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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38): 채워지지 않는 마음과 불안정한 뜻

요연(了緣)

【정견망】

태백금성이 미후왕을 데리고 능소전(凌霄殿) 밖에 이르러, 곧장 어전으로 들어가 요선(妖仙)이 도착했음을 아뢰었다.

옥제(玉帝)가 휘장을 내리고 묻기를, “어느 쪽이 요선인가?” 하니, 오공이 그제야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내가 손어르신(老孫)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미후왕에게 있어 이미 매우 예의를 갖춘 것이다. 필경 옥제(玉帝)는 건곤(乾坤)의 주재자로 문제를 일으킨 원숭이를 위해 기꺼이 선해(善解)하려 했으니, 천도(天道)가 선(善)함이 만물을 융합하는 계기임을 알고 기회가 왔을 때 받아들여야 함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노손(老孫)도 스스로 이치에 어긋남을 알고 있었다. 저승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이름을 사사로이 지워 윤회에서 벗어났으니, 옥제가 뒤처리를 해준 셈이다. 장생(長生)의 이득을 얻었음에도 옥제가 추궁하지 않은 것은 기성 사실을 인정한 것과 같으니, 이 점만으로도 미후왕은 수그러들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옥제는 태백금성이 오공을 데려온 것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일부러 누가 요선인지 물어 먼저 면박을 주었고, 스스로 요선임을 입증하게 했다. 비록 신선(仙)이라는 글자가 들어있으나 앞에 요괴(妖)를 붙였으니 민망한 일이다. 선계(仙界)에서도 사람 몸을 존중하며, 요선은 대개 탈것으로 쓰여 지위가 높지 않고 전망도 밝지 않다. 옥제의 이러한 행동은 간을 보며 오공의 태도를 살피고 어떤 관직을 줄지 가늠한 것이다. 오공이 몸을 굽혀 응한 것은 자신을 낮게 본 것이 아니라 천정의 선의에 대한 화답이었다.

본래 요괴의 몸이지만, 모두가 아는 것과 대중 앞에서 스스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며 약간 모욕적인 뜻이 담겨 있다. 이토록 오만했던 원숭이가 이때 고개를 숙이며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태도를 보인 것은 성심껏 초빙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다. 양측이 모두 좋게 하려는 의향이 있어야 원한을 선해하고 큰일을 작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이쪽 선경(仙卿 천정에서 경에 해당하는 고위 신선)들은 모두 아연실색하며 오공이 엎드려 절하지 않는 것을 꾸짖고, 죽어 마땅하다는 식의 험악한 말을 내뱉었다. 참으로 사소한 일을 크게 부풀려 권세로 위협하려 했으나, 상대가 누구인지 보지 못한 처사다. 규칙을 따질 요량이었으면 미후왕이 옥제 앞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화가 나면 누가 그를 가둘 수 있겠는가. 그래도 옥제는 생각이 깊어 은혜와 위엄을 병행할 줄 알았다. 그는 손오공이 하계(下界)의 요선으로서 처음 사람 몸을 얻어 조례를 모르니 잠시 죄를 사해준다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그제야 미후왕은 위를 향해 크게 인사를 올리며 은혜에 감사했다.

옥제가 다시 빈 관직을 찾아보게 했으나 좋은 자리는 이미 차 있었기에, 아무도 탐내지 않는 필마온(弼馬溫) 자리를 오공에게 주었다. 오공은 갓 부임하여 아무것도 몰랐기에 ‘관(官)’ 자만 붙으면 대략 비슷한 직급인 줄 알고, 은혜에 감사하며 기쁘게 부임했다. 부하 관리들을 모아 마굿간 사무를 파악하고 천여 마리의 천마(天馬)를 인수했다. 하나같이 뛰어난 준마라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말들이니 보기만 해도 더없이 좋았다. 이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성껏 먹이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말들을 돌보았다. 낮에는 밖으로 데려가 만 리를 달리게 하고 밤에도 말을 재우지 않았다. 잠을 자면 풀 뜯어 먹는 시간을 가로막아 살이 찌지 않기 때문이었다. 천마들도 그를 보면 귀를 내리고 발을 모으며 따랐고, 말들은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보름 남짓 지나 한가한 날에 관리들이 술자리를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부임을 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즐겁게 술을 마시던 중 오공은 비로소 자신의 관직이 얼마나 높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등급에도 들지 못하는 미관말직이라고 밝혔다. 오공은 그제야 이 필마온이 관직 이름은 붙었으나 말단 관리이며, 말 그대로 말이나 기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잘 키워야 본전이고 잘못 키우면 벌을 받는 자리였다. 참으로 원숭이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하늘로 속여 데려와 고작 말을 기르게 하다니, 이는 하인과 다를 바 없는 대우이며 노손을 멸시하는 처사였다.

