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서(望舒)
【정견망】
북송 인종(仁宗) 가우(嘉祐) 2년의 과거 시험은 후세에 천년 과거 제1방(榜), 용호방(龍虎榜)이라 불린다. 전국에서 40만 명이 참가하여 388명의 진사를 선발했다. 이번 기수 진사들은 그야말로 별들의 모임이었는데, 나중에 문학, 사상, 정치 분야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 거장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소식(蘇軾 소동파), 소철(蘇轍), 증공(曾鞏), 증포(曾布), 장재(張載), 정호(程顥), 장돈(章惇), 장형(章衡), 여혜경(呂惠卿) 등이 그들이다. 《송사(宋史)》 열전에 기록을 남긴 인물만 24명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신선하고 탈속한 《형상충후지지론(刑賞忠厚之至論)》이 수많은 답안지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 주심관 구양수(歐陽修)의 감탄을 자아냈다. 구양수는 이 글을 1등으로 확정하려 했으나, 자신의 제자인 증공이 쓴 글이 아닐까 의심했다.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2등을 주었다. 방을 붙인 후에야 이 글의 저자가 증공이 아니라 소식임을 알게 되었다.
소식은 자가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철관도인(鐵冠道人)이다. 북송의 저명한 문학가, 서예가, 화가이며 북송 중기 문단의 영수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송 사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호방파의 개창자로 존경받는다. 시, 사(詞), 문장, 서예, 그림 등 다방면에서 매우 높은 성취를 이루었으며, 그의 작품은 재기와 감성을 겸비하고 다양하여 세상 사람들의 추앙과 찬송을 받았다.
소동파는 평생 북송 인종, 영종, 신종, 철종, 휘종의 다섯 조대(朝代)를 거치며 병부상서, 이부상서, 예부상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변법파와 보수파의 투쟁이 치열했는데, 소식은 강직하고 정의로우며 독자적인 주관이 뚜렷했다. 정책의 실제 폐단에 대해 직언을 아끼지 않다 보니 많은 사람의 눈 밖에 났고, 양측 모두로부터 배척과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관직 생활 40년 중 유배 생활이 30년이었으며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충심을 바꾸지 않고 직무에 진력했다.
조정에서나 지방에서나 소식은 시종일관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을 견지하며 독창적인 견해와 주장을 제시했다. 그는 많은 실질적인 일을 해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청 규정을 개정해 수운(水運)의 폐해를 피하게 했고, 법을 백성에 이롭게 하여 나쁜 법에 저항했다. 수험생을 배려해 고사장을 정화했으며, 난병(亂兵)들을 계책으로 처단하고 포교를 소집해 도적을 잡았다. 사재를 털어 재난을 구휼하고 백성을 구했으며, 홍수를 피하지 않고 서주(徐州)를 보전했다. 수리를 일으켜 수재를 방비하고, 의위(儀衛)를 숙정하며 군정(軍政)을 정돈했다. 영아 살해를 금지하고 고아를 거두어 기르는 등 수많은 공적을 남겼다. 소식은 치수의 명사이기도 하여 항주(杭州), 서주, 혜주(惠州)에는 모두 소제(蘇堤 소동파가 만든 둑)가 있다. 그는 천하를 널리 사랑하여 백성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 항주의 많은 집에는 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해남(海南)에는 동파서원과 소공사(蘇公祠)가 있다.
소식은 다른 많은 고관이나 문인들처럼 딱딱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성격이 외향적이고 낙천적이며 활달하여 어디서든 잘 적응했다. 또한 기지가 넘치고 유머러스하여 말솜씨가 뛰어났는데, 스스로 위로는 옥황상제와 함께할 수 있고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와도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자신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나의 글은 만 섬의 샘물과 같아서 땅을 가리지 않고 솟아나 평지에서 도도히 흐르니, 하루에 천 리를 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라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언뜻 거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진정 재능이 있었기에 사실을 말했을 뿐이며 그 천진함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불인(佛印) 선사는 소식의 절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소식이 불인을 만나러 갔다가 방 안에서 고기 굽는 냄새를 맡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물고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옆에 경쇠(磬)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소식은 내색하지 않고 불인에게 “향양문제춘상재(向陽門第春常在 볕이 잘 드는 집안에는 늘 봄이 머문다)”라는 상련을 내며 하련을 맞추게 했다. 불인이 즉시 “적선인가경유여(積善人家慶有餘 선을 쌓은 집안에는 남는 경사가 있다)”라고 대답하자, 소식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오, 과연 경(磬) 속에 물고기(魚)가 있었군, 어서 꺼내게나”라고 말했다. (중국어에서 경쇠 경[磬]과 경사 경[慶], 물고기 어[魚]와 남을 여[餘]의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농담이다.) 불인은 그제야 속은 것을 알고 허탈하게 웃으며 커다란 물고기를 꺼내 놓았다.
