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지혜로 초려를 나서기도 전에 천하 일을 알다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두보의 시 영회고적(詠懷古蹟) 중 다섯 번째 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갈량의 큰 이름 우주에 드리웠나니
종신의 남은 초상 엄숙히 맑고 높구나
천하 삼분의 큰 포부를 못 폈으나
만고에 운소(雲霄)를 홀로 나는 듯하구나
이윤이나 강태공과 비슷하고
지휘하고 평정함에 소하나 조참도 빛을 잃누나
운이 옮기어 한 왕조가 끝내 회복되기 어려웠으나
뜻이 굳세어도 몸이 죽으니 군무가 수고로웠구나
諸葛大名垂宇宙,宗臣遺像肅清高。
三分割據紆籌策,萬古雲霄一羽毛。
伯仲之間見伊呂,指揮若定失蕭曹。
運移漢祚終難復,志決身殲軍務勞。
시인 두보에게 제갈량의 명성은 우주를 종횡으로 관통하며 만세의 추앙을 받는 것이다. 삼국이 나란히 서게 한 공업(功業)은 제갈량의 평생 재주와 학문을 완전히 보여주기에는 부족했으며, 비록 혁혁한 공적일지라도 제갈량에게는 그저 깃털 하나처럼 가벼운 것이었다.
두보가 제갈량을 이토록 높게 평가하자 후인들 중에도 이를 따르는 이가 많았다. 송나라의 사인(詞人) 유극장(劉克莊)은 다음과 같이 썼다.
“와룡이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지났으나, 세도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가진 자들은 모두 그를 하·상·주 삼대의 보좌관과 같은 인물로 여긴다. 이 시는 그를 이윤과 강태공의 반열에 두면서 소하와 조참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논의는 모두 두자미(杜子美 두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제갈량을 매우 추앙하여 그를 상의 개국공신 이윤이나 주나라 여상(강태공)과 같은 개국공신에 비견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서한의 개국공신인 소하나 조참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낭야 양도(陽都 오늘날 산동 기남沂南현) 사람으로, 한나라 사례교위 제갈풍(諸葛豐)의 후손이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며 한말 태산군승(太山郡丞)을 지냈다. 제갈량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숙부 제갈현(諸葛玄)을 따라 예장(豫章 지금의 강서 남창), 형주(荊州 오늘날 호북성) 등지에서 생활하다 나중에 남양(南陽)에 은거했다.
숙부 제갈현이 세상을 떠난 후, 제갈량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양양성 서쪽 20리 지점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을 ‘융중(隆中)’이라 불렀다. 제갈량은 《양보음(梁父吟)》을 읊조리기를 좋아했으며, 항상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다. 세상을 구제할 재능을 갖춘 그를 사람들은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라 불렀다.
당시 조조는 이미 북방의 원소 형제를 소멸시키고 하북 4주를 점유해 북방의 태반과 중원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마초와 한수는 서쪽의 관중과 농우(隴右)를 점유했고, 유표는 남방의 형주를, 손권은 동남방의 강동을 점유하고 있었다.
한 영제 초평(初平) 원년(194년), 유표는 하진(何進)의 추천으로 형주자사가 되었다. 유표는 동한 황제에게 조공의 직분을 잃지 않으면서 경계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조치를 취했다. 초평 원년부터 건안 13년(208년) 유표가 죽기까지 약 20년 동안 중원과 관중 지역에 변란이 거듭되었음에도 형주는 비교적 안정되어 많은 북방 사람들이 난을 피해 형주로 왔다. 유표가 비록 경계를 보존하고 백성을 다독였으나 도량이 크지 않아 영토를 넓히려는 뜻이 없었다. 형주로 투항해 온 북방의 재사들에게 구휼품을 줄 뿐 그들을 등용하지는 않았다. 제갈량, 서서(徐庶), 방통(龐統)은 모두 한때 형주에 모여들었던 준걸들이었으나 유표는 한 명도 등용하지 않았다.
관도(官渡)대전 당시 유비는 원소의 휘하에 있었다. 원소는 그를 여남(汝南)으로 보내 현지의 황건 잔당을 수습해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게 하는 동시에 유표와 연계해 조조를 협공하게 했다. 관도대전 후 조조가 친히 유비를 정벌하자 유비는 남쪽 형주로 내려가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는 유비의 명망을 내심 꺼려 감히 등용하지 못했으나, 그를 의지해 조조를 막고자 신야(新野)에 주둔하게 했다. 신야는 한수(漢水) 북쪽에 위치해 양양과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형주의 북쪽 관문이었다.