“안 해! 안 한다고! 나는 가련다!”

오공은 즉시 화를 내며 상을 엎고 금고봉을 꺼내 남천문을 쳐부수며 그만두고 내려갔다.

본래 미후왕은 인간 세상에서 대왕이라 불리며 금고봉 하나로 사방을 위협하고 각지의 요왕(妖王 요괴왕)들을 굴복시켰다. 수많은 부하를 거느리며 마음도 커져 있었다. 거침없이 사고를 쳤음에도 추궁받지 않고 하늘의 예우를 받으니 내심 감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실과 기대의 격차가 이토록 크니, 땅에서는 왕이었으나 하늘에서는 하인이 된 셈이다. 오공의 실력이라면 옥제의 자리도 그가 옥제라 인정하면 그런 것이지, 인정하지 않으면 어전의 탁자도 엎을 수 있는 것이며 그 자리를 노리고 한판 붙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옥제와 맞설 능력을 갖춘 오공은 옥제에 대해 경외심이 별로 없었다. 그가 반골 기질을 보인 것은 옥제의 에너지장이 미후왕을 압도할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오공은 힘을 숭상하고 강자(强者)가 존중받는다는 관념이 강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힘뿐이었으므로 위협적이지 않은 옥제를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초빙에 응한 것도 천정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고, 겉으로 수그러든 것은 체면 때문일 뿐 실제로는 마음으로 굴복한 것이 아니었다. 즉 네가 나를 대우해 주니 나도 너를 대우해 준다는 식의 껍데기뿐인 예의였다.

천정에서 보잘것없는 필마온으로 오공을 상대한 것은 관직을 주어 원숭이를 하늘에 가두어두려는 속셈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하고 재주는 크며 사고를 치는 원숭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무슨 화(禍)를 부를지 모르니, 작은 관직을 주어 눈앞에 두고 지켜보는 편이 안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주가 얼마나 큰지 하늘은 몰라도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쥐꼬리만 한 관직은 자신의 능력과 맞지 않았다. 그 마음이 어찌 만족하겠는가? 이후 오공이 스스로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칭하고 하늘이 그를 잡지 못하자 다시 초빙되어 반도원(蟠桃園) 관리직을 맡았을 때도 만족하지 못하고 도둑질까지 저질렀다. 이번에는 사고가 너무 커져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예 하늘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이때 오공은 이 모든 배치가 천의(天意)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른바 심원의마(心猿意馬)라 하여, 오공처럼 역동적인 성격은 옥황상제가 자리를 양보해도 앉아 있지 못한다.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격이 너무나 들떠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리조사의 설법을 들을 때도 손발을 춤추며 가만히 있지 못했는데, 높은 자리에서 위엄을 갖추고 정좌하여 엄숙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을 몇 분이나 견디겠는가. 누가 꼬드기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문무 백관들이 위아래로 뛰노는 원숭이에게 상소를 올리며 천하 대사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서 오공에게 말을 기르게 한 것이다. 마음이 얼마나 크면 세계가 그만큼 크고, 뜻(意)이 얼마나 심원하면 그만큼 지혜가 넓어지는 법이다. 수련인이 마음이 통하고 뜻이 화합하면 정념(正念)이 강대해져 우주 에너지를 동원해 정법(正法)하기에 충분하며,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法) 속에서 신우주를 창조함에 있어 마음 가는 대로 뜻이 움직이고, 생각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마음과 뜻이 통달해 정념을 내보낼 때 간격과 막힘없이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마음 원숭이(心猿)가 자신의 뜻(意)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뜻을 충분히 강하게 길러 서로 융합하고 자유자재로 다스려야 비로소 심신합일(心神合一) 할 수 있다.

