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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기실: 천년의 법연 4-의인지진(義仁至真)

작자/대륙대법제자

【정견망】

삼국 및 서진(西晉), 남북조 시기는 중국 역사상 문화의 융합기다. 불법(佛法)이 계속해서 널리 전해졌고 유가의 인(仁)과 의(義)가 이 시기에 충분히 표현되었다. 차 문화의 보급도 더욱 가속화 되었으며 민족 사이의 대융합이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다. 촉의 승상 제갈량은 맹획을 7번 잡아 서남지역의 개발을 촉진했고 동진시기의 ‘의관남도(衣冠南渡 북쪽의 의복문화가 남쪽으로 건나간 것)’ 현상은 장강 유역의 개발을 촉진했다. 남북조의 대분열은 뒷날 수당성세(隋唐盛世)를 위한 바탕을 깔았다.

이 시대는 영웅 배출 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건안칠자’, ‘죽림칠현’, 도연명 등이 문단에 독자적인 시풍을 이루었다.

이번 글에서는 세 사람의 경력을 통해 이 시대에 중생이 법을 찾은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1)

조조가 원소를 멸하고 공손찬이 북방을 통일한 후의 일이다. 요동(遼東)에 출신이 가난한 한 사람이 있었다. 세 살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나중에 외삼촌에 의해 길러졌다. 외삼촌 집에서 심한 학대를 당했는데 한겨울에도 불려 다니며 일을 했고 사촌들도 그를 하인처럼 부렸다. 조금만 일을 잘못해도 채찍을 맞았다.

한번은 그가 밥을 충분히 먹지 못한다는 불평을 했다가 외숙모에게 들켰다. 그녀는 매우 화를 내면서 그를 나뭇간에 가두고 사흘을 굶겼다. 나중에 또 실수로 도자기를 하나 깨뜨리자 외삼촌이 몽둥이로 머리를 때려 피가 났다. 그는 13살 무렵 심한 학대를 견딜 수 없어 가출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났으니 그 고생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중에 그는 조조의 어느 병사가 데려가 길러졌다. 그 병사는 늘 그에게 조조가 관우를 놓아 준 일과 조조와 유비 등 영웅인물들의 사적을 말해주었다. 나중에 조조와 손권 유비가 적벽에서 한바탕 큰 전쟁을 치렀다. 비록 결국 조조의 실패로 종말을 고했지만 관우는 화용도(華容道)에서 조조를 놓아주는 의거로 의(義)의 내포를 분명히 알렸다.

하지만 조조가 원소를 패퇴(관도대전)시킨 후 적벽에서 참패를 보면서 그는 하나의 도리를 알게 되었다. 바로 인간 세상의 무상(無常)함이다. 승패는 비록 병가지상사지만 한 개체의 생명으로 말하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생사와 연관되는 일이다. 대변혁의 시대에 개인의 생사는 초개와 같아 누구도 파악하고 장악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것을 생각하고 조용히 조조 진영을 떠났다. 어디로 갈까? 매우 막연했다. 나중에 생각하다 해안을 따라 가보자. 어디든 가는 데까지 가보자.

나중에 노산(嶗山)에 가서 그곳에서 도를 배우는 일부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그에게 도가의 인생관점을 많이 들려주었다. 이는 그에게 수련과 인생 귀착 문제에 새로운 인식을 주었다. 나중에 보타산에 갔으며 폐관수련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일부 체험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수련에 대해 더욱 깊은 인식이 있게 되었다. 단 암암리에 이런 것은 모두 그가 가지려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기왕 해변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면 촉으로 가보자고 생각했다. 파촉의 산에는 고인이 있다고 말하니 한번 직접 가보고 싶었다. 보타산에서 촉으로 가는 길은 아주 긴 노정이어서 가는 동안 구걸하며 물어보았다. 길에서 병에 걸려 쓰러지기도 하고 길 가던 좋은 사람에게 구조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걸어서 촉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도원결의와 제갈공명의 칠종칠금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탄했다.

이곳에서 아미산에 올라 금정에서 그는 불광(佛光)을 보았다. 당시 부처나 불법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그 빛은 그저 매우 자비롭고 선하며 광활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생명이 이런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족하리라.

