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운수와 풍수가 좋지 않은데도 어떻게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을까?

안단

【정견망】

현대 중국에는 오로지 돈을 벌고, 어려움을 해소하며, 재앙을 소멸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신불(神佛)에게 빌고 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불에게 구하는 바가 있는 것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만약 덕행에 결함이 있다면 신불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또한 어떤 이들은 풍수에 기대를 걸어 운을 돌리고 명을 바꾸길 희망한다. 하지만 만약 행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해치는 등 덕을 손상시키는 방식을 취한다면, 비록 풍수 보당(寶地)을 얻는다 해도 부귀를 오래 누리기 어렵다. 예부터 지금까지 “첫째가 덕이고, 둘째가 명이며, 셋째가 풍수다(一德二命三風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순서이며, 사서에 기록된 실화들도 모두 이 순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청나라 때 복주의 증(曾) 씨 가문은 ‘오자등과(五子登科,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함)’로 한때 명성을 떨쳤다. 이 다섯 형제의 아버지가 바로 가경 6년(1801년) 진사에 급제한 후 국자감 학정, 강서 신건현 지현을 거쳐 의녕주 지부까지 오른 증휘춘(曾暉春, 자 제봉霽峰)이다. 다섯 아들 중 세 명은 진사가 되었고, 두 명은 거인이 되었다. 후에 그 손자인 증조오(曾兆鼇, 자 효창曉滄)와 그의 장남 증종언(曾宗彥, 자 군옥君玉) 또한 모두 진사에 급제하여 지부 급의 지방관을 지냈다.

4대에 걸쳐 연이어 진사에 급제했으니,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상 묘 자리가 명당인 덕분이라 여길 법하다. 하지만 사실 증 씨 가문은 증휘춘의 조부 세대에 풍수 명당을 남에게 빼앗긴 적이 있다. 당시 그의 조부는 아직 출세하기 전이었으며 단지 가난한 선비에 불과했다. 한번은 성이 척(戚) 씨인 집안에서 증 씨 가문의 묘 자리를 탐냈다. 이 땅을 빼앗기 위해 척 씨 가문은 증 씨 가문을 관아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지역의 권세와 인맥을 믿고 척 씨 집안은 몰래 증 씨네 묘지에 묘비 하나를 파묻어, 이 땅이 예전부터 척 씨 소유였음을 증명하려 했다.

관아 사람이 조사하러 와서 묘지 한 귀퉁이를 파헤치다 그 묘비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땅을 척 씨 집안에 판결해 주었다. 증휘춘의 조부는 척 씨 집안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내와 양보를 택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자기 조상의 관을 하나하나 파내어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여러 해 뒤, 척 씨 가문의 후손들은 과연 관직에서 꽤 성취를 이루었다. 그 풍수 명당이 어느 정도 작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증 씨 가문의 후손들도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풍수 명당을 잃었음에도 증 씨 가문은 척 씨 가문과 대등한 성취를 이루었다. 척 씨 가문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증 씨 가문은 오히려 더욱 흥성해졌다. 쇠락해가는 척 씨 가문에 비해 증 씨 가문은 오자등과와 4대 연속 급제라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보아하니 풍수가 미치는 작용은 지극히 제한적인 듯하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사람에게 속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데, 그 후반부는 바로 “보응이 결국 찾아온다”는 것이다. 옛말로 하자면 “사람은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늘의 보살핌을 받기를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증 씨 가문이 결국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 행운아가 된 것은 증휘춘을 포함한 전후 3대 가문이 살생을 하지 않은 선행과도 관련이 있다.

지방지를 편찬하는 데 참여한 한 문인은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건륭, 가경, 도광, 함풍의 4대에 걸쳐 황제의 중용을 받았던 반세은(潘世恩, 자 회당槐堂, 호 지헌芝軒)이라는 관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300년 이래 제일의 복 있는 사람”이라 불렀는데, 그는 생전에 태부(太傅)로 봉해지고 두 번이나 황제가 신입 진사들을 위해 베푸는 ‘경림연’에 초대받은 유일한 인물로, 장원 출신이면서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 본인도 품행이 단정하고 고결한 비범한 인물이었으나, 사료에 따르면 반 씨 가문이 소주(蘇州)에서 발복하여 가업이 번성하고 자손이 번창한 명문족이 된 것은 반 씨 가문의 조상 중 한 선조와 큰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 선조는 평생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을 받들어 행했다. 이 책은 서두에서 “화와 복은 문이 따로 없고 오직 사람이 스스로 부르는 것이니, 선악의 응보는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이후의 구절구절이 모두 사람들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가르친다. 선조는 책의 가르침에 따라 항상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소금 장수를 업으로 삼아 생활이 넉넉했다. 매년 섣달 중순이 되면 그는 집에서 은 200~300냥을 꺼내어 한 몫에 3~5냥씩 여러 개의 작은 천 주머니에 나누어 담았다. 그러고는 낡은 거친 옷을 입고 외딴 마을과 골목을 누볐다.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해 설을 평안히 낼 수 없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은을 나누어 주었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끝내 그 돈을 누가 주었는지 알지 못했다.

여러 해 동안 선을 쌓은 후, 이 선조는 우연한 기회에 풍수 명당을 얻게 되었다. 한 지관이 보고는 이 땅에서 장원이 나올 것이라 했는데, 나중에 과연 그대로 응했다. 그러나 당시 그 선조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풍수는 사실 땅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 《태상감응편》 같은 선서(善書)야말로 최고의 풍수책이다.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풍수가 나빠질 리 없다.” 반 씨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익숙한 가르침이었다. 이 ‘가훈’의 가르침 아래 반 씨 가문의 자손이 번창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가경 연간, 소주에 오정진(吳廷珍, 자 상유上儒)이라는 관원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천성이 총명했으나, 10살 되던 해 꿈속에서 한 신명을 만났는데 그 신명이 말하기를 “너는 평생 공명을 얻지 못할 것이니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다. 또한 수명도 길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물었다. “제 평생이 이미 정해진 것입니까? 바꿀 방법이 없습니까?” 신명은 말없이 글 한 줄을 써서 보여주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때부터 그는 《공과격(功过格)》 같은 선서(善書)를 읽기 시작했고, 매일 책에 적힌 대로 자신의 선악 언행을 기록하고 살폈다. 후에 그는 무진년(1808년) 탐화(探花, 과거 3등)에 급제했을 뿐만 아니라, 계유년(1813년)에는 고관의 신분으로 운남의 향시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30세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는 신명의 말이 참으로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본래 과거와 인연이 없었으나 탐화로 급제한 것은 그의 명수가 분명히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그가 덕을 쌓고 선을 행하며 생겨난 무형의 힘이었다.

참고자료: 《북동원필록(北東園筆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