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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쌓은 덕으로 시골에서 봉강대리가 나오다

안단(顔丹)

【정견망】

청 가경(嘉慶)·도광(道光) 연간에 호남성 안화(安化)현에서 도주(陶澍)라는 조정 중신이 나왔다. 그는 건륭 43년(1778년)에 태어났는데, 그해 여름 지역에 심각한 가뭄이 발생하여 겨울 곡물 가격이 폭등했다. 그의 아버지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새로 태어난 아들이 장차 비처럼 대지를 적시고 중생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주(澍, 만물을 적시는 비)’라 지었고 자(字)를 ‘자림(子霖)’이라 했다.

중생에게 혜택을 주고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제왕(帝王)과 장상(將相)에게 부여하신 직책이다. 도주의 아버지는 독서인(讀書人)으로 품성이 고결했으며,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인애(仁愛)의 마음을 가졌다. 가뭄이 심했던 해에 길가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는 사람이 길거리에 시신으로 방치된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집안의 낡은 문짝을 떼어내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문짝이 부족해지자 사방에서 성금을 모아 그 돈으로 사람을 고용해 시신을 매장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에서 유명한 훈장이었으며 아들에게 특히 엄격했다. 외출 중 길 위에서 잠시 식사하는 시간에도 아들에게 사람 됨됨이와 일 처리의 도리를 가르쳤다. 밤이 되면 아들에게 낮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게 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경계했다. 시를 짓거나 문장을 쓸 때도 아들이 자신의 이해에 근거해 쓰도록 격려했을 뿐, 무조건 관습만 따르게 하지 않았다. 도주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곁에서 고대 성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점차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려는 흉금과 이상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의 세심한 가르침 덕분에 도주의 과거 급제 길은 순탄했다. 가경 5년(1800년)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고, 7년(1802년)에는 진사(進士)에 합격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로 선발되었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 상을 치르기 위해 지역 서원에서 강의하며 머물렀다.

도광 원년(1821년)에 이르러 그는 사천성(四川省) 봉강대리(封疆大吏 지방에서 군정과 민정의 권력을 쥔 책임자를 말함. 보통 총독이나 순무를 봉강대리라 한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추천을 받았고 산서(山西), 복건(福建), 안휘(安徽)에서 안찰사와 포정사를 역임했다. 10년이 채 되지 않아 양강총독(兩江總督) 겸 강소순무(江蘇巡撫)로 승진하여 명실상부한 봉강대리가 되었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그는 조정의 지출을 많이 절약했으며, 자신의 봉록을 내어 수재민을 구제했다. 황제의 깊은 신임을 얻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문의(文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주 역시 마음씨가 어질고 후덕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본래 같은 고향의 황(黃)씨 성을 가진 여인과 정혼했다. 이 여인은 자색이 뛰어났는데, 지역의 오(吳)씨 성을 가진 부잣집에서도 그녀를 눈독 들였다. 자신의 아들에게 후처로 삼게 하려고 예물을 두둑이 챙겨 황씨 집에 청혼했다. 황씨의 아버지는 마음이 흔들려 도주네 집에 파혼을 요구했다.

도주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황씨 여인 역시 파혼하려는 마음을 품고 오씨 집안에 시집가기로 결심했다. 결국 황씨의 아버지는 집안의 여종 한 명을 황씨 대신 도주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도주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중에 도주가 조정의 중신이 되자 이 여종 역시 일품고명부인(一品誥命夫人)에 봉해졌다.

반면 오씨 집안에 시집간 황씨는 남편이 타인의 토지를 침범했다가 싸움 끝에 살해당하고, 시아버지도 곧 세상을 떠나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다. 오씨 집안사람들도 선량하지 않아 황씨가 의지할 곳이 없음을 보고 기회를 틈타 시댁의 모든 재물과 전답을 빼앗아갔다.

도주는 황씨의 소식을 듣고 예전의 파혼 일을 이유로 방관하지 않고 즉시 그녀에게 거액의 은자를 보내주었다. 황씨는 돈을 받은 후 매우 부끄럽고 후회스러워했다. 그녀는 매일 은자를 안고 통곡하며 차마 돈을 쓰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돈을 도둑맞고 말았다. 그녀는 분함이 극에 달해 결국 목을 매어 자살했다. 황씨가 죽은 후에도 도주는 그녀의 가족을 계속 돌봐주었다.

