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우리는 최근 동수들 사이에 오해(誤解)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는데, 어떤 사람은 소문을 퍼뜨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동수를 배척하며, 어떤 사람은 소통하기 어려운 등등이다. 처음에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수련인 사이에 이런 것들이 나타날 수 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법(法)에서 보고, 깊이 학습하고, 깊이 수련하면서 점차 일부 진상을 보게 되었다.
1. 안으로 찾음은 제고의 기회
이러한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한 것은 분명 우리에게 제고할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동수들과 교류할 때 동수의 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하는 사유 습관이 부족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종종 자신의 각도에서 말하고, 개인적인 요소를 지니는데, 이렇게 하면 아마 상대방에게 오해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부님 말씀이 생각났다.
“당신들이 법에 대해 책임지는 것 외에, 어떠한 인간적인 집착이 없고, 자신의 것이 없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요소가 없다면, 이 일을 꼭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개인적인 요소를 섞기만 한다면, 이 일을 잘할 수 없을 것이다”(《각지 설법 6》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
여기까지 쓰자 사부님 말씀이 생각났다.
“우선 자신을 수련생으로 두어 수련생 위에 있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정진요지》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스스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두 사부님의 제자이고 모두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으며, 단지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모두 사부님을 도와 정법(正法)하며,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2. 부동한 층차에 부동한 표현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하여 어느 한 층차 중에 이른 사람, 그는 단지 그 한 층차 중의 광경을 볼 수 있을 뿐, 이 층차를 넘어선 진상을 그는 보지 못하며 믿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이 한 층차 중에서 본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가 그처럼 높은 층차 중까지 수련하지 못했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층차가 결정하는 것으로서, 그의 사상도 승화해 올라갈 수 없다.”(《전법륜》)
한번은 A 동수가 B 동수, C 동수와 중생을 구도하는 항목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나는 방관자로서 지켜보면서, 항목 책임자 개인의 心性(씬씽) 수련의 중요성을 말한 A의 주장을 이해했다. 하지만 B 동수는 견해가 달라서, 그런 사람 마음을 인정할 것이 아니라 배제하고 부정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C 동수는 이 말을 듣고 A 동수가 무책임하고 항목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정념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마찬가지로 또 한 동수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지만, 세 동수는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나는 A 동수를 정면(正面)적으로 이해한 반면, B 동수와 C 동수는 A 동수를 부면(負面)적으로 보았다. 따라서 나와 A 동수는 다툼이 없었지만 B 동수와 C 동수는 A 동수와 다툼이 있고 많은 오해가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정체(整體)를 더 잘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지가 아니라,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A 동수는 마침 심한 병업(病業)을 앓고 있는 동수와 현관설위(玄關設位) 이치로 마난(魔難)을 걸어나왔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B 동수는 A 동수가 법을 어지럽힌다고 비난했다.(법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을 난법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층차 차이는 때로 사람이 정말 서로 믿을 수 없게 만드는데, 그럼에도 확실히 존재한다. 따라서 부동한 층차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부동한 층차 차이는 구세력에 의해 이용당할 수 있으며, 그런 층차의 차이를 이용해 유언비어, 오해, 혼란 등 간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법에서 수련하지 않으면 구세력이 틈을 타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3. 미시적 차이의 장벽에서 오는 억제 작용
좋아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쪽 공간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이쪽 공간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 이쪽 공간을 이용해 나타날 수 있다. 원한, 다툼, 질투 등도 모두 이런 식으로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자와 분자 사이 공간에서 좋아함이란 한 가지 요소가 더해지면 서로 좋아하게 되고, 반대로 싫어함이란 한 가지 요소가 더해지면 서로 미워하게 되고, 오해가 더해지면 간격이 생겨 교류할 수 없거나 또는 잘 협력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분자와 분자 사이에 고급 생명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거대한 격차의 장벽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는 일종 절대적인 억제이며, 오직 수련하는 사람만이 이런 종류 장벽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주 천체 최후의 그러한 요소들이 내가 삼계를 피해서 정법을 할 때 또한 틈을 타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의 표면적인 육신을 포함한 저쪽의 신체(神體)와 방대한 공(功)에까지도, 그것들의 거대하고도 많은, 아직 법이 바로잡히지 않은 이러한 생명들을 이용하여 일종의 간격을 조성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아득하게 먼 공간과 기나긴 시간으로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구세력은 이렇게 이런 격차의 보호 장벽 하에서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이렇게 들어온 생명들 그것들은 우주 공간에서 왔기 때문에 속인들은 관찰할 수 없다. 오직 일정한 수련 층차에 도달한 정법(正法) 수련자만이 그것들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대법의 지도 아래 우리는 진정한 선과 악, 좋고 나쁨을 분별할 수 있다. 우리 동수 사이에, 차이의 장벽이 만들어낸 간격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동수들과 함께 잘 협력해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잘해야 한다.
이상은 착실한 수련 중에서 깨달은 것으로 이를 써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