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여(劉如)
【정견망】
만약 우리가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약(山藥 식품명은 참마)를 이용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많은 독자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고 또 처방도 간단하다면 고인(古人)이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왜 여태껏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가?
이런 반응은 아주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중의(中醫)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응급 질환에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면, 많은 이들이 믿지 못하거나 설사 믿는다 해도 또한 그저 옛날 편작이나 화타, 이시진 등과 같은 뛰어난 신의(神醫)들이나 가능한 일이라 치부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대부분 뛰어난 침구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적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현대에도 이런 명의가 존재했을까? 설사 존재한다 해도 이런 흔한 식재료로 위중한 환자를 살려낼 수 있을까? 말하자면 모두 농담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이렇게 아주 간단한 처방으로 당시 평범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으니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심태로 사용했음에도 기적처럼 죽어가는 가족의 생명을 구한 사례들이 있다. 이런 많은 의안(醫案 치료 케이스)과 처방이 근대의 저명한 《의학충중참서록(醫學衷中參西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 책을 썼고 전례가 없지만 이렇게 탁월한 효과를 지닌 처방을 만들었을까? 사실 이 책의 저자 중의학에서는 아주 유명 인사지만 일반인들은 아마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중의를 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청말(淸末) 민국(民國) 초기 명성이 혁혁했던 국의(國醫 나라를 대표하는 뛰어난 의사) 장석순(張錫純)이다. 그는 단 한 가지 약재로 처방하는 단방(單方)으로 사람을 구한 수많은 기적을 남겼다. 쉽게 말해, 그는 중의에서 용약(用藥)의 고수로 중의가 침구 외에도 간단한 한약을 사용해 위급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불가사의한 기적을 보여주었다.
장석순(張錫純): 이시진과 너무나 흡사한 운명
장석순(1860~1933)은 자(字)가 수보(壽甫)로 하북성 염산현(鹽山縣) 사람으로 학자 집안 출신의 유의(儒醫 유학적인 소양을 갖춘 중의사)였다. 그는 중화민국 4대 명의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혔고, 1916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의 병원인 봉천입달 중의 병원[奉天立達中醫院] 원장이기도 했다. 그는 천명, 특성, 업적이란 측면에서 명조의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과 비슷했다.
‘봉천입달 중의 병원’이란 이름에서 보다시피 “하늘의 뜻을 받들어” 중의학의 명맥을 잇고 발전시킨 계승자였다. 그는 인연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심양(瀋陽)에서 병원을 설립한 후 아주 신속하게 진동을 일으켰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으며 기적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오만했던 양의들도 치료할 수 없던 수많은 중환자를 살렸으니 ‘입달(立達 즉시 효과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란 두 글자에 부끄럽지 않다. 이렇게 전통 의학의 신속하고 신기한 효과를 펼쳐 보이며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그는 서양의학의 맹공격으로 오해와 왜곡을 받아 정부로부터 버림받을 위기에 처했던 중의학의 명맥(命脈)을 정정당당하게 이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중의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최초로 중의 병원을 설립한 뛰어난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만년에는 통신학교를 설립해 대량의 후학들을 양성했고, 또 전통을 잇고 후대에 전해 후세에 혜택을 준 거작인 《의학충중참서록(醫學衷中參西錄)》을 남겼다. 그의 인생과 후세에 대한 공헌은 이시진과 아주 흡사했다.
이시진처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주 총명했고, 유학을 공부해, 시와 문장 창작에도 뛰어났다. 이시진처럼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제했다. 결국 그는 의학에 헌신해 의술(醫術)로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구할 뜻을 세웠다. 그는 연구에 몰두해 중의학 이론을 활용해 양약을 포함해서 고금 약물(藥物) 사용의 달인이 되었다. 중의 병리학의 천기(天機)를 투철히 깨달은 그는 선배들의 경험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았고, 약재 성질을 완벽하게 숙지했으며, 심지어 직접 실험을 거쳐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간단하면서도 신기한 여러 가지 용약법(用藥法)과 처방들을 만들어냈다. 낮에는 환자를 치료하고 밤에는 책을 써서 수많은 처방과 약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를 통해 한약을 사용해 병을 치료하는 방면에서 신속하고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게 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의 진료 기록, 처방, 그리고 독자적인 사고를 끊임없이 기록하고, 이를 《의학충중참서록(醫學衷中參西錄)》이란 책으로 펴내 사심 없이 사회에 봉사하고 중생에게 혜택을 베풀었다. 이 책은 후대에 중의학계에서 가장 본받을 만한 책으로 찬양받았고 전체 분량이 백만 글자가 넘으며 무려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약을 공부하고 활용하는 대담성, 뛰어난 능력, 그리고 책을 써내려는 굳센 의지를 보여주는데 이 점에서 이시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이시진은 비록 완성된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직접 조정에 바치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어쨌든 본인의 손으로 직접 책을 완성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장석순은 책을 편찬하던 도중 과로로 사망하는 바람에 완벽한 교재를 편찬하려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사망한 나이도 이시진과 비슷한 74세였다.
따라서 그의 이 거작(巨作)은 현대 중의사들에게 중요한 참고서이자 중의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임상 교과서일 뿐아니라, 통속적이고 쉬운 언어와 쉽고 간단한 처방, 상세한 분석, 그리고 적지 않은 약재들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식재료들이라, 침구 기술이 부족하고 의료 서비스를 받기 힘든 많은 백성들이 간단히 자기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의 책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여러 차례 재인쇄되었으며,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진심으로 백성을 위한 의덕(醫德), 신기한 전통 의학으로 널리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살리려는 헌신 및 평생에 걸친 노력과 거대한 공헌은 그야말로 이시진이 다시 태어난 것과 같으니 그의 이름은 만고(萬古)에 기억될 것이다.
타고난 유학적 재능에 담긴 의미
돌이켜보면, 그는 이시진처럼 학자 가문 출신이자 동시에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 유학에 대한 그의 뛰어난 초기 재능과 과거 급제 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유학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학을 전승하고 책을 써서 후대에 전수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그에게 준 사명이었다. 만약 이시진의 사명이 본초약학(本草藥學)를 바로잡아 계승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면, 장석순의 사명은 오랜 의학의 이치를 투철히 깨달은 후 선배들의 경험을 실천에 적용하면서 이미 형식적으로 굳어져버린 처방 사용의 숱한 오류와 관념 등를 바로잡아, 전통 의학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널리 보급하며,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중의학 대가의 의학적 성취와 인물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이제 그의 독특한 임상 사례들과 간단하면서도 신기한 처방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음 번에는 우선 산약(山藥 마) 1미 처방부터 시작해 보겠다.
비록 필자는 의사가 아니라서 여러분을 데려다 직접 치료해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의사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또 다른 지혜와 더욱 독창적인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보일 때, 예상치 못한 영감을 받아 새로운 희망과 사로(思路)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 과정에서 전통 의학을 새로 인식하고 막다른 길에서 탈출구를 찾는 기쁨을 경험해 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07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