도주의 조상은 동진(東晉)의 중신이었던 도간(陶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주는 선조를 기리기 위해 직접 악록산(嶽麓山)에 암자를 짓고 삼나무를 심어 ‘도환공삼암(陶桓公杉庵)’이라 이름 지었으며, 남경(南京) 박산(博山)에도 사당과 서재를 세웠다. 그는 평생에 걸쳐 《도환공연보(陶桓公年譜)》와 《도환공상찬(陶桓公像贊)》을 저술해 선조의 정신과 기개를 찬양했다.

이후 호남성 안화현으로 이주한 도씨 일파는 원나라 때의 도순경(陶舜卿)을 제1대 선조로 받들었다. 그들은 대대로 시골에 거주하며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제11대 도요조(陶耀祖, 자는 백함) 때에 이르러 가문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역의 부유한 집안이 되었다. 이 백함공(伯含公) 역시 덕행으로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의사(義士)였다.

명나라 말기에 각지에서 보갑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한때 백함공이 어느 곳을 지나다가 도둑을 만났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관가에 보내려 했다. 그러자 그 도둑이 백함공에게 간곡히 애원했다. “나으리, 저를 구해주십시오.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백함공은 그 말을 듣고 보증을 서서 그 사람을 풀어주게 했다. 생활 방편이 없으면 다시 예전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백함공은 그를 나루터로 데려가 작은 배 한 척을 사주고 재물을 주어 타지에서 정착할 수 있게 배려했다. 배를 사준 일은 백함공 생전에 여덟 차례나 있었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덕행에 감화되어 잘못을 고치고 선한 길로 나아갔다.

평소 생활에서도 백함공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었다. 길에서 부서진 돌이나 기와 조각을 보면 주워서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길을 걷다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백함공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사람들은 그의 방에 쌓인 기와와 돌덩이가 지붕만큼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도주의 증조부 도숭아(陶崇雅, 자는 문형)도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밖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한 도둑이 쌀을 훔치러 그의 집에 몰래 들어왔다. 그는 이를 발견하고 그 사람을 뒤쫓아갔는데, 그의 처소에 가서야 평소 아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고 사후에도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죽고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아내가 후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여전히 그 도둑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강희 무자년(1708년) 9월에 이웃집에 불이 나서 모든 물건이 타버렸다. 그런데 도씨 집안의 창고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조금도 타지 않았다. 당시 불을 끄던 사람들이 긴 소매의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담장 위에 서서 불길을 거슬러 부채질하는 것을 희미하게 보았는데, 불이 담장에 닿자마자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 담장은 불에 타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화재가 진압된 후 도씨 집안은 창고를 열어 저장해둔 모든 물자를 필요한 재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도주의 조부 도효신(陶孝信, 자는 인량) 역시 길에 떨어진 돈을 줍지 않는 큰 선인이었다. 어느 날 그가 강가를 산책하다가 땅에 떨어진 은자 주머니를 발견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보고 그는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날이 저물어서야 한 사람이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와 땅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엇을 급히 찾는 것을 보았다.

인량공이 다가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액수를 자세히 대조해 본 후 그 사람이 주인임을 확신하고 즉시 은자를 돌려주었다. 그 사람은 감격하여 은자의 절반을 인량공에게 사례하려 했다. 그러나 인량공은 웃으며 말했다. “매우 늦었으니 어서 돌아가십시오. 내가 은자를 돌려준 것은 당신을 돕기 위함이지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즉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감동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도씨 가문이 대대로 덕을 쌓고 선을 행한 것은 가문이 지역사회와 역사에 훌륭한 명성을 남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과(因果)를 관장하는 신명(神明)의 눈에도 비쳤다. 시골 농가에서 봉강대리가 나온 것은 도씨 가문과 같은 적선지가(積善之家)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복보(福報)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북동원필록(北東園筆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