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설이 전에 언니에게 물건을 좀 보내주면서, 겸사겸사 이야기도 나누려 했다. 공교롭게도 언니가 마침 시간이 있었고 내가 약속한 곳 근처에 있었는데, 보아하니 모든 것이 다 배치된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대법에 따라 행하는가를 보는 듯했다.
언니를 만났을 때 조금 초췌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요 며칠 치통 때문이었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마음이 매우 즐거웠다. 눈앞의 유쾌한 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예전의 불유쾌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구세력은 주변 친인을 이용해 대법제자에게 교란하며 모순과 번거로움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부면(負面) 요소도 계속 확장되어 친척과 친구들이 대법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해하지 못하게 하여 진상을 알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때로는 나 자신도 원망이 생겨, 가족은 이래서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하시며 여든이 넘으셨어도 자녀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시니, 이것이 대법을 닦은 복보(福報)가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명백한 결과가 있음에도 자녀로서 시종 외면했다. 여러 가지 모습에 비추어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이 식어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고, 아주 오랫동안 그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마치 정(情)을 내려놓은 듯했으나 사실은 원망하는 마음이 자비심이 생기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법공부를 통해 이런 상태가 옳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자비가 없으면 정념(正念)도 없는데, 사람의 생각으로 어떻게 사람을 구하겠는가? 이것은 수련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원망하는 마음, 분분히 불평하는 마음, 쟁투심을 찾아내어 이러한 마음들을 배제함과 동시에 자비심도 생겨났다.
자비심이 생기니 예전의 원망이 많이 줄어들었고, 형제자매들이 대법을 인정하고 가급적 법공부를 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는 마치 한 겹의 껍데기가 있는 것 같았고 부면적인 장(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의 정념이 강하지 못해 그들 앞에만 서면 마음이 까닭 없이 떨렸다. 아이도 엄마는 가족 전화를 받기만 하면 긴장하고 말투도 부자연스러워진다고 했다. 나 역시 이 방면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으나 어디가 문제인지 알지 못해 마음이 괴로웠다. 그들을 구하고 싶으면서도 또 교란이 있고, 구하지 않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찾아보니 내가 형제자매에 대한 정이 매우 중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단지 사람의 겉모습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옷을 점잖게 입고 기품 있기를 특별히 바랐는데, 이것이 바로 허영심이다. 겉만 번드르르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중시하지 않으니 마음이 외적인 가상(假相)에 대응하여 한 장면 한 장면이 끊임없이 상연되었고, 결국 기진맥진하고 사면초가에 빠져 친인들이 모두 나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들은 늘 거짓말을 하는 여동생은 믿을지언정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기초 위에 다시 쟁투심과 불평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이에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바로잡으며 마음을 끊임없이 순정(純淨)하게 하고 또 순정하게 했다.
마음이 순정해지니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라는 틀에서 뛰어넘었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모두 심성(心性)의 제고를 위한 것이며, 자신 주변이 바로 하나의 보이지 않는 커다란 무대였다. 오직 대법에 따라 닦아야만 이 무대 위에서 세속적인 관념에 오염되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조류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다.
순정한 마음을 가지니 사람을 구하는 일이 신성(神聖)해졌다. 오늘 언니와의 대화는 나로 하여금 하나의 생명이 만약 처지를 바꿔 타인을 위할 수 있다면 자비가 생겨날 수 있고 타인의 빛나는 점을 볼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오늘 언니의 진심 어린 말들은 나를 매우 부끄럽게 했다. 나는 내가 너무 선량하지 못하다고 느꼈는데,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법 위에서 사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위사(爲私)가 아닌가.
위사(爲私)는 구우주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구우주는 도태되고 해체될 것인데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타난 모습은 바로 가족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데 여기에 구세력이 나쁜 사람을 조종해 그 속에서 간섭하니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것이 바로 구세력이 사람을 망치는 수작인 ‘일전쌍조(一箭雙雕 화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 것)’이다. 조종당하는 생명을 해칠 뿐만 아니라 대법제자에게 마난(魔難)을 더해주는 것이다. 만약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가지(加持)가 없었다면 이러한 관문들을 돌파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위타(爲他)의 각도에서 상대방을 바라보았을 때, 상대방의 말은 마비되었던 그 마음을 다시 깨어나게 했다. 눈앞에 마치 생생세세 윤회전생 속에서 나와 맺은 인연이 보이는 듯했고, 상대방 생명의 명백한 일면이 구도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이 순간 원망하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 쟁투심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선(善)과 자비가 남았다. 언니는 대법 음악을 들으니 매우 편안하다며 매일 ‘9자 진언’을 외운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위해 기뻤다. 생명이 마침내 파룬따파는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대법을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수련을 잘하는 것 역시 진상이다. 세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는 마치 고군분투하는 듯했는데 기점이 대부분 ‘자아’라는 사(私)의 기점에 서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상처받지 않을까만 고려했지, 대법이 어떻게 손실을 입지 않을지 세인이 어떻게 구도받을 수 있을지는 생각지 않았다. 공간장에 구우주의 낙인이 남아 있으니 오직 법만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 대법은 바로 우리가 나아가는 항로의 등대이며 대법제자는 법을 떠날 수 없다.
현 단계에서 얕은 감오(感悟)이며 부당한 곳이 있다면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