처음 ‘와룡’이란 이름을 듣다
백수이(白壽彝)의 《중국통사》 관점에 따르면, 유비가 신야에 주둔하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와룡 혹은 복룡이라 불리는 제갈량을 얻은 것이며, 이는 유비가 삼국 정립의 공업을 이루는 전환점이 되었다.
유비가 복룡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사마휘(司馬徽)를 통해서였다. 나관중의 《삼국연의》 묘사에 따르면, 유비는 유표의 부하 채모(蔡瑁)의 해를 피하려고 달아나다 단계(檀溪)를 뛰어넘은 뒤 은사 사마휘를 만났다.
사마휘는 자가 덕조(德操)이고 수경선생(水鏡先生)으로 불렸다. 유비가 동자의 안내를 받아 수경이 거처하는 장원에 이르렀을 때, 안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이고 발을 멈추었다. 이때 거문고 소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 사람이 웃으며 나와 말했다. “거문고 가락이 청아하다가 갑자기 높고 강한 조가 섞였으니, 필시 영웅이 훔쳐 듣고 있는 것이로다.” 이 사람이 바로 사마휘였다.
사마휘가 유비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자 유비는 우연히 지나가는 길이라고 거짓을 말했다. 사마휘는 유비가 필시 난을 피해 이곳에 온 것임을 꿰뚫어 보았다.
사마휘는 명공(明公)의 이름이 귀에 쟁쟁한데 지금까지 이토록 낙담한 것은 모두 돕는 인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천명이 돌아가고 용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유현덕에게 응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재가 필요한 유비에게 천하의 기재인 복룡과 봉추가 모두 이곳 형양 땅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밤 유비가 휴식을 취한 뒤 영천 사람 서서도 장원에 도착해, 유표에게 의탁하려다 실망하고 돌아온 과정을 사마휘에게 털어놓았다. 사마휘는 서서가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졌음에도 밝은 주군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표에게 갔다고 꾸짖었다. 그는 명주(유비)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모른다며 말했고, 서서는 즉시 수긍했다.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신야에 주둔할 때 서서가 유비를 알현했고, 유비는 서서를 매우 중히 여겨 빈좌(賓佐)로 삼았다. 이때 마침 조조의 부하 하후돈과 이전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서서가 즉시 유비를 위해 계책을 내었다. 스스로 군량을 태우고 성을 나가 남쪽으로 달아나자, 하후돈과 이전은 유비가 싸움을 겁내는 줄 알고 군사를 몰아 급히 추격했다. 뜻밖에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습격하니 하후돈 일행은 풍비박산이 났고 잔병을 수습해 업중으로 도망갔다.
유비는 서서의 능력을 확인했으나 서서는 자신의 재능이 제갈량에 미치지 못한다며 제갈량을 추천했다. 유비가 서서에게 제갈량을 청해오길 바라자 서서가 유비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 이 사람은 직접 가서 보아야지 억지로 오게 할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직접 찾아가 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말은 제갈량이 보통 사람이 아니므로 유비가 직접 문전까지 찾아가 예의를 갖추어야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제갈량은 아직 모습도 드러내기 전에 그 명성이 유비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유비의 삼고초려
은사 사마휘와 서서의 추천으로 유비는 제갈량을 직접 방문하여 산을 내려와 도와줄 것을 청하고, 천하를 구제하려는 뜻을 이루기로 결심했다.
건안 12년(207년) 늦겨울의 어느 날, 유비는 관우, 장비를 데리고 융중으로 제갈량을 찾으러 갔으나 운 없게도 제갈량은 이미 외출 중이었다. 세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와야 했다.
유비는 신야로 돌아와서도 사람을 보내 제갈량이 언제 집에 있는지 계속 알아보게 했다. 제갈량이 외출했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비는 즉시 두 번째로 융중을 방문했다.
