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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목기 시즌 3 (38)

화본선생

【정견망】

자리에서 청허는 여전히 시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심지어 껍질이 있는 음식을 직접 까서 요진에게 주었는데, 이 때문에 요진은 무척 무안했다.

요진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이러시면… 요진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시녀들에게 시키시면 되실 터인데.”

청허가 말했다.

“괜찮소, 괜찮소. 시녀들은 서 있고 본왕은 앉아 있으니, 당연히 내가 까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소. 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누가 까든 매한가지요.”

청허의 이 말을 들은 요진의 마음속에는 더욱 깊은 경외심이 일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었다. 잔에는 여전히 복숭아 즙이 담겨 있었으나 요진은 이를 술 삼아 청허에게 한 잔 권하며 말했다.

“사법천신이 된 지 수년이 흘렀지만, 부끄럽게도 동주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동주에 와보니 백성들은 평안하고 생령들은 즐거워하며, 온통 상서롭고 행복한 광경이라 저도 모르게 동왕(東王)님께 공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며칠간 동왕님과 지내며 더욱 안목이 넓어졌습니다. 한 주의 왕이 이토록 소탈하고 겸허할 수 있다니, 전에는 정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입니다……”

청허는 요진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조용히 들으며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요진이 또 말했다.

“이번에 처량한 몰골로 찾아왔음에도 동왕님께서 저와 곤륜의 난제를 해결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를 세심히 보살펴 주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요진의 뺨은 서서히 붉어졌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미소 띤 얼굴로 청허를 달콤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요진은 마음속으로 감격해 마지 없습니다. 훗날 동왕님께서 저희 곤륜산에 자주 들러주시어, 저희의 감사와… 감사와 흠모하는 마음을 달래 주시길 바랍니다.”

요진은 발그레한 얼굴로 목소리에 꿀이라도 바른 듯, 물기 어린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사의 말을 마친 뒤 서서히 눈을 내리깔며 청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청허는 대답이 없었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청허는 ‘흠모’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양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요진이 이토록 솔직하고 대담할 줄은 몰랐기에 청허는 한동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옆에 있던 어린 시녀가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보고 나지막이 불렀다.

“임금님, 임금님……”

청허는 시녀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그 바람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청허는 지금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운 데다 상황이 무척 겸연쩍어지자, 잠시 나가서 냉정을 되찾고 싶어졌다. 그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요진은 청허의 이런 재미있는 행동을 보고 그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생각할수록 우스워서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희 임금님은 낯이 참 얇으시구나. 칭찬을 조금도 못 견디시니!”

곁에 있던 시녀들도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에는 낯이 아주 두꺼우신데, 당신만은 다르신가 봅니다. 당신의 칭찬을 특별히 더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겠지요!”

요진이 웃으며 시녀들에게 말했다.

“감히 임금님의 낯이 두껍다고 말하는 것이냐? 보아하니 너희 임금님께서 평소 너희를 무척 너그럽게 대하시는 모양이구나!”

시녀들이 말했다.

“네, 저희 임금님은 정말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평소 저희에게 큰 절도 올리지 못하게 하시고 저희를 아주 잘 대해주십니다.”

요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말했다.

“음, 나도 그런 왕이심을 볼 수 있구나. 하지만 엄격하게 다스려줄 사람이 없으면 동주에서는 괜찮겠지만—이곳 생령들은 살기(戾氣)가 전혀 없고 심성도 높으니까—남주 같은 곳이었다면 아마 통하지 않았을 게야……”

요진이 문쪽을 바라보자 시녀들이 말했다.

“천신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는 마음이 진정되면 스스로 돌아오실 겁니다.”

요진은 ‘진정’이라는 말을 듣자 또다시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설마 저 분도 마음이 흔들리신 걸까?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어찌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어……’

잠시 후 청허가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청허가 말했다.

“아… 본왕이 방금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 다른 곳에 둔 물건을 가져왔소.”

요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살짝 만져보니 목걸이 같았다.

요진이 고개를 숙여 보니 뜻밖에도 노인(路引)이었다! 알고 보니 청허는 노인을 되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목걸이로 엮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오.”

