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오(明奧) 정리
【정견망】
유백온의 생애
유백온(劉伯溫, 1311-1375년)은 이름이 기(基)이고 백온은 자(字)이며 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유백온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천부적인 재능이 높았다. 가정의 훈도 아래 그는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사색했으며 독서를 즐겨 유가 경전과 제자백가의 서적에 모두 매우 정통했다. 특히 천문, 지리, 병법, 술수(術數)와 같은 분야를 전심으로 연구하여 얻은 바가 컸다. 기억력이 매우 좋아 책을 읽을 때 한 번에 열 줄씩 읽었으며 한 번 본 것은 바로 암송했다. 또한 문필이 뛰어나 그가 지은 문장은 평범하지 않았다.
14세에 처주군학(處州郡學)에 들어가 《춘추》를 읽었고, 17세에 처주의 명사 정복초(鄭復初)를 사부로 모시고 송명이학(宋明理學)을 공부하는 동시에 과거 시험을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타고난 품성과 후천적인 노력이 합쳐져 젊은 유백온은 곧 현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강절(江浙) 일대의 큰 재주꾼이자 명사가 되었다. 그의 사부였던 정복초는 유백온의 조부에게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가문을 빛내고 유씨 가문을 진흥시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촉의 명사 조천택(趙天澤)은 강좌(江左)의 인물을 평가할 때 유백온을 제일로 꼽으며 그를 제갈공명에 비유했고, 유백온이 훗날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백온은 원 원통(元統) 원년(1339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이때부터 관직에 들어서 중국 역사 무대에서의 뛰어난 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유백온은 원 조정을 위해 힘쓰고 관직을 통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진사에 합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 고안현승(高安縣丞)에 임명되었고, 후에 또 원수부도사(元帥府都事)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매번 조정에 채택되지 않았고 그의 재능은 오히려 조정의 압제를 받았다. 유백온은 매우 실망하여 전후 세 차례나 분연히 사직하고 고향인 청전(靑田 지금의 절강성 문성현)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유백온이 청전에 은거하는 동안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사회 및 인생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여 유명한 《욱리자(鬱離子)》라는 책을 창작했다. 이때 전국 정세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전국 각지에서 반원(反元) 봉기가 구름처럼 일어났고 원조(元朝)의 통치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으나, 각 반원 의군은 서로 다투며 양보하지 않았다. 유백온은 천하 정세를 조용히 관찰하며 수많은 봉기군 중에서 평민 출신인 주원장이 가장 진룡천자(眞龍天子)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이끄는 홍건군(紅巾軍)이야말로 원을 뒤엎고 새로운 강산을 세울 군대라고 여겼다.
1360년, 명태조는 청전에 은거하던 유백온에게 두 차례 초청을 보냈고 유백온은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세상에 나와 명태조를 보좌하기로 결정했다. 마치 제갈량 융중대와 비슷하게 유백온은 주원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을 제시했다. 명태조는 유백온을 만나본 후 더욱 크게 기뻐하며 이때부터 유백온을 자신의 심복이자 군사(軍師)로 여겼다.
유백온은 세상에 나온 후 명태조를 위해 적극적으로 책략을 세웠다. 그는 주씨를 위해 먼저 진우량을 멸하고 다음에 장사성을 멸한 후 북쪽 중원으로 향해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명태조는 유백온이 정해준 전략과 전술에 따라 행동하여 먼저 적을 유인하는 계책으로 진우량을 크게 격파해 기세를 꺾었고, 이어 서기 1363년 파양호(鄱陽湖)에서 진씨와 결전을 벌여 그 세력을 완전히 소멸했다. 이듬해에는 다시 계책에 따라 장사성의 세력을 소멸했다. 그런 다음 명태조는 부대를 파견해 북상하여 원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게 하는 동시에 남쪽에서 황제로 칭할 준비를 했다.
서기 1368년, 명태조는 남경에서 황제에 등극하여 공식적으로 대명(大明) 황조(皇朝)를 건립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고쳤다. 주 씨가 마지막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주명 황조를 창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유기는 개국공신 중 한 사람으로서 어사중승 겸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명태조는 또한 유백온의 고향 청전현의 조세를 면제해 주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처주(處州) 지역에서 유일하게 세금을 가산하지 않는 현이었다. 얼마 후 다시 유백온의 조부와 부친을 영희군공(永喜郡公)으로 추봉했다.
홍무 3년(1370년), 유백온은 홍문관학사에 임명되어 ‘개국익운수정문신 자선대부 상호군(開國翊運守正文臣資善大夫上護軍)’이라는 칭호를 받고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졌으며 녹봉 241석을 받았다.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친 후 유백온은 홍무 4년(1371년)에 모든 직무를 사직하고 고령을 이유로 고향 청전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유백온은 청전에서 2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며 본래 세상의 시비 다툼에서 멀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홍무 6년(1373년), 호유용(胡惟庸)이 좌승상이 되어 사람을 시켜 유백온을 무고하게 했다. 명태조는 무고를 듣고 유백온의 봉록을 박탈했다. 유백온은 직접 남경으로 올라가 명태조에게 죄를 청하고 남경에 머물렀다. 나중에 호유용이 우승상으로 승진하자 유백온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홍무 8년(1375년), 병중에 있던 유백온은 명태조가 보낸 사자의 호송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5세였다. 나중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백온이 남경에 있을 때 호유용이 태의를 보내 유백온의 병을 진찰하고 약을 보낸 적이 있는데, 유백온은 그 약을 먹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유백온이 호유용에게 독살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유백온은 모략(謀略)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이기도 하여 저작이 매우 많으며 세상에 전해지는 것으로 《욱리자》 10권과 《성의백문집》 20권이 있다. 그중 대표작인 《욱리자》는 중국 사상사와 문학사에서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백온이 죽은 후 청전 무양(武陽) 하산(夏山)에 묻혔다. 전해지는 바로는 유백온이 죽기 전 호유용이 반드시 패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명태조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아들에게 밀서를 남겨 훗날 명태조가 자신을 생각할 때 상소하라고 일렀다. 5년 후 호유용은 과연 몰락했다. 또 10년 후 유백온은 과연 명예를 회복했다. 명태조는 또한 유씨 가문에 금서철권(金書鐵券)을 하사하여 유씨 가문 구성원이 이것으로 죽을죄를 한 번 면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했다.
원문위치: http://big5.zhengjian.org/node/424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