하산한 후 어느 작은 주점에 머물렀는데 한 젊은이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젊은이가 말했다. “노인의 말을 들으니 한번은 제갈공명이 남쪽으로 정벌할 때 남만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귀순하는 것은 우리가 당신들을 통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이 더 빨리 신전문화의 분위기에 녹아들어 장래 진정하게 사람이 돌아가도록 하는 더욱 좋은 법을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 사람들은 매우 놀랐으며 제갈무후의 마지막 구절이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라했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는 여기까지 말하고 옛날에 자신의 양부가 한 말이 생각났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는 것은 북방 민족이 더욱 잘 융합하고 발전하기 위해서이며 장래 진정으로 사람이 되돌아갈 수 있게 하는 대법을 전하는데 기초를 닦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들 둘은 매우 놀라고 흥분했다.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일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했다. 그는 “이왕 현재의 일체는 모두 미래에 기초를 닦는 것이라면 우리가 촉에서 무언가를 해서 호구지책을 만드는 한편 제갈공명 위인됨에 감복해 촉나라의 자손이 되면 좋겠소.”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젊은이도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 두 사람은 성도(成都)에서 작은 음식점을 열었다. 이 집의 특징은 바로 돈이 많으면 많이 내고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싸게 먹는 것이었다. 이 가게를 이용하여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그 동안 많은 흥미로운 일이 있었는데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그들의 그 일세의 생명이 끝날 때 그들은 아이들에게 다시 아미산에 가서 그 서광(불광)을 보라고 했다. 아들들이 가서 정말로 보았는데 그 서광 중에 담담하게 “진(真)”자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동안 고민하다 그 중의 뜻을 깨달았다. “장래 어떤 성자(聖者)가 세상에 와서 사람들이 진정 해탈할 대법을 전하는데 우리는 진심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체는 정말 이루어질 것이다.”

이때의 연분으로 인해 그와 젊은이는 후세에도 늘 함께하게 되었다. 금생에 그들은 일찍 법을 얻었으며 아래 위층에 살고 있고 서로 격려하며 회귀의 여정에 함께 가고 있다.

(2)

서진과 동진 시기는 정치적 암흑기로 전쟁이 빈발하고 종교(불교와 도교)의식이 점점 발전했다. 또 당시 문인들은 세상을 피하는 “청담(清談)”이 유행했고 오호[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다섯 종족]가 중원에 들어오면서 문화의 중심이 점점 강남으로 이동했다. 난세일수록 생명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사람들의 추구와 갈망이 커져갔다. 그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원래 조정의 고위 관리였지만 이런 난세에는 무엇도 오래 갈수 없었다. 화를 피하기 위해 그는 조정이 남쪽으로 천도함에 따라 따라서 내려왔다. 세 아내와 네 아들, 여섯 딸이 차례로 삼년 사이에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 풍토가 맞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생명이 마땅히 끊어져야 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한차례 이별할 때마다 내심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를 피하기 위해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항주(杭州) 교외에 은거했다. 노년의 그는 때로 심정이 좋지 않아 식구(하인들)들을 데리고 밖으로 다니곤 했다. 그는 또 인생의 무상함과 부귀영화의 무상함, 사랑의 무상함, 가족정의 무상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이런 변고에 대하여 또 탄식하고 근심하다 마침내 어느 날 병으로 쓰러졌다.

이렇게 병이 들고 3년이 지났다. 친척과 친구들이 적지 않게 찾아왔으나 누구도 그의 마음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그가 받은 타격은 실로 너무나 컸다. 챙겨줄 아내도 없는데 돈이 있어도 어디에 쓰겠는가? 효도할 자녀가 없으니 집이 있으면 뭘 하겠는가? 매우 슬펐다. 이렇게 그의 병은 날로 심해졌다.

나중에 그는 긴 꿈을 꾸었다. 꿈에서 세 아내와 네 아들 여섯 딸들이 한곳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큰 비가 내려 아내와 자녀들이 다 흩어졌고 그는 매우 상심했다. 막 상심하고 있을 때 흰머리에 동안의 어느 도인이 와서는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불진을 흔들며 그에게 세 아내와 네 딸들의 인연을 그들이 간곳과 함께 보여주었다. 끝나자 그에게 도인이 말했다.

“사람의 이 일생 자체를 너무 중하게 보지 마라. 당신더러 속세의 일생을 잘 이용하라는 것은 무엇을 향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더 생각하고 덕행을 더 많이 베풀라는 것이다. 지금의 난과 다스림은 모두 이후를 위해 자리를 깐 것이다. 늘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체가 마지막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생사를 해탈할 법이 전해져 나올 것이며 때가 되면 당신 아내와 딸들 심지어 나마저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절대 난세의 정에 얽히지 마라.”

그는 이 말을 듣고 얼른 도인에게 상세한 것을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곧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다급하게 도처에서 그 도인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더욱 급해졌고 너무나 급해지자 곧 깨어났다. 깨어난 후 알고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깨어난 후 그는 침상에 며칠을 누워 있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 도인의 말이 매우 그럴듯했다.

