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纖纖)
【정견망】
오대(五代) 시기 계차(契此)라는 화상이 있었다. 농번기 때면 늘 백성들의 모내기를 도와주어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외모는 배가 큰 대두(大肚) 화상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삽앙가(插秧歌) 모내기 노래》는 아주 재미있고 선의(禪意)가 가득하다.
[역주: 중국 민간에서는 계차 화상을 포대화상 즉 미륵불의 전생(轉生)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벼 모종 손에 들고 복전에 심으니
고개를 숙이면 물속에 하늘이 보이고
육근이 청정해야 벼가 자랄 수 있으니
후퇴란 본시 전진이로다.
手捏青苗種福田
低頭便見水中天
六根清淨方成稻
後退原來是向前
“벼 모종 손에 들고 복전에 심으니
고개를 숙이면 물속에 하늘이 보이고”
시인은 농사란 복전(福田)에 씨를 뿌리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농사란 선(善)한 인연을 심으면 복덕(福德)을 닦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모내기 할 때 “고개를 숙이면” 물 속의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선(善)을 행하고 덕(德)을 쌓으면 사실 천도(天道)와 서로 통해 착실하게 발을 딛고 하늘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육근이 청정해야 벼가 자랄 수 있으니
후퇴란 본시 전진이로다.”
이 두 구절은 수련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모내기는 수도(修道)를 암시하는데 벼[稻 도(道)와 발음이 같음]가 자라려면 육근[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모두 때가 없어야 한다. 모내기를 할 때는 뒤로 걷는다. 겉보기엔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수련이란 되돌아가야 하며 반본귀진(反本歸真)하는 것이지 앞으로 다투는 것이 아님을 은유한다. 이 구절은 마치 장과로(張果老)가 당나귀를 거꾸로 탄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시는 밭을 복전(福田)으로, 벼가 자라는 것을 도(道)를 이루는 것으로 비유하는데, 모두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계차 화상은 비록 불문(佛門)에 입문했지만, 생활 방식은 일반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내기라는 이런 평범한 일에서도 그는 도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 정말로 대은(大隱 큰 은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불도(佛道) 양가의 수련에서는 모두 행각이란 전통이 있는데 수련자가 직접 백성들의 고통과 인생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게 한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람의 집착을 내려놓고 원만해서 도를 얻을 수 있다. 계차의 방식은 좀 다르긴 하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그럼 왜 “후퇴란 본시 전진이로다.”가 되는가? 사람의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에게 사욕(私慾)이 있기 때문에 우주 특성이 그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게 억제하기 때문이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것은 사실 집착을 내려놓고 욕망을 버리는 것으로 심성이 제고되면 우주 부동한 층차의 표준에 부합할 수 있고 우주 특성이 그를 억제하지 않게 되어 자연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흔히 “한 걸음 물러서면 드넓은 하늘[退一步海闊天空]”라고 말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이익을 다투지 않을 때, 지혜는 끊임없이 발휘될 것이다.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더는 다른 사람과 명예와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면, 법(法)을 얻고 도(道)를 얻을 수 있으며 원만해서 하늘로 돌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