천의가 오공에게 말을 먹이게 한 것은 자신의 뜻(意)을 단련하여 마음과 합해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공은 부임 후 의욕이 넘쳐 밤낮없이 의마(意馬)가 건장하게 자라도록 독촉하여 가장 강한 뜻을 길러냈다. 마음은 뜻의 에너지 지지대이고, 뜻은 마음의 날개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라는 것을 간격 없이 실행하는 것이 바로 수련인의 강인한 의지이며 정법이 반드시 성취되는 보장이다. 오공의 근두운이 한 번에 10만 8천 리를 날아가듯, 마음이 움직이면 생각(意)은 천마가 하늘을 달리듯 달려간다. 심의(心意)에서 발현된 정념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주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동원하는 불법신통(佛法神通)을 갖게 된다. 요사(妖邪)를 소멸하는 것은 일념 사이에 달려 있는데, 사악이 어찌 대법제자의 정진하는 발걸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

대법제자의 정념 또한 우주 법칙의 의지이며, 생각이 일단 나오면 그 힘은 산을 쪼갤 수 있다. 예전에 나는 글에서 항상 마음을 중생에게 두고 늘 중생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야 생각이 모든 중생을 포괄하게 되어 우리의 일상생활도 정념 속에 머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이 사람마음(人心)임을 모두가 안다. 사람마음은 좁아서 정이 있는 사람이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만을 담으며, 이는 모두 욕망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또한 사람마음은 변하기 쉬워 마음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끼리도 자주 상처를 준다.

그래서 속인의 세계는 물질적이며 욕망이 이끌고, 사람마음은 변덕스러우며 정은 소모품이고 행복은 더더욱 쉽게 소모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평생을 얻고 잃음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몸부림친다. 마음속에 결핍이 있고 늘 한구석이 비어 있기에 사람은 고독과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끊임없이 타인을 통해 내면의 공허를 채우려 하며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만,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은 기쁨 아니면 슬픔일 뿐이다. 기다림이 없으면 평생을 공허하게 보내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구하며 타인에게 구하며 내면의 공허를 채우려 한다. 세상 사람들은 최소한의 지불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니 세상에 진심으로 남을 대하는 이가 어디 있는가. 소위 명리정구(名利情仇)란 그저 한판의 연극에 불과하다. 인생은 한바탕의 약탈전과 같아 만사를 이익 중심으로 보고 머리를 많이 쓸수록 더 많이 약탈한다. 그러나 얻어낸 헛된 정(情)과 거짓된 뜻이 어찌 정신적 공허를 채우겠는가. 마음은 만족할 줄 모르고 뜻은 가라앉지 않으니, 얻는 것보다 상처가 더 크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결핍이며, 마음이 늘 불만족스러워 뜻이 평안치 못한 것인데 정작 무엇이 결핍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밖으로 구해서는 마음을 영원히 채울 수 없음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안으로 찾아야만 마음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세상에 온 숙원이며, 천만 년의 기다림이고, 무량한 중생의 염원이며, 사명을 이행하는 책임이다.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의 마음속 그 빈자리는 중생의 자리이며, 물욕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중생이다. 생명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법을 얻고 정법을 닦으며 안으로 찾고 안으로 닦아 중생을 구하려는 희망을 실현하여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만 내면의 결핍을 채우고 본래 면목을 되찾으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원만(圓滿)에 이를 수 있다.