이후 더는 침울에 빠지지 않았고 자기 여생을 이용해 주변 백성들에게 좋은 일들을 했다. 백성들도 그에게 매우 감격해 그를 ‘선인(善人)’이라 불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지 백성들이 그를 위해 무덤을 세워주었다. 이후 매우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해마다 아주 융숭하게 그를 기념했다.

이후의 전생하는 중에 그는 또 아주 휘황했다. 명나라의 황제도 되었고 청나라의 패륵(貝勒 역주: 청나라 귀족의 칭호)이나 중화민국 시기 항일 장군이 되었다. 이번 생에는 동북에 태어났다. 본래 마땅히 법을 얻어야 했으나 선행을 베풀다 도리어 업신여김을 당할까 두려워 대법 수련을 거절했다. 비록 대법에 대해 아주 좋은 감정이 있고 정념이 있으며 가족들도 배우고 있지만 필경 자신은 법을 얻지 못했으니 매우 애석하다. 아직도 기회가 남아있으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3)

남북조시기에 북방 소수민족의 정권이 건립됨에 따라 이들이 한화(漢化)되는 상황이 날로 뚜렷해졌다. 나는 전에 대동의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에 가서 북위 시기의 조각을 본 적이 있는데 호풍(胡風)의 흔적이 뚜렷이 있었다. 당나라 시기처럼 그렇게 웅대하지 않았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선비족 사람이 법을 찾은 족적을 써보기로 한다.

이 선비족 사람은 요서주랑(遼西走廊)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석각(石刻)을 좋아해 시간만 나면 바위에 조각을 새기곤 했다. 당시 이곳에 만불당(遼西走廊) 석굴이 이미 뚫려 있었기에 그는 늘 달려가 보았으며 그곳 장인들에게 조각의 기예를 배웠다.

나이가 들자 장사하던 어느 친척이 그를 데리고 외지에 갔다. 장사를 하는 틈틈이 그는 세심하게 각 지역 조각 예술에 주목했다. 또 현지 장인들을 찾아가 기예를 익혔다. 나중에 어느 장인을 만났는데 그 장인은 그가 매우 재주가 있는 것을 보고 제자로 삼아서 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며 조각을 했다.

사제 두 사람이 낙양에 갔을 때 용문 석굴이 이미 뚫렸다는 말을 듣고는 들어가 보았다.

북위 시기에 석굴을 하나 뚫는 것은 매우 큰일이었다. 도성 부근에서는 더욱 그랬다. 당시에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통치자가 사회 안정에 불교가 유리하다고 느껴 널리 퍼뜨렸다. 불상 조각은 사람들에게 현실 속에서 정신적인 의지와 위로를 주는 일이었다. 이는 인간의 표면적인 이치에서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심층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목적은 부처수련의 문화와 내포를 다지기 위한 것이다. 이런 내포는 단지 경서만을 매개체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이 그 내포를 꼭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상은 일반적으로 경건하게 부처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리 큰 변화가 없다. 또 불상은 사람에게 가장 직관적인 인상을 준다. 속세에 있는 사람은 어쩌면 글자를 몰라 불경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상을 볼 때면 그 선과 자비의 이념이 무형 중에 사람의 내심 깊은 곳에 녹아든다. 하물며 불상이 개광한 후에는 자연히 부처님의 끝없는 법력이 있다. 나중에는 또 전적으로 불교 수련하는 사람이 있어서(비구와 비구니) 그들은 불법을 널리 알리고 부처 수련의 문화를 닦는데 매우 큰 작용을 했다.

당시 중국인들도 일부 신선이나 요괴 등의 일을 믿었기 때문에 불가사상이 일단 들어오자 아주 쉽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량하기 때문이다. 일부 악한 표현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당시 용문석굴의 조각상은 경험과 기술의 문제로 조각상에 ‘사람’의 요소가 매우 많았고 또 그리 성숙하지 못했다. 비록 많은 장인들이 조각을 만들 때 부처님의 점화를 받아 어떻게 불상을 만들고 부처님의 형상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조각할 때는 ‘사람의 요소가 그 속에 많이 섞여 들어갔다.

