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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언니 동수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나와 언니는 세 살 터울로, 1999년 법을 얻었을 당시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언니는 나보다 몇 년 일찍 법을 얻었다. 법을 얻은 후 언니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대법이 얼마나 좋은지 이야기했다. 그때는 한창 젊고 현실적이어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하기 미안해서 “퇴직한 후에나 생각해 볼게”라고 말했다. 언니는 1999년 이전에 나온 사부님의 해외 설법 한 권을 우리 집에 두며 한가할 때 읽어보라고 당부했고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심코 그 책을 집어 들어 다 읽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언니에게 전화했다. “나도 수련할래!!” 사람은 결코 스스로 결정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명명백백한 배치 속에 있었다.

20여 년이 흘러 이제 우리도 어느덧 예순이 넘었으나, 수련의 길에서 계속 전진하고 있다.

작년 5월, 언니 몸에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났다. 나는 언니와 함께 빈집으로 옮겨가 살며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강화했다. 동수들의 정념 가지(加持)와 교류 및 도움, 그리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언니의 신체는 점차 회복되었다. 몸이 좋아진 후 언니는 평소처럼 형부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러 직장(집에서 운영하는 식품 공장)에 나갔고, 점심 식사 후에 다시 돌아왔기에 나도 계속 언니와 함께 생활했다.

그 기간에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빨래할 때 언니 옷도 같이 세탁했는데, 언니는 돌아와 건조대에 걸린 옷을 보고는 기분 나빠했다. 아침에 라면을 끓일 때 채소와 달걀 등을 넣으면 그것을 보고 얼굴색이 어두워졌고, 실내화를 닦을 때 대야를 쓰는 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불쾌해했다. 이런 생활 속의 일들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기만 하면 곧바로 기분 나빠하며 부면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에휴!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일이 있으면 말을 하면 될 것 아닌가. 세탁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것이고, 채소를 넣지 말라고 하면 안 넣을 것이며, 실내화를 어느 대야에 두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인데, 이게 다 아무 일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 걸까?’

이때 내 눈에는 온통 언니의 잘못만 보였고, 나 역시 수련인이며 일에 부딪히면 먼저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불쾌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했음에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의 한 사건을 통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법공부를 할 때, 나는 소파에 앉아 작은 스탠드를 켰고 언니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천장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언니가 말했다.

“큰 등이 켜져 있는데 왜 또 스탠드를 켜니?”

전기가 낭비된다는 뜻이니 자기 쪽으로 와서 법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스탠드 밑에서 공부해야 집중이 잘 되는데, 어디서 하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낭비되는 그까짓 전기료는 내가 낼게, 정말 좀스럽네.’

언니는 내가 움직이지 않자 아무 말 없이 법공부를 시작했다. 법공부를 마치고 책을 덮자 나는 공부 전의 내 상태가 좀 이상했음을 느꼈고 방금 전의 생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왜 가장 먼저 나온 일념이 맞서려는 마음이고 원망이었을까? 차분하게 내 생각을 말하면 되지 않았을까?’

다시 언니와의 일들을 돌이켜보니 그것 역시 같은 문제였다.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기만 하면 원망하는 물질장(物質場)이 즉각 발산되었는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그야말로 하나의 관성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맞닥뜨린 수련의 문제가 아닌가? 언니는 하나의 거울인데, 왜 자신을 비춰보지 않고 도리어 그녀의 허물을 찾는가? 그녀의 허물을 찾는 것이 바로 그녀를 원망하는 것 아닌가? 이번에야 비로소 깨닫고 보니 사부님의 고심 어린 배치에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틀간 청정(淸定)하게 지내며 조용히 마음을 법 위에 두고 진정한 내가 자신을 주재하게 했다. 사실 그 원망이 나올 때 그것이 자신이 아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으로 착각했다. ‘나는 왜 자꾸 원망할까? 나는 왜 늘 지키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니 장기간 제거되지 않아 수련이 매우 고달팠다. 이제는 그 진면목만 똑똑히 알면 아무것도 아님을 의식하게 되었다.

다시 언니를 만났을 때 언니도 변해 있었다. 자신이 잘못했다며 그렇게 대하지 말았어야 했고 내가 한 모든 일에 감사해야 했다고 말했다. 교류가 매우 가벼웠고 나도 무척 기뻤으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이틀이 지나고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말 한마디 때문이었는지 언니의 감정이 다시 요동치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나는 속으로 의구심이 생겼다. ‘도리를 다 알면서 왜 또 저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언니가 왜 또 저러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부족한 점은 무엇일까?’ 이번에는 자신을 찾을 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문득 한 생각이 뒤따랐다. ‘네 마음이 왜 자꾸 그녀를 따라 움직이니?’ 머릿속에서 사부님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극을 벗어났도다”(《홍음 2》 〈무(無)〉).

또한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慈悲心(츠뻬이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정진요지》 〈경지〉)

현 단계에서 체득한 사부님의 법이다. 선악(善惡)과 좋고 나쁨을 분별하면 대립이 생기고, 만나는 사람과 일에 대해 평가하게 된다. ‘언니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역시 모두 사람의 머리에서 생각해 낸 것으로, 사실 가아(假我)가 형성한 관념일 뿐이다! 이번에 사부님께서 내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으니 반드시 가려내야 한다.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다느니,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느니 분별하지 말고, 앞에 나타나는 사람과 일을 모두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어떤 생각도 품지 않고 평온하게 행하여 그 무엇도 자신의 청정한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겠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 다음 단계에 해내야 할 목표다.

보잘것없는 이 제자를 줄곧 보살펴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제자는 정진을 압니다!

곁에서 함께해 주는 언니 동수에게 감사하며, 공동으로 정진합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