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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정의 끈을 자르고 싶은 괴로운 망설임—이상은의 시 《무제(無題)》 해독

청풍(清風)

【정견망】

서로 만나기 어렵더니 이별 또한 어려워라
봄바람은 힘이 없어 온갖 꽃 다 시든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이 다하고
촛불은 재가 돼야 눈물이 마른다네.

새벽녘 거울 보며 검은 머리 변한 걸 근심하나니
밤에 시를 읊으며 달빛 차가움을 느끼리라.
봉래산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으니
파랑새야 잘 찾아봐 주려무나.

相見時難別亦難,東風無力百花殘‌。
春蠶到死絲方盡,蠟炬成灰淚始幹‌。
曉鏡但愁雲鬢改,夜吟應覺月光寒‌。
蓬山此去無多路,青鳥殷勤爲探看‌。

이 시는 일반적으로 당(唐) 선종(宣宗) 대중(大中) 5년(851년)에 서주(徐州) 막부(幕府)가 흩어진 후, 이상은(李商隱)이 장안으로 돌아와 창작한 것으로 친구인 영호도(令狐綯)에게 도움을 청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애정시의 형식으로 관료 생활의 험난함과 인생의 좌절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나는 이 시를 어릴 때 접했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이 다하고 촛불은 재가 돼야 눈물이 마른다네.”라는 구절이 학생들에 대한 교사(敎師)의 사심 없는 헌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고 널리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 전문(全文)을 읽고 나서야 그리워하는 정을 표현한 작품임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다시 읽어보니, 한 차례 포륜(抱輪) 중에 문득 한 가지 염두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수도(修道)를 통해 공성원만(功成圓滿)하고 싶지만 또 속인의 정(情)을 내려놓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고통에 주저하는 것을 표현한 것임을 깨달았다.

당대(唐代)는 수련의 분위기가 아주 짙었고, 이상은 자신도 일찍이 도관(道觀)에 들어가 도(道)를 배웠기 때문에 근기가 상당히 좋았다.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도관에서 한 도고(道姑 여자 수도인)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청규(淸規)의 계율 때문에 헤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는 당시 사랑에 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를 자세히 해설해보자.

“서로 만나기 어렵더니 이별 또한 어려워라
봄바람은 힘이 없어 온갖 꽃 다 시든다.”

이 구절은 표면적인 뜻을 이해하기 쉽고 묘사도 아주 훌륭해서 독자들에게 애절한 분위기를 바로 전달한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이 다하고
촛불은 재가 돼야 눈물이 마른다네.”

봄누에는 죽을 때까지 실을 잣고 촛불은 재가 되어야 타버린다는 표현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그리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絲]”과 “그리움[思]”은 발음이 같아서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사실 다른 공간의 진실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확실히 실과 같은 것이 존재해 사람을 단단히 얽어맨다. 물론 이상은 본인은 아마 몰랐을 수 있지만, 다른 공간에서 정(情)의 형태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고 여기에 그의 뛰어난 문학적 기교가 더해져 이 구절을 천고의 명구(名句)로 만들었다. 이 구절은 겉보기에는 아주 낭만적이지만, 사실 누에와 초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비할 바 없는 고통이다. 누에는 평생 비단 실을 잣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초는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소모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정에 갇힌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비참하지 않은가?

“새벽녘 거울 보며 검은 머리 변한 걸 근심하나니
밤에 시를 읊으며 달빛 차가움을 느끼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거울을 바라보며 젊음의 쇠락을 걱정하고, 밤에 시를 읊는 동안 차가운 달빛을 느낀다고 상상해 보라. 이 시구는 서로의 심령(心靈)이 통하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다.

“봉래산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으니
파랑새야 잘 찾아봐 주려무나.”

이 구절은 전체 시의 정수이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그 ‘정(睛)’이다. 어떤 이들은 봉래를 연인의 거처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봉래는 바로 신화에 나오는 그 봉래 선산(仙山)으로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 수련을 통해 도(道)를 얻은 사람들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상은이 봉래산을 묘사한 것은 공성원만에 대한 그의 갈망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情)을 내려놓지 못해 결국 승화해 올라갈 수 없었다. 갈 수는 없지만, 또 갈망했기에 그저 “파랑새야 잘 찾아봐 주려무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파랑새는 정보를 전달하는 신조(神鳥)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진정한 수련은 사찰이나 도관을 막론하고 엄격한 계율을 고수했으며, 특히 남녀 간의 사적인 애정에 대해서는 더욱 엄했다.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속인들은 흔히 이것이 인성(人性)을 단속하기 위해서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야말로 진정으로 수련자를 위한 것이다.

인간 세상의 정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고층차에서 보면 역시 저급하고, 일시적이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다. 오직 정의 속박을 끊어내야만 진정으로 아름답고 영원한 공간으로 승화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련 과정 중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 정을 내려놓고 정의 끈을 끊어버리기란 흔히 아주 고통스럽고, 주저하며, 떼어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은 인간 세상에 너무 깊이 미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상인의 이 작품은 바로 이 점을 아주 정확하고 또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