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수련생이다. 여러 나라와 문화를 거치며 수련해 왔으며, 매 차례 경험은 진솔한 수련에 대한 나의 이해를 형성해 왔다.
나는 2007년 태국에서 운 좋게 법을 얻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꾸준히 견지하는 고요한 힘을 체험했다. 태국은 내게 인내심, 평온,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겸손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홍콩으로 옮겨가 빠른 리듬과 번잡함은 소음과 불안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찾는 내 능력을 고험했다. 지금 나는 체코에 살면서 수련을 이어가고 있다. 체코에서는 또 완전히 다른 고험을 가져다준다. 홍콩의 긴장과 압박과는 달리, 이곳의 삶은 더 조용하고 느긋하며 외부 소음과 요구가 훨씬 적다. 하지만 이러한 평온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들이 나타난다.
외부 압력의 자극이 없아도 진정한 고험은 더욱 미묘하고 더욱 내재적인 것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어떻게 정진(精進)을 유지할 것인지, 어떻게 안일을 저지할 것인지, 그리고 느슨하고 표류하기 쉬운 환경에서 어떻게 수련을 견지할 것인지 등이다.
내가 여기서 공유하려는 것은 자신의 제한된 이해에 불과하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만약 오해가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사부님의 은혜로 나는 폴란드 법회 법공부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번 경험은 힘들고 도전적인 동시에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진선인(真善忍)이 아득히 먼 원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진(真)
폴란드 일정은 매우 빡빡했다. 금요일에 네 강, 토요일에 네 강, 일요일에 한 강을 공부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법공부를 하는 것은 내게 쉽지 않았다. 나는 피곤하고 불안했으며, 때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몸이 저항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었다. 진(真)은 단순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법(法)은 거울과 같아서 나의 규율 부족, 변명 찾기, 그리고 안일에 대한 추구를 그대로 반영한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것은 협조인들의 진(真)이었다. 휴식 시간에도 그들은 쉬거나 자신을 감출 겨를도 없이, 오히려 우리 앞에 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그들은 잘못, 실패, 잘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할 때도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거나 능력을 과시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진(真)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더 신뢰했다.
토요일 대규모 교류 시간에 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진상을 여러 언어로 반복해서 말했다.
“여러분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없다면 우리는 협조인이 아닙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우리가 여러분들과 잘 협조하지 못한다고 보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은 내 마음에 직접 울림을 주었다. 진정한 책임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이 아니라 봉사였고, 통제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협조인이 봉사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진솔은 “리더”와 “참여자” 사이의 거리를 없앴다. 우리는 한 가족이며, 그들의 진은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진실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나는 여러 차례 진(真)이 단결을 이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비판을 두려워하며 약점을 숨긴다. 하지만 폴란드 협조인들은 성장을 중시해 약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의 진솔함은 모두가 안전하게 반성할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진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가면을 쓰지 않고 바로 “이것이 내 약점이고, 이것이 내가 개선할 부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이러한 진솔함은 아주 고통스럽지만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진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내심의 심태(心態)다. 폴란드에서 나는 그것이 진실한 체현임을 보았다.
선(善)
처음부터 나는 그들의 선을 느꼈다. 협조인들이 회의장에 들어올 때, 그들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우리에게 한 명씩 다가와 악수를 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미소를 지으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예의가 아니었다. 매 차례 악수에는 배려의 순간이었고, 매 한 마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30초, 그렇다! 이 30초는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이러한 행동 속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일어나 발언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거의 들리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방 안에는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협조인이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모님, 저는 이모님을 응원합니다. 목소리가 작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모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당신 말씀은 아주 소중하고 매 사람의 목소리는 모두 아주 소중합니다.”
이 단순한 행동은 순수한 선(善)이었다. 그것은 연습한 것도 아니고, 보여주기 위한 쇼도 아니었다. 훈련에 소질이 있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누군가 그녀에게 준 힘으로 자신의 힘을 찾은 것이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바로 리더다. 남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자신을 높이 두고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는 것이다.
나는 또 실수가 나타날 때 선(善)을 보았다. 속인 사회에서 실수는 종종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협조인들이 나서서 “그건 제 잘못입니다. 더 협조를 잘했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누가 잘못을 했는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들의 선(善)은 수치스러울 수 있는 일을 성찰과 성장의 기회로 바꿔주었다.
진정한 선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용기다. 약자와 함께하기로 선택하고, 그들이 홀로 설 수 없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폴란드에서 나는 이러한 선의 체현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인(忍)
빡빡한 일정 자체가 인내심을 요구했다. 3일간 9강을 마치는 것은 내 인내력을 고험한 것이다. 몸은 뻣뻣했고, 마음은 지쳐 있었다. 때로는 도피하고, 쉬고, 편안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음은 원망하지 않고 견디는 것, 고난을 힘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 한 차례 불편함을 집착을 내려놓을 기회라 되새기며 인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인내란 단순히 법 공부를 견지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협조인이 책임을 지는 방식 또한 참음을 체현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안으로 찾아 더 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바로 참음이다. 압력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실수해도 탓하지 않으며,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두를 이끄는 것이다.
나는 참음이란 단순히 소극적인 감당이 아니라 적극적인 전화(轉化)임을 깨달았다.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성장의 동력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환경과 타인에 대한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인내심이다.
나는 살면서 종종 인내가 부족하다. 조급하고, 빠른 결과를 원하며, 불편한 것을 회피한다. 폴란드 법회는 진정한 성장에는 시간과 인내, 그리고 진리를 위해 묵묵히 감당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결론
폴란드를 떠날 때, 나는 피로하긴 했지만 감사하는 마음도 느꼈다. 진선인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주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는 것임을 볼 수 있게 해주신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나는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에서 진(真)을 보았고, 이모의 손을 잡을 때 협조인의 흉금에서 선(善)을 보았으며,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는 것에서 인(忍)을 보았다.
이러한 교훈들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영감을 주었다. 리더십은 통제가 아니라 봉사이며, 힘은 권력이 아니라 자비이고, 단결은 구호가 아니라 진선인(真善忍)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 고쳐야 할 부족함과 집착이 많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경지와 차이가 아주 멀다. 내가 공유한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진심으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이상은 자신의 제한된 이해에 불과할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내 것이고, 진리가 있다면 사부님의 은전(恩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서약을 지니고 전진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더욱 진실하게 살고, 더욱 자비롭게 행동하며, 더욱 큰 인내심을 가지고 감당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남들을 능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고자 한다. 겸손하게 나아갈 것입니다. 오직 겸손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3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