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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를 관통하는 재학으로 만세에 모범이 된 제갈량 (7)

——북벌과 국궁진췌(鞠躬盡瘁) 상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제갈량 초상. 청 고궁 남훈전(南薰殿) 구장 역대 성현 초상화, 지본채색,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공유 영역)

제갈량의 북벌은 삼국 시기 촉한(蜀漢)이 228년부터 234년 사이에 조위(曹魏)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을 가리킨다. 전후 총 다섯 차례 단행되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조위 역시 반격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촉한의 주수(主帥)이자 승상인 제갈량은 과로로 병을 얻어 오장원에서 병사하며,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자신의 약속을 실천했다.

삼국의 국력 대비

223년, 촉한의 소열황제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동오에 패배하며 촉한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 승상 제갈량은 후주 유선을 보좌하며 국력을 서서히 회복시켰고, 동시에 진진과 등지를 보내 동오와 다시 화친을 맺었다. 225년, 제갈량은 남정을 통해 촉한 남방의 난을 평정했으며 북벌에 필요한 물자도 보충했다.

후주 유선 건흥 4년(226년), 위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병사하고 아들인 조예(曹叡)가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위 명제(明帝)다. 당시 위나라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한중에 있는 틈을 타 출병하여 토벌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조예 또한 그럴 뜻이 있었으나, 손자(孫資)가 “한중 남정은 지세가 험하고 가로막혀 있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면 천하가 소란해지고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오히려 대장들을 나누어 요새를 지키게 하며 위나라가 강해지기를 기다리면 촉과 오는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 제안했고, 이에 조예는 출병을 잠시 멈추었다.

제갈량은 조위의 정권이 교체되고 새 군주가 막 즉위한 지금이 북벌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동시에 조위를 정벌하고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것은 제갈량이 이미 융중대책에서 세웠던 목표이자 오랜 숙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조건으로 볼 때, 삼국 중 촉나라의 힘이 가장 약했으므로 북벌이 성공할 기회는 크지 않았다.

당시 조위는 약 443만 명의 인구와 43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촉나라는 인구 약 94만 명에 병력 12만 명이었고, 오나라는 인구 약 230만 명에 병력 23만 명이었다. 제갈량은 1차 북벌에서 촉나라 병력 약 10만 명을 동원했다. 위나라는 이 전역 전후로 2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러한 현격한 전력 차이로 인해 촉한이 조위를 멸망시키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특히 형주를 잃은 뒤 제갈량이 구상했던 양방향 출병의 조건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북벌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은 촉군을 이끌고 한중에 주둔하며 북벌을 준비했다. 출발 전 후주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선황제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황제께옵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역사에서는 이 상소를 《전출사표(前出師表)》라 부른다.

제갈량은 이 상소에서 후주 유선에게 촉한이 삼국 중 약소하고 불리한 지위(익주 피폐)에 있음을 인식하고, 삼국이 서로 다투는 가운데 촉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스스로 힘써 노력해야지 잠시의 안녕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권했다.

《삼국지·동윤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후주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곽유지, 비의, 동윤(동화의 아들), 향총, 장예, 장완 등 “지조와 생각이 충성스럽고 순수하며” “절개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신하들을 신용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유선이 널리 의견을 듣고 ‘납언(納言)의 정치’를 실시해 상벌을 공정히 하여 ‘안팎의 법이 다르지 않게’ 하기를 희망했다.

유선 역시 제갈량에게 출정의 조서를 내렸고, 북벌이 시작되었다.

제1차 북벌

건흥 6년(228년) 봄, 제갈량은 사곡도(斜谷道, 한중에서 미현郿縣에 이르는 길)를 통해 미현을 취하겠다고 공언하며 조운과 등지를 의군(疑軍, 위장 부대)으로 삼아 기구(箕口)에 주둔시켰다. 조위(曹魏)는 대장군 조진(曹真)을 보내 맞서게 했다. 이때부터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할 때까지 촉나라와 조위 사이에는 전후 여섯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그중 다섯 번은 촉한의 공격이었고, 한 번은 조위의 공격에 대한 촉한의 방어였다.

왕쌍관(王雙寬)이 그린 《백위영웅방(百位英雄榜)》 중 조운(趙雲) (왕쌍관 제공)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 기산(지금의 감숙 예현禮縣 동북)을 공격했다. 잘 훈련된 촉군은 사기가 높고 진용이 정연하여 북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위에 속했던 남안, 천수, 안정 3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을 맞이했으며, 천수(天水) 출신 장수 강유(姜維)도 제갈량에게 투항했다.