마침 한겨울이라 날씨가 매우 춥고 구름이 짙게 깔렸으며 북풍이 몰아치고 눈이 펑펑 내렸다. 미리 소식을 알아보고 갔음에도 제갈량은 다시 임시로 유람을 떠난 상태였다. 그들은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諸葛均)만을 만났고,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한 뒤 편지 한 통을 남겨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건안 13년(208년) 봄, 유비는 의관을 정제하고 말을 준비해 세 번째로 제갈량을 방문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말을 달려 융중으로 가서 제갈량의 초려 앞에 도착했다. 이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방해할까 염려하여 여로의 피로도 잊은 채 숨을 죽이고 문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제갈량이 깨어난 뒤에야 비로소 뵙기를 청했다.
초려를 나서기도 전에 천하가 셋으로 나뉠 것을 알다
유비는 삼고초려 끝에 비로소 제갈량을 만날 수 있었다.
낮잠에서 깬 제갈량이 동자에게 방문객이 있는지 묻자, 유황숙이 밖에서 오래 기다렸다고 답했다. 제갈량은 서둘러 후당으로 가서 의관을 정돈하고 나와 유비를 맞이했다. 제갈량은 윤건(綸巾)을 쓰고 학창의(鶴氅)를 입어 그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
유비와 제갈량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주인과 손님의 자리에 앉았으며 동자가 차를 올렸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지금 한실(漢室)이 무너지려 하는데 스스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의 위기를 구하고 싶으나, 재주와 학문이 얕아 지금까지 아무런 성취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갈량이 산을 내려와 자신의 포부를 이루도록 도와달라고 청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동탁 이래로 호걸들이 함께 일어나 주(州)와 군(郡)을 가로지르는 자들을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해 명망도 낮고 군사도 적었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기고 약한 데서 강하게 된 것은 천시(天時)뿐만 아니라 인모(人謀) 덕분입니다. 지금 조조는 이미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니 실로 그와 맞서 싸우기는 어렵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유한 지 이미 3세대가 지났고 나라가 험하며 백성이 따르고 현능한 자들이 쓰이고 있으니, 그는 원조자로 삼아야지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형주는 북으로 한수와 면수를 누르고 남해의 이익을 다하며 동으로 오회(吳會)와 연결되고 서로 파촉(巴蜀)과 통하니, 이는 병가에서 반드시 차지하고자 하는 요충지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지키지 못하니 이는 하늘이 장군을 도우려 하는 것인데 장군께서는 뜻이 없으십니까?
익주는 지세가 험하고 기름진 벌판이 천 리에 달하는 천부(天府)의 땅이니 고조께서 이를 근거로 제업을 이루셨습니다. 유장은 암약(暗弱)하고 장로는 북쪽에 있으며 백성은 넉넉하나 그들을 돌볼 줄 모르니 지혜로운 인재들이 명군을 얻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예이시고 신의가 사해에 떨치며 영웅들을 아우르고 어진 이를 갈구하시니, 만약 형주와 익주를 아울러 점유하고 그 험준함을 지키며 서쪽으로는 융족과 화합하고 남쪽으로는 이월을 다독이며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를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닦으십시오. 그러다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형주와 익주 두 곳에서 중원으로 출병해 대업을 성취하고 한실을 부흥하실 수 있습니다.“
《삼국연의》에서는 또 세부적인 묘사가 추가된다. 제갈량이 말을 마친 뒤 동자에게 그림을 가져오게 하여 중당(中堂)에 걸고 유비에게 말한다.
“이것이 서천(西天) 54주의 지도입니다. 장군께서 패업을 이루시려면 북쪽은 조조에게 천시(天時)를 양보하고 남쪽은 손권에게 지리(地利)를 양보하되 장군께서는 인화(人和)를 차지하십시오. 먼저 형주를 집으로 삼고 후에 서천을 취해 기반을 닦아 솥발과 같은 형세를 이룬 뒤에 중원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 혹은 초려대(草廬對)이다. 그 내용을 보면 제갈량은 초려를 나서기도 전에 이미 천하가 셋으로 나뉠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갈량의 이 한 마디에 유비는 눈앞이 탁 트이는 듯했고, 제갈량에게 산을 내려와 자신을 도와줄 것을 공경히 청했다. 이후 삼국 정립의 형세는 과연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분석한 그대로였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제갈량의 견식을 찬양했다.
유예주가 외롭고 궁함을 탄식하던 당시
다행히 남양에 와룡이 있었구나!
훗날 솥발처럼 나뉠 곳을 알려 하니,
선생이 웃으며 그림 속을 가리키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5/23/n7921881.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