한번은 소식이 불인에게 당한 적도 있었다. 소식은 불인과 함께 경전을 논하는 것을 즐겼는데,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시를 썼다.
천중천께 머리 숙여 절하니,
터럭 빛이 대천세계를 비추네.
팔풍(八風)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금련에 단정히 앉았노라.
稽首天中天
毫光照大千
八風吹不動
端坐紫金蓮
소식은 자신이 이미 일정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처럼 세간의 명예나 이익, 고락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동자에게 이 시를 보내 불인의 평을 받아오게 했다. 시를 본 불인은 두 글자를 적어 보냈다. “방귀(放屁).” 소식은 이 답장을 보고 크게 노하여 즉시 배를 타고 금산사로 불인을 찾아갔다.
대면하자마자 “내 시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비속한 말로 나를 모욕하는가?”라고 따졌다. 불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팔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방귀 한 방에 강을 건너오셨군요?” 소식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깨달아 부끄러워하며 크게 웃었다.
소식은 생활을 사랑하고 미식을 즐겼으며 차 마시는 일에 능했다. 동파라는 이름이 붙은 동파육, 동파갱(東坡羹), 동파병(東坡餅), 동파어(東坡魚), 동파주자(東坡肘子 돼지 앞다리찜), 동파두부 등 수많은 음식은 ‘동파 시리즈’라 할 만하다.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을 때 소식은 돈이 없어 쇠고기를 살 수 없자 저렴한 돼지고기에 주목했다. 그는 돼지고기를 색과 향, 맛이 완벽하게 조리해 배불리 먹고는 시를 지어 자축했다.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속(俗)해지고,
고기가 없으면 사람이 마른다네.
속하지도 마르지도 않으려면,
죽순 넣고 돼지고기를 쪄야지.
無竹令人俗
無肉使人瘦
不俗又不瘦
竹筍燜豬肉
소식은 돼지고기만 먹은 것이 아니었다. 기분이 상쾌해진 그는 적벽에서 신선처럼 거닐며 붓을 휘둘러 “장강은 도도히 동으로 흘러가며 그 물결이 천고의 풍류인물을 깡그리 쓸어 갔구나라는 명구들을 남겼다. 호방한 《염노교·적벽회고(念奴嬌·赤壁懷古)》란 작품 이렇게 탄생했다.
소식은 나중에 여주(汝州) 단련부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북송의 저명한 시승(詩僧) 참료(參寥)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도중에 구강(九江)을 지나며 여산을 함께 유람했다. 여산의 수려한 경치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경치를 묘사하거나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새로운 길을 열어 철리를 설파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유명한 철리시 《제서림벽(題西林壁)》이 나왔다.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각각 그 모습 다르네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내 몸이 이 산 속에 있는 탓일세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이 시는 간결하면서도 사람의 지혜를 깨우쳐 준다. 출발점과 각도가 다르기에 사물을 보는 관점에는 일정한 편면성과 다양성이 존재하니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야만 사물의 진상과 전모를 명확히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철리시(哲理詩)는 이치를 말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며, 송대 이후 소식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풍이 되었다. 소식은 이를 일컬어 “법도 속에서 새 뜻을 내고, 호방함 밖에 오묘한 이치를 기탁한다[出新意於法度之中,寄秒理於豪放之外]”라고 말했다.
소동파와 아우 소철(蘇轍)은 어릴 때부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함께 공부하고 놀았으며, 같은 해에 진사가 되어 조정에서 함께 관직 생활을 했다. 소철 역시 재능이 넘쳤으나 성격은 소식과 전혀 달랐다. 소식이 직설적이고 외향적이며 달변가였다면, 소철은 노련하고 신중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 재상(宰相)의 지위까지 올랐다. 소식이 유배되어 생활이 곤궁할 때 소철은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도왔고, 소식이 옥에 갇혔을 때는 소철이 자신의 관직을 걸고 소식의 목숨을 구했다. 형제의 우애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었다.
송 신종 희녕 9년, 소식은 밀주(密州)에서 근무하고 소철은 제주(齊州)에서 장서기로 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7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명절마다 친지가 더욱 그리운 법이라, 추석 밤 소식은 술을 마시며 달을 감상하다 홀로 아우를 그리워하며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술잔 들고 푸른 하늘에 물어보네.” 무정한 세월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잦으니 서글퍼지기도 한다.
“사람은 슬픔과 기쁨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달은 밝고 어둡고 둥글고 이지러짐 있으니 이런 일은 예부터 완전하기 어려워라.” 이치는 알지만 그리움은 끝이 없어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다만 내가 바라는 건 오래도록 천리 밖에서 달빛을 함께 보고픈 것이라네.”
