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小陽春) 정리
【정견망】
초문화(楚文化)는 중국 고대 지역 문화 중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보배다. 초문화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굴원(屈原)이 남긴 천고에 빛나는 《초사(楚辭)》를 떠올린다. 또한 중국 및 해외 전문가와 학자들이 희세의 보물이라 칭송하며 세계 악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증후을편종(曾侯乙編鍾),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지하에서 2,000여 년을 잠들었어도 녹슬지 않은 월왕구천검(越王勾踐劍)을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중국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품종이 완비되었으며 직조 기술이 정교하여 세계 실크 보고로 불리는 마산(馬山)의 전국시대 실크 제품, 사서 기록의 공백을 메워 지하 도서관이라 불리는 초한(楚漢) 시대 간독(簡牘), 색채가 화려하고 공예가 정교하여 전국 총수의 5분의 3을 차지하는 초·진·한 시대 칠기(漆器), 특히 1975년 6월 8일 형주(荊州) 봉황산에서 출토된 서한(西漢) 시대 고대 미라 등은 세계적인 기적이라 할 만하다.

세계 음악사상 기적――증후을편종(曾侯乙編鍾)

천하제일검――월왕 구천검
초문화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를 대표로 하는 고도로 발달하고 독특한 풍격을 지닌 남방 지역 문화다. 초인(楚人)이 오랜 발전 과정에서 창조한 우수한 역사 유산이자 중화민족 전통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초문화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선진(先秦) 시기 초국과 초족이 창조한 역사 문화적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예부터 지금까지 초나라 땅의 문화를 일컫는 지역 문화적 개념이다.
현재의 호북(湖北) 대부분과 하남(河南) 서남부 및 남부가 초기 초문화의 중심이었고, 강소(江蘇), 절강(浙江), 안휘(安徽) 북부는 후기 중심이었다. 호남(湖南)과 강서(江西)는 춘추 중기 이후 중심지가 되었으며, 귀주(貴州), 운남(雲南), 광동(廣東), 산동(山東) 일부와 한국(韓國)도 초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초문화는 중원문화, 파촉(巴蜀)문화, 오월(吳越)문화, 제로(齊魯)문화 등과 함께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주체인 화하문화(華夏文化)를 구성한다.

전국칠기(戰國漆器)――호좌조가고(虎座鳥架鼓)
초문화의 발전과 초나라의 굴기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기 오제본기》, 《고금성씨서변증(古今姓氏書辯證)》 및 《원화성찬(元和姓纂)》 등의 기록에 따르면, 초나라의 선조는 전욱제 고양씨(高陽氏)로부터 나왔다. 고양은 황제(黃帝)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은 자신의 저서 《이소(離騷)》 서두에서 “제 고양씨의 머나먼 후손이여, 돌아가신 아버님 함자는 백용(伯庸)이라 하네”라며 스스로 계보를 밝혔다. 전욱제 이후 5대손인 오회(吳回)는 제 고신씨(高辛氏)의 화정(火正, 불을 관장하는 관리)이었는데, 하늘의 불과 땅의 불을 주관하여 천하를 환하게 비추었기에 제곡(帝嚳)이 축융(祝融)이라 명명했다. 그 부족은 상(商)의 도읍인 조가(朝歌)의 남쪽에 분포해 있었다.
오회의 아들 육종(陸終)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아들이 계련(季連)이며 미(羋)씨 성을 가진 초나라의 선조다. 계련의 후손 중 육웅(鬻熊)이라는 인물은 학식이 해박하여 주나라 문왕(文王)의 사부(師父)가 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은 문왕을 섬기다 일찍 죽었다. 증손자인 웅역(熊繹)은 할아버지의 자(字)를 성으로 삼아 비로소 웅(熊)씨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 초세가》에서 서주 초기 초인의 영수였던 웅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왕(成王) 시절에 문왕과 무왕을 위해 애쓴 공신들의 후손을 등용했는데, 웅역을 초만(楚蠻) 땅에 봉하고 자남(子男)의 작위와 토지를 주었으며 미씨 성으로 단양(丹陽)에 거주하게 했다.”
이러한 기록은 축융의 후예들이 중원에서 호북(湖北) 경내로 들어온 후, 웅역과 그 후대들이 장강과 한수(漢水) 유역의 최초 개척자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들은 중국 역사상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인 초나라를 정식으로 건립했으며, 이후 점차 강성해져 춘추오패(春秋五霸)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발전했다.