원만한 세계의 왕(王)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중생은 왕의 세계를 풍성하게 구성하는 부분이며, 왕의 의지와 능력을 체현하는 존재다. 중생을 자비롭게 대하는 것은 왕의 기본 소양이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결핍은 곧 중생이다. 하세(下世)하여 전생한 왕이 잃어버린 것은 자신의 세계와 생명을 기탁한 무량한 중생이다. 텅 빈 세계는 물질로 채울 수 없으니, 물질이 가져오는 것은 욕망뿐이며 더욱 길을 잃게 만들 뿐이다. 오직 잃어버린 중생을 하나하나 찾아와야만 그 끝없는 공허감을 채우고 자신의 세계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시각각 마음을 중생에게 두는 것이 바로 중생에 대한 가장 큰 자비다. 마음에 중생을 담고 있을 때 심념(心念)이 비로소 중생과 연결되어 가장 큰 자비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생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하며, 그 안에 중생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가 가득 차야 사명을 완수한 것이며, 내심(內心) 세계는 결국 우리의 우주, 즉 대법 수련 중에서 창조된 신우주가 될 것이다. 아낌없이 중생에게 구원을 열어주고 다른 공간에서 중생의 장애를 제거하며 본성을 깨워야 한다. 다른 공간의 인과가 바로잡혀야 이 공간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사상업(思想業)이 줄어들어 진상을 듣고 각성을 깨워 사람 구원의 염원을 달성할 수 있다. 자비(慈悲)라는 두 글자를 보라, 모두 마음(心) 자가 받치고 있다. 이는 선념(善念)으로 기르고 그 고통을 뽑아내 지혜를 열어주는 것이며, 오직 중생과 시시각각 연결하려는 마음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정념으로 악을 제거하는 법을 말씀하신 이후로 우리는 세 가지 일을 병행해 왔고, 이 공간에서 하는 항목들은 이미 곳곳에서 꽃을 피웠다. 그러나 다른 공간에서의 정념으로 청리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늘 가부좌를 틀고 발정념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의식주행(衣食住行) 속에서 그리고 법공부와 연공 시에 마음속으로 중생을 생각하고 중생을 이끌라는 뜻이다. 오직 심념(心念)이 일어나기만 하면 생각이 우리의 바람을 집행할 것이다. 하물며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공(功)의 기제는 에너지장 범위 내의 모든 생명 물질을 자동으로 정화한다.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의 핵심은 ‘생각(想)’에 있다. 능동적으로 행하며 정화의 기제를 가지(加持)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발원(發願)의 힘이 크면 신적(神跡)이 즉시 나타나지만, 원력(願力)이 부족하면 사악의 저항조차 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속이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하물며 사람의 사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그 배후의 요소는 상상을 초월한다. 연공 할 때도 사상업이 끊임없이 솟아나 입정(入靜)을 방해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뇌는 쉬지 않고 온갖 잡다한 생각이 가득 찬다. 이러한 사상업이 우리를 오염시키게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중생을 자비로 대하는 일념(一念)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어차피 중생을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마련이며 뇌는 비어 있지 않는다. 심지어 환경에 이끌려 욕망을 자극하는 잡념에 빠져 속인의 상태로 돌아가 수련인임을 잊기도 하는데, 이는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의 생각을 다스려 자비로운 원력이 일상이 되게 하는 것이 정념의 상태에 머무는 법이다. 생각이 곁길로 새려 할 때 눈앞에 중생이 가득하다면 어찌 사악한 마음을 품겠는가. 마치 의사가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을 품으면 눈앞에 건강한 이와 아픈 이만 보일 뿐 남녀의 분별심이 없어지는 것과 같아 많은 욕념(欲念)을 차단하게 된다.

수련인이 마음속에 자비를 품고 사람을 구하려는 염원을 가지면 눈에 보이는 모든 이가 중생이다. 일상에서 속인과 수련인의 구별만 있을 뿐 다른 분별심이 없으며, 시시각각 정념을 가득 채우면 수많은 번거로움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자비를 끝까지 실천하게 되어 진상을 알릴 계기가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진정으로 이렇게 한다면 법에 녹아든 경지를 체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진정으로 시시각각 법에 녹아들 수 있다면 원만이 어찌 멀겠는가.