제갈량의 공격과 초반 성공은 단번에 관중(關中) 일대를 진동시켰고 조위 정권은 크게 경악했다. 위 명제는 급히 직접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내려와 대장 장합(張郃)을 보내 제갈량을 저지하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여러 군을 감독하게 하여 앞세우고 가정(街亭 지금의 감숙 천수天水 남쪽)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산 위에 군을 주둔시켰다가 장합에게 격파당했고, 이는 전쟁 전체의 국면을 흔들어 놓았다.

조운과 등지의 부대 역시 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하여 기곡(箕谷)에서 불리했으나, “군사를 거두어 굳게 지켰기에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퇴각할 때 조운이 직접 후방을 방어하여 병사와 장수를 잃지 않았으며 군수 물자 역시 손실이 거의 없었다. 가정에서 패배하여 군사들이 흩어질 때, 오직 왕평(王平)만이 “거느린 천 명의 군사로 북을 치며 스스로를 지키니, 장합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다가오지 못했다.” 덕분에 왕평은 남은 병사들을 천천히 수습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

제갈량은 이번 출정에서 서현(西縣)의 천여 가구를 데려 왔고 왕평에게 상을 주었으며, 위의 천수군 참군 강유를 항복시켰다. 마속은 비록 재능이 뛰어나고 구변이 좋았으며 제갈량과 친한 사이였지만, 군기를 엄하게 세우기 위해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베었다(읍참마속).

제갈량은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후주에게 상소를 올렸다.

“신이… 법도를 밝게 훈계하지 못하고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며 가정에서 명을 어긴 잘못과 기곡에서 경계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으니, 허물은 모두 신의 임용이 부적절함에 있습니다. 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생각이 어두웠으니, 《춘추》 대의에 따라 장수로서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직위를 3등급 낮추어 그 잘못을 다스려 주십시오.”

이에 후주는 제갈량을 우장군으로 강등시켜 승상의 일을 대행하게 했으나, 그 권한과 통솔은 전과 같게 했다.

제2차 북벌

건흥 6년(228년) 가을, 위의 대사마이자 양주목(揚州牧)인 조휴(曹休)가 석정(石亭)에서 오나라 대도독 육손(陸遜)에게 대패했다. 겨울이 되자 제갈량은 다시 군을 일으켜 위를 공격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은 손권이 조휴를 깨뜨리고 위나라 군사가 동쪽으로 내려가 관중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후주에게 상소를 올렸으니, 이것이 《후출사표(後出師表)》다.

12월,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 지금의 보계寶雞 동쪽)을 포위했다. 그러나 조진은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고, 촉군은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0여 일간의 격전 끝에 식량이 부족해지고 조위의 원군이 곧 도착할 상황이 되자 제갈량은 한중으로 퇴각했다. 퇴각 도중 추격해 오던 위의 장수 왕쌍(王雙)을 복병으로 사살했다.

제3차 북벌

이듬해인 건흥 7년(229년) 봄, 제갈량은 제3차 북벌을 단행했다. 그는 진식(陳戒)을 보내 무도와 양평 2군을 공격하게 했다. 위의 장수 곽회(郭淮)가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패배했고 촉군은 두 군을 점령했다. 제갈량은 현지의 저, 강족 등 소수민족을 안무하고 장수와 병사를 남겨 지키게 한 뒤 한중으로 돌아왔다. 두 군을 탈환한 공으로 유선은 제갈량의 승상 직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조위의 반격

건흥 8년(230년) 가을, 조위가 먼저 대군을 보내 한중을 공격했다. 사마의는 서성(西城)에서, 장합은 자오곡(子午)에서, 조진은 사곡(斜谷)에서 출발해 세 길로 한중을 치려 했다. 제갈량은 성고(城固)와 적판(赤阪)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방어를 강화하는 것 외에도 제갈량은 이엄의 군사 2만 명을 한중으로 증파하여 조위 군대를 저지했다. 연일 내린 비로 자오곡과 사곡 등의 도로가 끊기자 조위 군대는 철수했다. 이 해에 위연(魏延)이 양계(陽溪)에서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했다.

촉 땅은 산이 높고 길이 험해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촉군에게 식량 운송의 큰 부담을 주었으며, 촉군이 조위 군대와 장기전을 벌이지 못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군량 운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갈량은 ‘목우(木牛)’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6/2/n795726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