전국 시대 초나라 지도
《좌전》 소공 12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 우리 선왕 웅역(熊繹)께서 형산(荊山)에 터를 잡으실 때, 가시나무 수레를 끌고 누더기를 걸치며 풀숲에서 지내셨고 산천을 넘나들며 천자를 섬기셨다.”
또한 《좌전》 선공(宣公) 12년에는 “초나라가 용(庸)나라를 이긴 이래로, 그 임금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라 사람들을 모아 민생의 어려움과 재앙이 언제 닥칠지 모름을 훈계하며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군대에서도 매일 군비를 점검하며 승리는 보장할 수 없는 것이며, 상나라 주왕(紂王)이 백 번을 이기고도 결국 후사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경계했다. 약오(若敖)와 분모(蚧冒)가 가시나무 수레를 끌고 누더기를 걸치며 산림을 개척했던 고난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웅거(熊渠)가 세 아들을 왕으로 세운 때부터 초 무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초 문왕이 영(郢)에 도읍을 정하기까지, 그리고 초 장왕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까지의 약 300년 동안 초나라는 남쪽 구석에 치우친 만이(蠻夷)의 나라에서 고통스러운 개척과 남북으로 정벌을 거쳐 사방 5,000리에 달하는 전국시대 최대의 국가가 되었다. 전성기의 초나라는 중국 남부 전역을 포괄하는 면적에 인구는 500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전국시대 중국 총인구의 4분의 1이었다. 이곳에서 도가의 노자(老子), 농학자 허행(許行), 천문학자 당매(唐昧), 음양학자 남공(南公), 교육자 순자(荀子), 음악가 종자기(鍾子期) 등 중국 역사에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 연이어 배출되었다. 이와 함께 유구하고 박대정심(博大精深)한 800년 역사의 초문화(楚文化)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의 관용과 인후한 태도,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넓은 흉금은 초나라가 작고 약한 나라에서 크고 강한 나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내적 원인이었다. 초나라는 수많은 나라를 병합하여 오늘날의 11개 성(시)에 걸치는 영토를 차지했는데, 고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화하, 만(蠻), 이(夷), 복(濮), 월(越) 등 문명의 정도가 크게 다르고 역사적 연원도 각기 다른 민족들을 초나라는 모두 안무할 수 있었다. 초나라는 전쟁에서 진(秦)나라 군대처럼 수시로 수만 명의 목을 베거나 대량으로 포로의 귀를 베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멸망시킨 나라에 대해서도 초나라의 관례는 그 왕실을 옮겨주고 종묘를 보존하며 영토를 현으로 삼되 그 백성을 위무하고 현능한 자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랑캐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대했다. 바로 이 때문에 초나라는 여러 민족의 옹호를 받을 수 있었고, 강력한 포용력과 개방성, 응집력을 보여주며 장강 남북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영역에서 서구의 고대 그리스 문명에 비견될 만한 동양의 초문명(楚文明)을 창조해냈다.
“초나라에 세 가구만 남아도 진나라를 멸할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다.” 진한 시기에 초나라는 비록 진나라에 멸망당했으나, 도(道)를 핵심으로 하는 초문화는 초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진(秦) 말기에 초나라 사람인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도리어 진을 멸망시키고 초문화를 크게 일으켰으므로 초문화는 회생하는 듯했다. 그러나 한무제가 유술만을 존숭(獨尊儒術)한 이후, 독자적인 체계로서의 초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초문화의 순수한 정신적 내포는 전통 중원문화와 함께 융합되어 중화 5,000년 신전문화(神傳文化)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 조대의 군자에 한 조대의 신, 한 조대의 천인(天人)에 한 조대의 백성(民), 한 조대의 문화, 한 조대의 옷차림이다.”(《워싱턴DC 국제 법회 설법》)
본 편부터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초문화 속에 깃든 전설적인 역사 인물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또한 정교하게 제작된 청동 예기와 악기, 문양이 화려하고 조형이 기이한 칠목기(漆木器), 정교한 솜씨가 하늘의 공력과 맞먹는 실크 제품, 그리고 순수하고 소박한 민풍과 민속을 다룰 것이다. 철학, 문학을 비롯하여 제조, 건축, 방직, 복식, 음식, 미술, 악무 등 각 분야에 덮여 있는 신비로운 베일을 벗겨냄으로써, 사람들의 생명 깊은 곳에 묻혀 있는 형풍초운(荊風楚韻)을 깨우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고자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8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