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국(秋菊)
【정견망】
“앞에는 옛사람 보이지 않고, 뒤에는 올 사람 보이지 않네.
천지의 유구함을 생각하니, 홀로 창연히 눈물 흘리노라.”
前不見古人,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獨愴然而涕下。
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어진 선비와 뜻있는 인사들이 천하를 가슴에 품었으나, 통치자가 어둡고 용렬하거나 소인배의 모함 때문에 비참한 일생을 보냈다. 그들은 나라에 보답할 길 없고 품은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초(楚)나라에 굴원 외에도 송옥(宋玉)이 있었다.
송옥은 자가 자연(子淵)이고 호는 녹계자(鹿溪子)이며, 초나라 언성(鄢城, 지금의 호북 의성) 사람으로 전국시대의 유명한 사부(辭賦) 작가다. 전해지는 바로는 송옥이 굴원의 제자이자 굴원 낭만주의 풍격의 계승자로, 굴원과 함께 굴송(屈宋)이라 불렸다. 송옥은 사부에 능하여 초사를 계승하고 한부(漢賦)를 창시해 부성(賦聖 부의 성인)으로 존경받는다.
겸손한 군자이며 온화하기가 옥과 같았던 송옥은 중국 고대 4대 미남(美男) 중 한 명으로 미모와 품격, 재능을 한 몸에 갖추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집안 형편이 가난했으나, 17세에 초나라 궁궐에 들어가 초왕의 문학시신(文學侍臣)을 맡아 왕실 전적을 정리하고 때로는 왕의 행차를 수행했다. 송옥은 재능이 넘치고 풍류가 있으면서도 강직하여 초왕의 총애를 받았고 이후 승진했으나, 조정 대신들의 질투와 배척을 받아 평생 관직 생활이 순탄치 않았고 노년은 쓸쓸했다.
등도자(登徒子)가 일찍이 초왕 앞에서 송옥이 여색을 밝힌다고 비방한 적이 있다. 송옥은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동쪽 이웃집 딸(東家之子)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담장에 기대어 3년 동안 나를 훔쳐보았으나 나는 그녀와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등도자의 아내는 추하고 병이 있는데도 등도자는 그녀를 몹시 사랑해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습니다.”
이에 초왕은 송옥이 호색하지 않음을 믿게 되었다. 이때부터 등도자는 호색한의 대명사가 되었고, ‘동쪽 이웃집 딸(東家之子)’ 역시 준수한 재사(才士)를 흠모하는 미녀의 상징이 되었다.
송옥은 한때 모수녀(莫愁女)라는 여인을 좋아했으나, 그녀는 마음을 둔 사람이 따로 있어 결국 사랑을 위해 목숨을 끊었고 송옥은 평생 장가들지 않았다. 재주와 외모를 겸비하고 지조가 있으면서도 여색을 밝히지 않았으니 이는 많은 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남자가 지극히 아름다움을 형용할 때 ‘외모는 반안(潘安)과 같고, 정(情)은 송옥과 같으며, 재주는 자건(子建 조조의 아들 조식)에 비길 만하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어떤 이가 초왕에게 많은 사람이 송옥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고 간언하자 초왕이 송옥에게 물었다. 송옥은 대답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하리(下裏)》와 《파인(巴人)》을 부를 때는 수천 명이 따라 불렀으나, 《양춘(陽春)》과 《백설(白雪)》을 부를 때는 따라 부르는 사람이 얼마 없었습니다.”
초왕은 듣고 곧바로 이해했다. 《양춘》과 《백설》은 송옥이 지은 고상한 음률이다. 여기서 “하리파인(下裏巴人)”, “양춘백설(陽春白雪)”, “곡고화과(曲高和寡 노래가 너무 고상하면 따라 부르는 이가 적다)” 등의 성어가 이 고사에서 유래했다. “양춘백설”은 나중에 고상한 음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협은 《문심조룡(文心雕龍)·변소(辨騷)》에서 “굴원과 송옥의 뛰어난 행보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극찬했다. 송옥의 사부는 경치를 묘사하며 정감을 서술함에 있어 전개가 섬세하고 우아하며 호방하여 낭만주의 색채가 풍부하다. 그의 작품은 알려전 것은 많지만 유실된 것이 많고,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 《구변(九辯)》, 《풍부(風賦)》, 《신녀부(神女賦)》, 《고당부(高唐賦)》, 《등도자호색부》, 《대초왕문(對楚王問)》 등이 있다.
《고당부》에서 송옥은 “먼 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일어남이여, 마치 여산(麗山)의 외로운 밭이랑 같구나”라고 썼다. 큰 바람이 일으킨 파도를 산간의 밭에 비유하여 대자연의 장활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나라에 대한 사랑을 토로했다. 초왕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운몽택(雲夢澤) 서쪽의 양전(良田) 300무를 송옥에게 하사했다.