나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세세히 말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이 스스로 깨닫기 바란다. 같은 쌀을 먹어도 백 가지 사람을 길러내듯, 같은 이치의 한부 법이지만 억만 개의 길을 수련해낼 수 있다. 제자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며 자신만의 것을 닦아내야 하니, 남을 본뜨지 말고 착실한 수련 속에서 스스로 얻은 법을 검증해야 한다. 교류할 때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당신 말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마라, 우리는 모두 사부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내 말을 듣고 잘 되면 내 위덕이 아니며, 잘못되면 나는 그 인과에 얽히고 싶지 않다. 나는 자신의 것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번거롭다. 어떤 동수들은 자신의 오성이 평범하다고 느껴 오성이 좋은 이를 따라 수련하려 하는데, 수련에 어찌 무임승차가 있겠는가. 설령 남의 도움으로 깨달았다 해도 그것은 겨우 문턱을 넘은 수준일 뿐 위덕이 별로 없다. 내 말을 따르지 마라, 나는 여러분을 책임지지 않는다.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으면 방향이 틀린 것이며, 결국 사람마음(人心)이다. 사람마음을 따라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구세력(舊勢力)이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다.

정체적인 협력 속에서 오성이 좋아 법에서 법을 인식하고 착실한 수련에 결합해 법의 위력을 보여주는 동수가 있다면 다른 이들도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겉으로는 책임자의 말을 듣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책임자의 언행이 법에 맞지 않는다면 듣겠는가? 맹종은 수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동수가 바르게 깨달은(正悟) 것이 법에 부합한다면 협력하고 참고할 수 있지만, 의존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식별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 주신 정체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차이를 찾아내고 서로 배우며 닦게 하기 위함임을 잊지 마라. 정체적인 협력을 잘하는 것은 틀리지 않으나, 매사를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지닌 저울이 곧 지혜이며, 지혜는 식별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타인을 식별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내면을 식별하여 자신이 어디서 틀렸는지 보고 바로잡아야 한다.

격차란 결국 대비되어 나타나는 사람마음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찾아보라. 남보다 못한 부분이 바로 집착의 근원이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마음은 우리가 장차 닦아낼 신우주이며, 중생은 그 우주를 채울 풍성한 내용이다. 정념은 우리가 잘 수련한 일면의 에너지, 즉 정신(正神)의 자비를 동원해 정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법리 속에서 층층이 구축한 사상과 지혜는 마땅히 신우주의 특성이 될 것이며, 곧 스스로 닦아낸 것이다. 또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법, 즉 진신(眞神), 진신(眞身), 사상(思想)이 있다. 더 높이 올라가 무형(無形)의 신의 상태에 이르면 사상만 남게 된다.

내 이해로는 일정한 우주 층면에서 우리가 원만하는 세계의 구성 요소는 진신(眞神), 진신(眞身), 사상이다. 그리고 무형의 신에게 있어 세계의 구성 요소는 바로 사상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지극히 중요하다. 일사일념(一思一念)이 장차 세계의 구조와 연관되는데 어찌 함부로 생각하겠는가. 법을 공부할 때 일사일념을 바로잡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은 일사일념의 위덕을 실천하고 신적(神跡)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은 어떠한가? 우리보고 속인의 상태로 돌아가 삶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속인의 삶을 체험하는 가운데 법리를 깨닫고, 깨달음의 계기를 찾으며 법의 내함(內涵)을 사유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은 사유하기 위한 것이며, 새로운 세계의 특성을 구축하고 더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는 신(神)의 사유 모드여야 한다.

이상은 개인의 체득이며, 이제 막 깨달아 변두리를 건드린 수준이니 실천을 통해 검증해야 한다. 글로 쓴 것은 단지 새로운 사고의 길을 제시한 것일 뿐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다른 이들은 더 현묘하게 깨달았으나 글로 쓰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인연이 있는 법이 있으니 누가 깨달으면 누가 얻는바, 얼마나 얻을지는 전부 법 속에 있다. 모든 것을 법으로 가늠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