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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배지교(八拜之交)

춘양(春陽)

【정견망】

“청산은 한길로 구름과 비를 함께하고,
밝은 달은 일찍이 두 고을이었던 적이 없다.

青山一道同雲雨,明月何曾是兩鄉”

친구를 떠올리면 늘 따뜻함, 동반, 조력(助力)이 느껴진다. 갑골문에서 ‘붕(朋)’은 조개 화폐 두 꾸러미가 나란히 있는 모습에서 유래하여 같은 부류가 모인다는 뜻이 되었고, ‘우(友)’는 두 개의 오른손이 서로 맞잡은 모습으로 손을 내밀어 돕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두 글자가 조합된 친구라는 말은 정신, 감정, 행동 등 여러 방면에서 서로 보완하고 돕는 사람을 뜻하며, 서로 이해하고 소통이 잘 되며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돕는 관계로 나타난다.

고인(古人)은 친구를 아주 중시했다. 어릴 때 함께 놀던 사이를 죽마지교(竹馬之交), 자매처럼 친한 사이를 수파지교(手帕之交), 뜻이 같고 두터우며 오래가는 사이를 금란지교(金蘭之交), 속마음을 터놓고 무엇이든 말하는 사이를 폐부지교(肺腑之交), 환난을 함께하며 생사를 같이하는 사이를 환난지교(患難之交), 신분과 지위를 따지지 않는 사이를 저구지교(杵臼之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사이를 거립지교(車笠之交), 자녀를 기꺼이 맡길 수 있는 사이를 탁고지교(托孤之交)라 부르는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친구 관계가 긴밀함을 형용하는 말로 팔배지교(八拜之交)라는 말도 있다. 팔배(八拜)는 원래 고대 서로 잘 아는 가문 사이에 일방의 자제가 상대방 어른을 뵐 때 행하던 성대한 예절로, 여덟 번 절하여 극진한 존경을 표하는 것을 뜻했다. 나중에 이것이 친구를 맺을 때 여덟 방향을 향해 각각 한 번씩 절하는 것으로 변했는데, 이는 천지신명께 증명을 구하며 어디에 있든 우정이 변치 않고 생사를 함께하며 복과 어려움을 같이 나누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이런 의식은 보기 드물지만, 팔배지교는 여전히 우정이 깊어 생사를 맡길 수 있는 형제나 친구를 지칭한다. 팔배지교의 배경에는 여덟 가지 고전적인 우정 이야기가 있다.

