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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경지: 한산의 <요요한산도杳杳寒山道> 해석

청풍

【정견망】

杳杳寒山道 (요요한산도)
아득하고 깊도다, 한산으로 가는 길

落落冷澗濱 (낙낙냉간빈)
쓸쓸히 차가운 시냇가에 있네,

啾啾常有鳥 (추추상유조)
지저지저 새소리만 항상 들릴 뿐

寂寂更無人 (적적경무인)
적막하고 고요하여 오가는 이 없구나

淅淅風吹面 (석석풍취면)
스산한 바람은 얼굴을 스쳐 불고

紛紛雪積身 (분분설적신)
풀풀 날리는 눈이 몸 위에 쌓이네

朝朝不見日 (조조불견일)
아침마다 해를 볼 수 없으니

歲歲不知春 (세세부지춘)
해마다 봄이 오는 줄도 모르는구나

– 한산 (寒山) –

이 시는 당나라 은둔 시인인 한산의 지은 것이다. 한산의 생몰은 알려져 있지 않고, 자, 호, 모두 알 수 없다, 당나라 장안 사람이다. 문인집안 출신이며 과거 시험에 여러번 낙제한 후 출가 수행했다. 30세 경에 절강 동쪽 천태산에 은거하여 수도하며 백여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경력으로 추측하면 70여년을 수도했으니 진정 수련인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가 쓴 경치를 쓴 시는 일반 문인들이 산수에 마음을 기탁하고 감회를 토로한 작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시를 읽으면 강렬한 두가지 느낌을 주는데 하나는 차가움이고 하나는 적막함이다.

설경은 원래 춥지만, 시 속의 추위는 단순한 감각의 추위가 아니라 맑고, 텅 비며, 걱정 없는 경지의 추위이다. 적정(寂静 고요함)도 황량함이 아니라, 속세를 떠난 후의 명료함과 확고함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종원의 《강설》과 상당히 유사하다.

千山鳥飛絕,萬徑人蹤滅。孤舟蓑笠翁,獨釣寒江雪

천산에 새 끊기고 만길에 인적도 없네
외로운 배 삿갓 쓴 노인 눈덮인 강에서 낚시하네

단순한 풍경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담고 있다. 한산은 눈, 바람, 한산, 깊은 계곡을 통해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일에만 몰두하지 않고 마음에도 아무런 장애가 없는 생명 상태를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긴 외로움도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 견딜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수련이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시 속의 경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아름다우며, 고요하고 맑아 사람들의 마음을 동경하게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랫동안 그 속에서 생활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상황일 것이다. 즉, 깨끗하며 고생이 심상치 않다. 긴 고독은 수련자에게 있어 그 자체로 매우 넘기 어려운 관문이다. 근기가 얕은 사람은 감당하기 어렵거나 심지어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지만, 한산은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어 그 수련이 깊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산과 경우와 정신이 비슷한 사람은 동진의 시인인 도연명도 있다. <귀원전거, 기일 歸園田居·其一>도 수행자의 심경을 쓴 것이다.

少無適俗韻 (소무적속운) 어려서부터 세속의 가락에 맞지 않았고
性本愛丘山 (성본애구산) 성품은 본래 산과 언덕을 사랑하였네
誤落塵網中 (오락진망중) 잘못하여 티끌 같은 속세의 그물에 떨어져
一去三十年 (일거삼십년) 한 번 떠나니 어느덧 서른 해가 흘렀구나
羈鳥戀舊林 (기조련구림) 새장에 갇힌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池魚思故淵 (지어사고연) 연못의 물고기는 예전의 깊은 못을 생각하는 법
開荒南野際 (개황남야제) 남쪽 들판 끝에서 거친 땅을 일구려고
守拙歸園田 (수졸귀원단) 서툰 본성을 지키려 전원으로 돌아왔네
方宅十餘畝 (방택십여무) 집터는 열 마지기 남짓하고
草屋八九間 (초옥팔구간) 초가집은 여덟 아홉 칸이라네
榆柳蔭後簷 (유류음후첨)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는 뒷처마에 그늘을 드리우고
桃李羅堂前 (도리라당전)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집 앞에 늘어서 있네
曖曖遠人村 (애애원인촌) 멀리 마을은 아스라이 보이고
依依墟裏煙 (의의구리연) 마을 어귀에선 밥 짓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네
狗吠深巷中 (구폐심항중) 개는 깊은 골목 안에서 짖어대고
雞鳴桑樹顛 (계명상수전) 닭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우는구나
戶庭無塵雜 (호정무진잡) 집 안뜰엔 속세의 번잡함이 없고
虛室有餘閑 (허실유여한) 텅 빈 방안엔 넉넉한 한가로움뿐
久在樊籠裏 (구재번롱리)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複得返自然 (복득반자연)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왔노라
– 도연명 (陶淵明) –

도연명도 역시 수도인이다. 다만 한산과 비하면 생활 환경은 온화하고 윤택하며 전원적인 면으로 치우쳐 있다. 청한(清寒)은 좀 덜고 인간 세상의 연기(人間煙火)는 는 좀 더해진 편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떠날때까지 20 여년에 불과하니 수행 시간도 한산에 못미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그 수련 층이 낮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수행의 높고 낮음은 결코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심성에 달렸다.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가 근본이다.

설사 깊은 산 속에 처해 있더라도 마음에 명리정욕을 버리지 못하면 속인과 별다름 없다. 반대로 비록 번잡한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내심이 맑고 외부 환경이 움직이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높이 수련할 수 있다.

옛사람들이 말한바, “소은(小隱)은 들야(野)에 은거하고, 중은(中隱)은 저자거리(市)에 은거하며, 대은(大隱)은 조정(朝)에 은거한다”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조정에서는 인간관계가 나무뿌리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익과 손실의 득실이 거대하여 심성의 단련이 유독 격렬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세속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면, 오히려 수행의 높낮이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

시정(市井) 가운데에도 비록 분쟁은 있으나 조정(朝堂)의 치열함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며, 산야(山野) 같은 곳은 갈등이 상대적으로 더욱 적으니 심성을 끌어올리기는 오히려 쉽지 않다.

이것으로부터 보건대, 한산(寒山)의 ‘냉(冷)’과 ‘적(寂)’은 세상사를 회피한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한 청정한 수행의 길이다. 그의 시가 이토록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 초연함이 이미 속세의 티끌 위에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