아우를 향한 짙은 그리움 속에 소식의 붓끝에서 추석을 대표하는 절창 《수조가두·명월기시유(水調歌頭·明月幾時有)》가 나왔다.
송 휘종 원부(元符) 3년, 환갑이 된 소동파는 사면되었고 같은 해 그를 박해했던 장돈(章惇)은 세력을 잃고 뇌주(雷州)로 유배당했다. 장돈과 소식은 원래 오랜 친구로 조정에서 서로 돌봐주던 사이였으나, 나중에 정견이 달라지면서 멀어졌다. 장돈은 제상이 된 후 소식을 거듭 유배 보내며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다. 장돈의 아들 장원(章援)은 소식이 주심관일 때 합격한 진사였는데, 소식이 장씨 가문에 보복할까 두려워 특별히 편지를 보내 선처를 구했다.
소식은 답장을 보내 장원을 안심시켰다.
“내가 승상(장돈)과 사귄 지 40여 년이니, 중간에 처지가 조금 달라졌을 뿐 우정(交情)은 본래 변함이 없네.” 수년간의 정치적 박해를 가볍게 한 문장으로 넘긴 것이다.
소식은 지난 원한을 따지지 않고 덕으로 원수를 갚았으니, 그 고결함과 청명함은 마치 그의 시 《동란의 배꽃(東欄梨花)》와 같았다.
배꽃은 희고 버들은 푸르니
버들개지 휘날릴 때 배꽃은 만발하네.
슬프구나! 동란에 핀 한 그루 흰 배꽃이여!
인생에서 몇 번이나 이 깨끗한 꽃을 볼 것인가?
梨花淡白柳深青
柳絮飛時花滿城
惆悵東欄一株雪
人生看得幾清明
그러나 불행히도 소식은 이듬해 서울로 돌아가던 중 상주(常州)에서 병사했다. 향년 66세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실 소식의 재능과 지혜라면 그가 예리함을 조금 감추고 원만하게 자신을 보호했더라면 많은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사》에서 말한 바와 같다. “비록 그렇다 한들, 만약 소식이 재앙을 피하려 처신을 바꿨다면 어찌 소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소식의 충의로운 작풍은 바로 사대부의 도덕적 기개였으며, 만약 그것을 바꿨다면 소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점의 호연지기가 있으면 천 리 바람도 유쾌하구나”, 장하도다!
소식은 또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데 사료에는 그가 승려의 환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혜홍(惠洪)의 《냉재야화(冷齋夜話)》에 따르면, 소식은 여덟아홉 살 때 자신이 승려인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의 어머니도 임신했을 때 한 승려가 와서 숙박을 청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승려의 한쪽 눈이 실명 상태였다고 한다. 운암(雲庵) 선사는 소식의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실명한 승려가 실제로 있었는데 이름이 계(戒) 선사였으며 소식이 태어나기 직전에 입적했다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소식은 운암 선사에게 편지를 쓸 때 스스로를 계화상(戒和尚)이라 칭하기도 했고 때로는 승복을 입기도 했다.
소식은 불교와 도교를 신봉했는데 특히 불교를 숭상했다. 불인(佛印), 회련(懷璉) 등 여러 고승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인생과 관직 생활, 불법(佛法)에 대해 사색하고 자신만의 이해를 가졌다. 적극적인 입세(入世)에서 탈속한 출세(出世)에 이르기까지, 소식은 그의 서예와 시문에서 홍진을 간파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선의(禪意)를 체현했으니 마치 《북사오공선사탑(北寺悟空禪師塔)》과 같았다.
세상을 이미 티끌처럼 여기니,
허공의 꽃 같은 인생은 꿈속의 몸이라네.
어찌 용안(龍顔)이라 하여 다시 분별하리오,
다만 천안(天眼)이라야 천인(天人)을 알아보리.
已將世界等微塵
空裏浮花夢裏身
豈爲龍顏更分別
只應天眼識天人
소식은 담주(儋州)를 떠날 때 이렇게 썼다. “남쪽 황무지에서 아홉 번 죽을 고비 넘겼어도 한스럽지 않으니, 이번 유람의 기이함이 평생에 으뜸이라네.[九死南荒吾不恨,茲遊奇絕貫平生]”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소식은 인생을 한 차례 여행으로 여겼고, 도전에 맞서는 것을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여겼으니 이 얼마나 여유롭고 담담한가? 유배와 유랑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게 했고, 고난과 낙담은 비범한 경지를 단련시켰다.
대지팡이 짚고 짚신 신으니 말 타는 것보다 가볍구나,
누가 두려워하랴?
도롱이 하나로 평생의 비바람을 맡기리라.
竹杖芒鞋輕勝馬,誰怕?
一蓑煙雨任平生
이야말로 소동파의 당당한 흉중과 영웅적 기개의 진실한 묘사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4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