1. 지음지교(知音之交). 이 이야기는 《열자(列子)》에서 유래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 유백아(兪伯牙)는 음률에 정통하고 거문고 실력이 매우 뛰어났으나 늘 지음을 만나기 어려웠다. 한 번은 유백아가 명을 받들어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8월 15일 한양(漢陽) 강구에 도착했는데, 배가 풍랑을 만나 작은 산 아래 멈추게 되었다. 풍랑이 멎은 후 유백아가 흥에 겨워 거문고를 타자 그 소리에 이끌려 나무꾼 종자기(鍾子期)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만난 후 유백아가 몇 곡을 더 연주했는데, 그때마다 종자기는 유백아가 표현하려는 의경(意境)을 정확히 맞추었다. 유백아는 마침내 지음을 만난 것에 감동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는데 마음이 너무나 잘 맞아 서로 만남이 늦었음을 아쉬워하며 친구가 되었고, 이듬해 중추절에 다시 이곳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다음 해 유백아는 약속대로 왔으나 종자기를 볼 수 없었다. 거문고를 타며 친구를 불렀으나 기척이 없었고, 수소문 끝에 종자기가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종자기는 임종 전 8월 15일에 유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무덤을 강가에 만들어 달라고 유언했다. 유백아는 만반의 슬픔을 안고 종자기의 무덤 앞에서 고금곡인 《고산유수(高山流水)》를 연주했다. 그러고는 거문고 줄을 끊고 아끼던 요금을 청석 위에 내던져 부수며, 유일한 지음이 세상에 없는데 이 거문고를 누구에게 들려주겠느냐며 슬퍼했다. 유백아는 그 후로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2. 문경지교(刎頸之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주나라 선왕(宣王) 때 중신이었던 두백(杜伯)과 좌유(左儒)의 이야기다. 주선왕이 참언을 믿고 두백에게 사형을 내리려 하자, 좌유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간곡히 만류했다. 하지만 주선왕은 듣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며 두백을 죽이는 것은 풀을 베는 것과 같으니 입 아프게 말하지 말라며 무사들에게 명해 두백을 처형했다. 두백이 죽자 좌유는 극도로 슬퍼하며 집에 돌아와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둘째는 전국시대 조나라 인상여(藺相如)가 ‘민지의 회합’과 ‘조 씨 벽을 무사히 가져온’ 공으로 상경(上卿)에 봉해져 노장 염파(廉頗)보다 지위가 높아진 이야기다. 염파는 이를 시기하여 여러 번 도발했으나 인상여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관용으로 인내했다. 염파는 나중에 인상여의 경지를 알고 부끄러워하며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가서 사죄(사죄)했고, 두 사람은 화해하여 ‘장상화(將相和 장군와 재상의 화합)’라는 미담을 남겼다. 사료에는 “마침내 서로 기뻐하며 문경지교를 맺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교칠지교(膠漆之交). 《후한서·독행열전》에 따르면 진중(陳重)과 뇌의(雷義)는 동한 예주군(豫州郡)의 명사로, 도덕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뜻이 맞고 우정이 깊었다. 태수 장운(張雲)이 진중의 명성을 듣고 효렴으로 천거하자, 진중은 그 공명을 뇌의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수십 번의 신청에도 허가되지 않았다. 이듬해 뇌의도 효렴으로 천거되어 두 사람은 군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고 나란히 상서랑(尙書郎)이 되었다. 이후 뇌의가 남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고 면직되자 진중 역시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뇌의가 수재(秀才)로 천거되자 뇌의 역시 이를 진중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자 뇌의는 미친 척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연이 알려지자 관부에서는 두 사람을 동시에 불렀고, 진중은 세양현령, 회계태수, 시어사 등을 역임했으며 뇌의는 관알자(灌謁者), 시어사, 남돈령 등을 역임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우정을 두고 “아교와 옻이 스스로 굳다 하나 뇌의와 진중만 못하다”라고 칭송했다.

4. 계서지교(雞黍之交). 《후한서·범식전》에 따르면 범식(範式)과 장소(張劭)는 젊은 시절 태학에서 함께 공부하며 우애가 깊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범식은 2년 뒤에 장소의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2년이 지나 약속 날짜가 다가오자 장소는 어머니께 친구를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믿지 않았으나 장소는 범식이 신의 있는 사람이니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약속한 날 범식은 정말로 찾아왔고, 장소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훗날 장소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임종 직전 범식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해 길게 탄식했다. 장소가 세상을 떠난 날 군공조(郡功曹)로 있던 범식은 꿈에 나타난 장소로부터 뒷일을 부탁받고 휴가를 내어 상가로 향했다. 범식이 도착하기도 전에 장소의 영구가 출발했으나 무덤가에 이르러 영구가 도저히 묘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못다 한 소원이 있는가 싶어 영구를 멈추고 기다리게 했다. 범식이 무덤에 도착해 곡을 하며 제사를 지낸 후 관을 끄는 밧줄을 당기자 영구가 서서히 움직여 묘혈 안으로 들어갔고 무사히 안장될 수 있었다.

5. 사명지교(舍命之交). 《열사전(烈士傳)》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나라 양각애(羊角哀)와 좌백도(左伯桃)는 친구 사이로 초나라에 관직을 구하러 가던 중 큰 눈을 만났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해 두 사람 모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좌백도는 식량과 옷을 모두 양각애에게 주어 빨리 길을 가게 하고 자신은 나무 구멍 속에서 기꺼이 얼어 죽었다. 양각애는 초나라에 도착해 중용되었고 초원왕(楚元王)은 두 사람의 사연에 감동하여 상경(上卿 가장 높은 벼슬)의 예로 좌백도를 안장해주었다.

어느 날 양각애의 꿈에 좌백도가 나타나 “그대의 은덕으로 후하게 장사 지내졌으나 내 무덤이 형(荊) 장군의 무덤과 가까워 늘 핍박을 받고 있소. 이번 달 15일에 그와 대전하여 승부를 낼 것이오”라고 말했다. 15일이 되자 양각애는 병마를 이끌고 좌백도의 무덤 앞으로 가서 세 개의 구리 인형을 만든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친구를 돕기 위해 떠났다.