청허가 웃으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요진은 목에 걸린 노인을 매만지며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청허 역시 웃음 띤 얼굴로 말이 없었다.

요진은 생각했다.

‘이토록 나를 대해주시니…. 아무래도 이분의 진면목을 보아야겠어.’

요진이 막 청허에게 얼굴을 가린 구름을 벗어 진면목을 보여달라고 청하려는데, 뜻밖에 청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왕이 천신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요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청허가 말했다. “본왕이 듣기로, 사법천신에게는 유리정곤검(琉璃淨坤劍)이라는 보검이 있었다고 하던데, 사(邪)를 제거하는 날카로운 무기로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고 사악한 무리들을 벌벌 떨게 했다고 들었소. 그런데 또 듣기로는 천신께서 일찍이 이 검을 봉인하여 수만 년 동안 쓰지 않았다고 하던데……”

청허가 이 일을 꺼내자 요진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방금까지 선홍빛으로 물들었던 뺨과 올라갔던 입꼬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왕이 보니 천신의 머리에 정말 그 유리 비녀가 없구려. 소문이 대부분 사실인 모양이오?”

요진은 침묵을 지키다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청허가 다시 말했다.

“또한 천신께서 요 몇 년간 요괴를 베고 마귀를 없애느라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소. 때로는 사마들과 맨손으로 싸우면서도 끝내 이 검을 쓰지 않으셨다니, 본왕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한데 왜 그런 것이오?”

요진은 청허가 답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그녀가 말했다.

“왜냐하면… 제가 이 검으로… 한 친구를 다치게 했기 때문입니다.”

청허는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

“어떤 친구였소?”

요진이 목이 메어 말했다.

“그는… 저를 정말 너무나도 잘 대해주었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만… 이 검으로 그를 찔렀습니다.”

청허는 요진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왜 그를 찔러야 했소?”

요진은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저를 구하기 위해, 제가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 때뮨에 목숨을 잃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으로 제 목숨을 바꿨습니다.”

이때 요진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가득 찼다.

청허는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다시 나지막이 물었다.

“나중에야 다 알게 된 것이오?”

요진이 비통하게 말했다.

“네,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하셨는지, 전업술로 제 상처를 치료해 주셨다는 것도요….. 저를 치료하느라 혈흔이 낭자해진 그 장포들을 여전히 제 곤륜산 밀실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저도 자주 가서 제를 올리며 추모하곤 합니다……”

요진이 말을 멈추자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가빠졌고, 청허는 서둘러 시녀에게 수건을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청허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유리정곤검을 봉인한 것이 이것 때문이오?”

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일순간 침묵에 빠졌고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요진은 눈물을 닦고 몸을 돌려 말했다.

“만 년을 봉인한다 해도, 어쩌면 이 빚과… 이 정(情)을 다 갚진 못할 것입니다……”

청허는 펑펑 우는 요진을 보며 마음속으로 깊이 감동했다. 그는 요진이 겁난(劫難)을 겪을 당시 자신이 베풀었던 호의를 이토록 깊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또한 자신을 위해 유리검을 수만 년이나 봉인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동왕님, 제가 좀 피곤하여 돌아가 쉬고 싶습니다.”

요진은 이 말을 남기고 참담한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청허가 말했다. “알겠소, 알겠소. 본왕이 데려다주겠소.”

요진이 차갑게 말했다.

“아닙니다, 길을 이미 익혔습니다.”

말을 마친 요진은 청허에게 예를 올렸고, 청허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자리를 떠났다.

요진은 방으로 돌아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택, 너한테 미안해.”

밤이 깊었으나 요진은 여전히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사방을 좀 거닐어보기로 했다.

요진은 침전을 나와 밝은 달빛을 받으며 낮에 동주왕과 함께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기쁨이 솟아났다. 그러나 아택을 생각하면 다시금 죄책감이 밀려왔다…

“동왕님께서 내게 마음이 있으시고, 나 또한 그분을 흠모하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아택의 일편단심에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어?”

요진이 혼잣말을 했다.

