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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에 관한 기록: 청나라 말기 “황금대왕” 이종대가 직접 용의 비늘을 보다

덕혜

【정견망】

청나라 말기에 이종대(李宗岱)라는 관영 상인官商이 있었는데, 호는 ‘산농(山農)’으로 광동성 불산(佛山) 출신으로 대대로 선비 집안이자 광동성 거부였다. 그는 동치 8년(서기 1869년)에 산동포정사를 지냈고, 동치 13년(서기 1874년)에 산동독량도를 역임했으며, 광서 3년(서기 1877년)에는 산동오부(제남, 동창, 태안, 무정, 임청)의 도대를 지냈고, 이듬해에는 산동염운사를 겸임하여 관직이 4품에 이르렀다.

​그 후 조정에서 양무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금광을 경영했으며, 관가의 인맥과 가족의 자금 지원에 서양 기술을 사용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황금대왕’이 되었다. 그가 개업한 금광은 하루에 금 20냥을 생산하며, 연간 금 7000냥을 생산했다. 전성기에 광부는 3000명이었다. 듣기에, 이 “황금대왕” 이종대는 직접 용의 비늘을 본 적이 있으며, 서양 화학 기술자에게 검사를 의뢰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일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걸 알려면 또 다른 광동성 불산의 명인 오견인(吳趼人 1866-1910)을 말해야한다. 오견인은 청나라 소설가이며 호 ‘아불산인(我佛山人)’을 필명으로 소설과 우화, 잡문을 많이 써서 명성을 얻었으며, 서재명인 ‘견전(趼廛)’의 이름을 딴 저서만 해도 《견전필기》, 《견전소필》, 《견전잉묵》, 《견전시산잉》 등이 있다. 그는 《견전잉묵》과 《견전필기》에서 청말 ‘황금대왕’ 이종대가 직접 용린을 보았고, 용린을 보내 검사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이종대와 오견인은 모두 광동성 불산 사람이어서 서로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종대가 산동에서 벼슬을 할 때, 제남에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뇌우가 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쳤다. 이때 그의 하인이 밖에서 돌아와 그에게 용 발가락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하인은 생생하게 묘사했다.

​”큰 뇌우가 내릴 때, 한 마리의 용이 천둥과 번개에 맞아 성내 어딘가에 떨어졌습니다. 하인은 서둘러 몰려가 구경을 했고, 가서보니 용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이 용의 시신을 가져가서 먹기 시작했고, 그는 간신히 용의 발톱을 하나 잡았는데, 용의 발톱은 ‘다섯 말의 지팡이처럼 크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들에게 계속 나눠졌고, 결국 용 발가락 하나만 가져왔다. 이 발가락은 “사람의 팔처럼 굵고” 비늘이 잔뜩 있었는데 용 비늘은 “찬란하게 오색빛이 났습니다.” 이종대는 용비늘을 몇 조각 떼어내어 장난감으로 삼아 놀았는데, 용비늘은 사각형이고 무늬도 사각형이었다.

​나중에 이종대는 벼슬을 그만두고 금광을 경영하러 갔는데, 이때 그는 용린 두 개만 남겼다. 금광에는 초청된 서양 화학 기술자가 금광 제련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 화학 기술자를 집으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용린 분석을 의뢰했다. 서양 화학 기술자가 용 비늘을 가열 건조시킨 결과, 층상 구조인 용 비늘 조각이 수십 층의 얇은 조각으로 나눌 수 있음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화학 실험에서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지 밝혀내지 못했는데, 아마도 사용된 방법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기록한 오견인은 갑진년(서기 1904년)에 산둥성 제남을 여행했으며, 그곳 사람들은 용의 추락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할 수 있어 용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 용의 뼈, 치아, 비늘 등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을 잊었다. 사실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있다. 미지의 사물에 대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며, 단호히 부정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과학을 맹신해서는 안된다. 과학에 대한 미신도 마찬가지로 우매하다.

출처: 청말 오불견인《견진필기趼廛筆記》,《견전잉묵趼廛剩墨》

주: 《견전필기》,《견전잉묵》은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약간 어긋나는 점이 있다. 《견전필기》에서는 하늘에서 용의 다리가 떨어졌다고 말하며 《견전잉묵》에서는 용이 떨어졌다고 한다. 글의 작성시기를 고려했을 때 《견전필기》는 그가 남의 설명을 들었을 뿐이고, 《견전잉묵》은 오견인이 제남을 답사하여 행한 것이라 신빙성이 더 높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