《고당부》에는 또한 초회왕(楚懷王)이 고당을 유람할 때 꿈속에서 무산의 여인(巫山之女)과 만난 일도 기록되어 있다. 신녀(神女)는 자신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라고 했으며, 후에 초회왕이 그녀를 위해 사당을 세우니 ‘무산운우’(巫山雲雨)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구변》은 송옥이 좌천된 후 느낀 바를 적은 작품으로, 《이소》를 잇는 또 하나의 고전 초사(楚辭)로 중국 문학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다. 가을 경치와 개인의 운명을 결합하여 정경이 어우러지는 문학적 수법을 처음으로 개척했기에 송옥은 문단에서 비추의 원조(悲秋之祖)라 불린다. 도입부인 “슬프도다, 가을의 기운이여!”는 가을의 슬픔이라는 풍격의 기조를 정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초목이 흔들려 떨어지고 쇠잔해지는 쓸쓸함, 멀리 길을 떠나거나 높은 곳에 올라 물가에서 보내는 이별의 아픔, 하늘은 높고 기운은 맑으나 적막하게 물이 빠진 차가운 가을 풍경을 묘사했다. 이를 통해 가난한 선비가 관직을 잃고 뜻을 펴지 못한 불평함과 나그네 신세로 친구 하나 없는 낙박하고 고독한 심경을 부각했다. “오로지 임금님만 생각하여 변화할 수 없건만”, “임금님 마음은 나와 다르구나.” 송옥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소인배의 무함을 받아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좌천을 당했다. 세월은 흐르고 공업은 이루지 못한 채 이제 고향을 등지고 홀로 떠도는 송옥의 내면적 고통과 슬픔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송옥의 가을 슬픔은 자신에게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다. 초왕은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했으며, 조정에는 권신들이 득세하여 언로가 막혔고 백성의 삶은 고달팠다. 밖으로는 강한 진(秦)나라의 위협이 있어 초나라는 이미 풍전등화의 처지였다. 간사한 자가 득세하고 어진 선비가 멀어지는 것은 정권 멸망의 전조일 수 있다. 기원전 222년, 초나라는 진나라에 멸망했고 송옥도 같은 해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뜻이 높은 사람은 흔히 고독하다. 굴원은 《이소》에서 “맹조는 무리 짓지 않는다”라고 했고, 송옥은 《구변》에서 “차라리 곤궁한 곳에 처할지언정 고결함을 지키리라”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봉황에 비유하여 “오리와 기러기는 모두 보리나 수초를 쪼아 먹지만, 봉황은 더욱 높이 날아오른다”라고 했으며, “정기(精氣)를 타고 둥글게 돌아 신령들이 가득한 곳으로 치닫기를” 상상했다. 이로 보아 송옥의 뜻은 세속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를 동경해 천지의 정기를 타고 창우(蒼宇)를 날며 신령(神靈)을 따르고자 했다.
송옥의 가을 슬픔은 후세, 특히 뜻을 얻지 못한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북송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강산은 사람에게 진실로 도움이 되나니,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지금까지 송옥이 가을의 슬픔을 전함을”, “송옥의 부를 떠올리니 높은 곳에 오름에 기운이 노을을 이루네”, “재주는 적선(謫仙, 이백)과 같으나 술이 부족하고, 정은 송옥 같은데 다시 가을을 만났구나”라고 썼다.
또 조비(曹丕)는 “가을 바람 쓸쓸하고 날씨는 차가운데, 초목은 떨어지고 이슬은 서리가 되네”, 유영(柳永)의 “쓰르라미 소리 처절한데 장정(長亭)의 저녁을 마주하니 소나기가 갓 그쳤구나”, 육유(陸遊)의 “가을을 만나 슬픔을 면치 못함은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는 까닭이라” 등도 그 맥을 잇는다.
두보는 당 대종 시기에 송옥의 옛 집을 유람하며 경치에 마음이 움직여 감회에 젖었다. 1,000년이 넘는 역사의 강을 넘어 두 사람은 시대는 다르나 운명이 같았다. 재주가 뛰어나고 우국충정했으나 매번 좌절했던 그 애틋함이 두보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 속마음을 서로 나눌 길 없으니 두보는 허공을 향해 길게 탄식했다.
“초목이 떨어짐을 보며 송옥의 슬픔을 깊이 아노니,
풍류와 유아(儒雅)함은 또한 나의 스승이로다.
천년을 바라보며 눈물 한 줄기 뿌리나니,
쓸쓸히 다른 시대에 태어나 함께하지 못함이라.”
767년, 두보가 56세 되던 해에 병마에 시달리고 생활이 곤궁하여 성도의 두보초당을 떠나 기주(夔州)에 이르렀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백제성 밖의 높은 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온갖 감회에 젖어 이 시 《등고(登高)》를 지었다.
“바람은 세차고 하늘은 높은데 원숭이 슬픈 울음소리 들리고
푸른 강물 하얀 모래톱에 새들이 날아든다.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은 우수수 낙엽을 떨구고
장강은 쉬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온다.
만 리 타향 쓸쓸한 가을에 이 몸은 항상 나그네
한평생 얻은 병을 안고 홀로 높은 대에 오른다.
힘들고 어려운 세월에 흰머리 털만 무성하고
늙고 쇠약해져 이젠 술조차 끊어야 할 지경이다.”
가을 경치의 처량함을 빌려 자신의 떠돌이 처지와 늙고 병든 고독, 인생의 실의를 토로했으니, 두보의 이때 심정은 송옥이 《구변》을 쓸 때와 어찌 이리도 흡사한가.
옛사람을 기억하며 오늘날을 보니, 중공의 독재 폭정 아래 중국 대륙은 호랑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부패와 어둠이 가득하며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산하가 부서졌다. 수많은 애국 재자(才子)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펼칠 길이 없어 조국에 보답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려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양심을 팔아 폭정을 옹호하며 체면 차리는 노예가 되거나, 승진과 출세의 길이 막혀 낮은 자리에 머물거나, 잔혹하게 박해받고 감옥에 갇히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백의 《행로난(行路難)》 중 “큰길은 푸른 하늘 같건만 나만 홀로 나가지 못하네”와 최각의 《곡이상은(哭李商隱)》 중 “모름지기 만 장 높이의 구름을 능가할 재주를 가졌건만, 일생의 포부를 한 번도 펴지 못했네”라는 구절에 공감한다. 희망에서 실망으로, 마침내 절망에 이르러 어떤 이는 소침해지고 우울해하며 어떤 이는 해외를 떠도니, 오늘날 중국인의 비애는 송옥보다 훨씬 심하다 하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