그들 사제는 여기에서 한동안 관찰하고는 석굴을 파는 경험에 대해 많은 결론을 지었다. 나중에 마침 굴을 파던 어느 장인이 파는 과정에서 다쳐서 더 이상 팔 수 없게 되었다. 돈을 낸 사람은 곧 두 사람을 찾아왔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전 장인이 판 불상은 다만 머리 부분뿐이었고 목 아래는 미완성이었다. 그 장인은 대체적인 그림을 천에 그려 그들에게 남겨주었다. 그러나 사도 두 사람도 차례로 부처님의 모습을 꿈에서 보았다. 그런데 장인이 남겨준 그림과는 같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몹시 괴로웠다. 장인이 남겨준 그림에 따라 파면 무슨 의거할 한 만한 것이 없었고 꿈에서 본 대로 하자니 돈을 낸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곤란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조각 과정 중에 부주의로 작은 상처를 입었고 돌아가 휴식했다. 꿈에서 그는 삼천대불(三千大佛)을 보았다. 그것은

삼천 대불이 동시에 나타나니광망이 만갈래 놀처럼 펴지네끝없는 위엄의 법상이 각종 신통이 천지에 곱구나

三千大佛同時顯光芒萬千霞光綻無邊威嚴法像異各展神通天地絢!

그가 자세히 쳐다보니 정말 다친 석공이 그린 불타의 모양이었다. 단지 자태가 더 풍부했고 옷이 더 가뿐했다. (비록 이렇다 해도 불타는 한 개인의 경지와 층차에 근거한 것이며 심지어 사람의 관념과 사회 상태에 부합하여 나타나지 그가 소재한 층차의 근본 진상과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깨어난 후 그는 또 며칠을 쉬었고 계속해서 사부와 석굴을 팠다. 파는 과정 중에 그는 사부에게 자기가 꾼 꿈을 들려주었다. 사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생각대로 석굴 상을 고집하지 않았다.

설사 원래 석공이 그린 도형대로 팠더라도 이 자체는 이미 해당 시대와 민족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매우 야위었다. 게다가 그들 자신의 요소가 있어서 최후에 판 불상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 되었다.

어찌되었던 필경 그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팠기에 불상은 다 판 후 매우 영성이 있었다. 돈을 기부한 사람도 복을 많이 얻었다. 이렇게 하여 더욱 많은 기부자들이 그들 사도를 고용하여 석굴을 팠다.

이렇게 하여 그들 두 사람은 여기에서 십여 년을 일했다. 그들은 이 기간 모두 가장 경건하게 이 일을 했으므로 판 불상이 모두 영험했다. 한번은 큰 비가 내렸는데 그들이 이 기회에 잠시 휴식하려고 했다. 그러나 큰 비가 오니 불상을 파는데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와서 보기로 했다. 이번에 와보니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몇 존의 불상은 마치 회의를 하는 것처럼 매우 떠들썩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 사도는 이 상황을 보고는 얼른 땅에 엎드려 공손히 들었다. 한 불상이 다른 불상에게 말했다. “여기서 그들 사제가 우리를 파는 목적은 수천 년의 부처수련 문화를 남겨 놓아 사람들이 부처와 불법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장래 진정하게 사람들이 되돌아 갈 수 있는 불가대법이 홍전할 때 우리 역시 공덕이 있는 것이오.” “그들 두 사제가 만일 때가 되어 그 만고에 얻기 힘든 정법을 얻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까울 거야.” 다른 불상이 말했다…

잠시 후 날이 맑아져서 한 갈래 무지개가 석굴의 바로 상공 위에 나타나 눈부시게 비쳤다. 이때 불상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제 두 사람은 곧 바보가 된 것처럼 멍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식사를 하라고 했고 그들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한 생명으로서 생사를 초월해 윤회를 끝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이 힘들게 찾아 다녔으며 힘들게 찾고 있었는가. 석굴을 파다가 불타의 이 같은 게시를 얻었으니 실제 생명의 큰 행운이었다! 이때부터 그들 사도는 불경 연구를 시작했고 고승에게 수불(修佛)방법을 배웠다. 이런 것이 모두 오늘날 법을 얻는데 좋은 기초를 다져주었다.

금생에 그들은 차례로 법을 얻었다. 다만 종전의 ‘사부’는 견정하지 못했고 당시 ‘제자’는 견정하게 지내왔다. 비록 금생에 성격이 게을러 늘 동료와 친구의 조롱을 받지만 그는 뼛속으로 ‘진실한’ 사람이다. 친구 주위 사람들에게 모두 진실하게 대한다.

바로 다음과 같다.

삼국 군웅이 지극한 의를 연역하고서진 통일 후 오랑캐 난립하며동진 때에 강남으로 의관이 건너가고불상을 조각하여 북조가 일어나는 연을 맺었네

三國群雄演至義西晉統一胡亂起東晉江南衣冠渡造像結緣北朝起!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5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