요진은 자신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 사분오열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마침 맑은 연못 하나가 보이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자 연못 속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연못물은 과연 시원했다. 요진은 물속에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힘을 뺀 채 천천히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연못 바닥에 닿은 요진이 눈을 뜨자 굴이 하나 보였는데, 그 안에서 촛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진은 무의식적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뜻밖에도 그 굴은 밀실로 통해 있었는데, 밀실 안은 무척 보송보송하고 물기 하나 없었다.

요진은 밀실 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석문 입구에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은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요진은 조용히 그 석문에 다가갔다. 안에는 특별한 것은 없었고 고화(古畫) 몇 폭이 모셔져 있을 뿐이었다.

요진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림 속에는 인면사신(人面蛇身 사람 얼굴에 뱀의 몸)의 자태가 만 가지 형상인 여신(女神)이 있었다. 그림 위에는 ‘영와대신(靈媧大神)’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요진은 서둘러 몸을 굽혀 절을 올렸다. 몇 번 절을 한 뒤 다시 일어나 자세히 뜯어보며 생각했다.

‘이분이 바로 여와낭랑(女媧娘娘)이시구나, 정말 아름다워. 나는 여와낭랑을 처음 뵙는데 어찌 이토록 눈에 익은 것일까?’

요진은 그림을 본 뒤 방 안의 정당(正堂)으로 향했다. 그곳 정면에도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

요진이 보니 그림 속에는 인면룡신(人面龍身 사람 얼굴에 용의 몸)의 신이 있었다. 그 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그림 옆에 적힌 ‘복희대제(伏羲大帝)’라는 커다란 네 글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굽혀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뒤 생각했다.

‘오랫동안 복희대제를 흠모해 왔는데 이제야 진면목을 뵙는구나.’

요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더니 외쳤다.

“아니? 이분은 황제(黃帝)님이 아니신가?”

요진이 다시금 자세히 살피니 눈매며 얼굴형, 신태(神態)까지 황제와 똑같았다!

요진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찰나, 무심코 곁눈질을 하다가 방 한구석에 형체가 온전치 못한 그림 한 폭이 걸린 것을 보았다.

요진이 보니 그림은 비록 훼손되었으나 여신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목구비는 이미 알아볼 수 없었다. 이 그림은 법력(法力)으로 짜 맞춘 듯 보였는데 천목(天目)으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요진이 이 그림을 만지며 생각했다.

‘이 그림은 무언가에 의해 폭발한 듯한데, 그 후 파편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인 모양이구나.’

요진은 이 그림 아래에 이미 뜯어본 낡은 편지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진이 무심코 한 통을 집어 보니 보낸 이가 서왕모(西王母)였다. 내용은 이미 흐릿했으나 필적은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요진은 이 편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서왕모님의 글씨도 대단할 건 없군! 내 글씨와 비슷하잖아!”

요진이 다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니 옆자리에 또 다른 그림이 있었고 거기에는 ‘호천대제(昊天大帝)’라고 적혀 있었다.

요진이 그 그림을 향해 눈을 돌리자, 그녀의 눈은 점점 커졌고 무척 경악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요진은 멍하니 호천대제를 바라보았다. 이 호천대제는 아택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한참을 뜯어보니 볼수록 닮았고, 점차 요진의 경악은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요진은 서둘러 황급히 밀실을 빠져나왔다.

연못 위로 올라온 요진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여와낭랑, 복희대제, 서왕모의 편지, 그리고 아택과 똑같이 생긴 호천대제를 만난 것이다.

요진은 아직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채 물가에 앉아 혼잣말을 했다.

“환경(幻鏡 환상의 장면)이야, 환경일 뿐이야…”

방금 ‘아택의 그림자’를 보았기에 요진은 더욱 참담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 뜨거운 눈물은 조금씩 말라갔고, 달밤에 얼룩진 눈물 자국만이 남았다. 이 밤, 요진의 마음이 어떤 갈등과 고통을 겪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날이 밝아오려 할 때 찬란한 성하(星河)가 여전한 것을 보고 요진은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 네가 치료해준 은혜에도, 너의 가슴 아픈 고통에도, 무엇보다 너의 진심에도 내가 죄를 지었어……”

요진은 두 눈을 감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며 결연히 말했다.

“요진은 은혜를 저버리는 불의(不義)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 내가 네게 빚진 것은 내 평생의 고독으로 갚아줄게.”

……..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