6. 생사지교(生死之交). 동한 말기 유비(劉備)가 탁현에서 향용(鄕勇)을 모집해 거병하자 장비(張飛)와 관우(關羽)가 합류했다. 이후 두 사람은 유비를 따라 각지를 누비며 결국 촉한 정권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세 사람은 간담상조하며 생사를 같이하고 형제처럼 지냈는데 정사에는 세 사람의 사이가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작가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설정하여 유비, 관우, 장비가 마음을 합쳐 곤경에 처한 이를 구하고 나라를 보위하며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을 약속한 것으로 묘사했다. 유비, 관우, 장비는 친구 사이 충의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7. 관포지교(管鮑之交). 《사기·관안열전》에 따르면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는 서로를 깊이 알았다. 젊은 시절 관중은 집이 가난해 포숙아가 자주 도와주었다. 나중에 두 사람이 함께 군대에 갔는데 관중은 늘 공격할 때는 뒤에 숨고 후퇴할 때는 앞장서서 도망쳐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포숙아는 사람들에게 관중이 집에 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해 목숨을 아끼는 것이라고 해명해주었다. 관중은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鮑子)로다”라며 감탄했다.

제양공이 재위할 때 무도하여 나라가 혼란해지자 포숙아는 공자 소백(小白)을 호위해 거나라로 도망쳤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데리고 노나라로 피신했다. 제양공이 죽은 후 포숙아는 소백을 호위해 귀국하여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제환공이 포숙아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포숙아는 자신의 재능이 모든 면에서 관중보다 못하다며 관중을 극력 추천했다. 이후 관중은 중용되어 제환공을 보좌해 패업을 이루었다.

8. 망년지교(忘年之交). 《후한서·예형전》에 따르면 예형(禰衡)은 젊어서부터 문재(文才)와 변재(辨才)가 뛰어나 시사를 논하기 좋아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오만하여 남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조조(曹操)가 집권할 때 예형이 허창(許昌)에 와서 일자리를 구하며 오직 공융(孔融)과 양수(楊修)만이 존경할 만하다고 공언했다. 공융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갔고 두 사람은 뜻이 맞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간 교류하며 공융은 예형의 학식이 넓고 깊음에 감탄했다. 당시 예형은 겨우 20세였고 공융은 40세였으나 두 사람은 나이를 잊고 망년지교를 맺었다.

이후 공융이 조조에게 예형을 추천했으나 예형은 조조를 무시하고 여러 번 비방했다. 조조는 속으로 미워했으나 그의 명성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고 형주 유표(劉表)에게 보냈다. 그곳에서도 예형의 습성은 변하지 않았고 유표 역시 명사를 죽였다는 오명을 쓰기 싫어 무장 출신인 황조(黃祖)에게 보냈다. 예형은 황조를 무식한 무부(武夫)라며 깔보았고 술자리에서 오만하게 굴며 욕설을 퍼붓자 분노한 황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좋은 친구 사이에는 정뿐만 아니라 믿음(信)과 의리(義)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가에서는 친구를 오륜(五倫) 중 하나로 꼽으며 지켜야 할 도리로 신의와 의리를 강조했다. 맹자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했다. 친구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소양과 덕성을 엿볼 수 있다.

“친구가 많으면 길이 많다(多個朋友多條路)”라는 말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친구가 많아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메신저 친구를 맺지만 수는 많아도 질은 떨어진다. 진정으로 재물이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지기(知己)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이익이나 업무, 학습, 유흥으로 맺어진 일반적인 관계이거나 심지어는 나쁜 짓을 함께하는 부류인 경우도 있다. 공자는 친구를 익우(益友)와 손우(損友)로 나누었다. 익우는 정직하고 신의 있으며 박식한 사람을 뜻하고, 손우는 아첨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뜻한다. 친구의 본의로 볼 때 손우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며 방연과 손빈의 사례가 그러하다.

제갈량은 《전출사표》에서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라고 주장했다. 당조의 한유(韓愈)는 이를 ‘친현원녕(親賢遠佞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라)’으로 응축했고 당태종은 이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아 후대를 교육했다. 오랫동안 친현원녕은 대인관계와 처세의 으뜸 원칙이 되어왔다. 친구를 사귈 때는 선한 이를 가려 따라야 하며, 서로 돕는 가운데 함께 진보하고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남과 자신 모두에게 이로운 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