이어트(Ronald Eldon Wyatt)가 팀을 이끌고 아리산을 조사하러 갔다가, 뱃머리에서 뱃머리까지의 거리가 515피트임을 발견했으며, 이는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 길이에 대한 설명과 거의 일치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연구자들은 노아의 방주가 이미 석화되었고, 이 석화된 나무들이 가공된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유기 접착제가 첨가된 세 개의 나무판이 접합된 것이며, 가장 바깥쪽 나무판에는 역청이 칠해져 있었다.
2000년 미국의 상용위성이 촬영한 아라라의 이물질은 과학자들의 분석 결과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고 길이가 183m로 성경에 묘사된 노아의 방주에 가까웠다. 이 발견은 또 다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연구원들의 관심도 크게 증가시켰다.
2001년 10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상도의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QuickBird’ 위성이 가동되어 ‘아라라산 이물질’을 포착하고 사진을 찍었다.
2002년 8월 30일 미국 스페이스닷컴은 레너드 데이비드(Leonard David)가 쓴 기사를 통해 포처 테일러(Porcher Taylor)가 주관한 상업용 위성을 이용한 아라라산 이물질(Ararat Anomaly) 모니터링에 대한 과학 연구 활동을 기술했다.
2003년 유럽의 여름은 무더웠고, 아라라산 정상 일부에는 일년 내내 쌓인 눈이 녹았다. 위성 사진에 따르면, 정상 근처에 목조 구조가 드러나 있었다.
2004년부터 맥거번 팀은 여러 차례 아라라산을 직접 탐사하며 수천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또한 지층 레이더와 고해상도 군사 위성 사진을 통해 얼음 아래에 두 개의 목재 구조가 있음을 확인했으며, 그 중 큰 것은 길이 123피트, 너비 24피트로 약 5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맥거번은 “그것은 매우 컸으며 17,000피트의 고산의 16,600피트에 있다.”라고 말했다. 산에는 나무가 없고 연기를 내뿜는 화산만 있다. 산에 이렇게 큰 물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포처 테일러(Porcher Taylor) 미국 리치먼드대 교육대학 부교수는 10여 년간의 아라라산 위성사진에 대한 연구 끝에 2006년 노아의 방주 잔해라고 믿었던 산의 이상물체 그림을 공개하기로 했고 그 순간부터 신이 세상을 경고하는 서막을 열기 시작했다.
이어서 많은 학자, 전문가, 고고학자, 신학자들이 잇따라 아라라 산으로 가서 노아의 방주가 신화 전설이 아닌 역사라는 증거를 찾고, 진화론적 학설의 오류를 깨려는 탐험의 물결을 시작하여 방주 고고학의 열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런 고고학 탐험 팀들은 우연히도 차례로 방주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외에도 GeoEye사의 ‘이코노스’ 위성, 캐나다 레이더 위성 1호 및 미국 각 정보 부서의 위성과 항공기가 촬영한 사진도 테일러가 ‘노아의 방주’의 존재 증거를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창세기》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가로세로 비율이 6대 1로, 이 비율은 위성이 촬영한 아라라산 북서쪽 기슭의 신비한 물체의 가로세로 비율과 비슷하다.
2010년 10월, 홍콩 탐험가 위안원후이가 이끄는 첫 번째 중국인 탐험대와 현지 쿠르드족이 팀을 이루어 터키 아라라산 군사 금지 구역을 전후로 다섯 차례 수색하였고, 2년여의 시간을 들여 노아의 방주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장소는 터키 동부의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아라라산이다. 이 고고학 팀은 또한 처음으로 방주 내에 진입을 발표한 단체로, 아라라산 고고학에서 가져온 기록 영상과 방주의 내부 구조를 공개하여 채집된 고목 화석 샘플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방주 안에서 도기와 밧줄, 그리고 씨앗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다. 탐험대원들은 나무 판자에 대한 탄소 테스트를 수행한 결과, 나무 모양이 4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이는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의 존재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놀랍게도 노아의 방주에 석화된 나무에서는 큰 원반 모양의 리벳이 박혀 있었고, 강도가 높고 부식에 강한 철, 알루미늄, 티타늄의 합금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4000여 년 전에 이미 매우 뛰어난 제련 기술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삼성퇴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첨단 제련 기술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황금 가면은 가공 온도가 섭씨 1000도를 넘어야 했다. 또한, 그 청동 신수는 매우 정교한 혼합 주조, 리벳 주조, 상감주조 및 용접주조 등의 공정을 사용했으며, 많은 청동기에서 아연과 납이 모두 추출 분리되었다. 그 당시는 진화론에서 말하는 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의 전환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삼성퇴 유물은 오늘날 인류가 그 시대의 공예 수준에 대한 인식을 훨씬 뛰어넘었다.
고고학 팀은 전체 목조 건물 구조 내에 여러 개의 선실이 있으며, 가로로 된 나무 들보도 있어 동물을 기르는 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공개한 비디오에서는 목조 건물 내부에 문과 계단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탐험대는 또한 목선이 인간의 취락 건물일 가능성을 배제했는데, 이는 지역의 고지대에서는 이러한 부족이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탐험대원들은 발견된 유적이 성경 속 노아의 방주라는 것을 99.9%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치가 일치한다. 《성경》에 따르면, 대홍수 후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산에 멈췄다. 방주 유적이 위치한 위치는 바로 《성경》의 기록 장소와 일치한다.
시간이 일치한다. 탄소 감정 결과, 이번에 발견된 유적은 4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성경에서 묘사된 노아의 방주의 존재 시기와 일치한다.
외형 및 내부가 서로 맞아 떨어진다. 방주 유적은 약 133.5미터 길이, 22.3미터 너비, 13.4미터 높이로, 상중하 세 층으로 나뉘어 있다. 내부에는 여러 개의 칸막이가 있으며, 그 중 한 칸에는 나무 울타리와 몇 개의 로프가 있고, 그 안에는 도자기, 로프 및 씨앗과 유사한 물체가 있다. 많은 나무 들보가 있는 작은 칸막이는 분명히 다양한 동물이 서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드는 방법과 크기를 정하였다는 성경 기록과 일치한다. 성경에 따르면 여호와는 노아에게 빙주를 만드는 방법과 크기를 정해주었다: 방주는 길이가 삼백 규빗, 폭은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 방주 위에 한 규빗 높이로 빛이 잘 드는 곳을 두라. 방주의 문은 옆에 열어야 한다. 방주는 상, 중, 하의 세 층으로 나누어야 한다.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이며, 약 45센티미터이다. 이를 통해 추산할 때, 방주의 길이는 약 130미터이다. 게다가, 현지에서는 대대로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3000미터 이상에서는 인류가 집을 짓고 모여 살 수 없다. 기후가 혹독하여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데, 이 거대한 목선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홍콩과 터키 탐험대는 고고학 과정을 《노아의 방주 경세의 계시 2》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 홍콩의 주요 극장에서 상영하였고, 큰 호응을 얻었다.
2019년 말, 고고학자 앤드류 존스(Andrew Johns)와 지구물리학자 존 라슨(John Larsen)은 최신 3D 이미징 기술을 사용하여 케이블을 통해 지하에 전기 신호를 보내고, 지하에 매설된 것이 실제로 배의 선체임을 발견했다.
점점 더 많은 증거가 세상에 드러남에 따라 여전히 믿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다큐멘터리 속 전문가의 말처럼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는 성경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 신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현대인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로 확인됐다. 그 홍수는 대륙의 변화와 함께 당시 지구 전체의 인류 문명을 완전히 파괴했으며, 극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최근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많은 선사 시대 유적, 예를 들어 아틀란티스 대륙, 그리스 문명 및 해저 건축물 등이 그 홍수로 인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성경에서 대홍수 전 인류도덕의 상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세상은 신 앞에서 부패하고 땅은 폭력에 휩싸여 있었다. 선사시대 인류문명이 사라진 그 대홍수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인류의 도덕 수준이 이미 인간으로서 자격이 없을 정도로 미끄러졌을 때, 사람과 그 문명은 도태되었고, 극소수의 좋은 사람들인 노아의 방주 이야기만 남아서 인류를 다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성경》은 선사시대 인류가 도태된 진정한 이유를 매우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인류의 도덕 수준이 더 이상 인간으로서 적합하지 않게 하락할 때 재앙이 발생하고, 인류는 도태와 갱신에 직면하여 다음 인류 주기에 진입하게 된다.
《성경》에서 노아가 만든 방주는 그 양식, 재료, 크기 규격이 모두 하나님의 설계를 따랐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신이 설계한 이 노아의 방주는 키를 잡지 못했다. 왜일까? 노아의 방주 유적지에서는 방주가 앞에 창문을 여는 것도 아니고, 조종실의 전망창도 없으며, 빛을 투과할 수 있는 천창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왜일까? 키 없이 방주는 어떻게 홍수 속에서 운행할 수 있을까?
종말의 재앙은 사방에 길이 없고, 큰 재난 속에서도 피할 곳이 없다. 사람은 주변 세계를 볼 필요가 없으며, 하늘을 우러러 신을 보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하늘로 통하는 큰 길만이 유일한 신의 길이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