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오(明奧) 정리
【정견망】
제5편 유백온 소병가(燒餅歌)
천기를 꿰뚫어 깨달으니 황제의 스승이 되었고,
해와 달을 보좌하여 세운 공이 기이하도다.
소병가를 마치고 표연히 가니,
사후나 생전이나 온통 수수께끼로다.
洞徹天機為帝師
輔明日月事堪奇
燒餅歌罷飄然去
身後身前全是謎。
유기전(劉基傳) (《명사·열전 제16》)
유기(劉基)는 자가 백온(伯溫)이며 청전(靑田) 사람이다. 증조부 유호(劉濠)는 송조 한림장서(翰林掌書) 관직을 지냈다. 송조가 멸망한 후 반원(反元) 의병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원조에서 사신을 보내 명부를 대조하며 의병들을 체포했는데 연루된 이들이 많았다. 사신이 길을 가다 유호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유호가 사신을 술에 취하게 한 뒤 그가 머물던 집을 불태워 의병의 명부가 모두 소멸되었다. 사신은 대책이 없자 명부를 고쳐 써서 연루된 자들이 모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유기는 어려서부터 비상하게 총명하였다. 그의 스승 정복초(鄭復初)는 유기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조상이 덕을 두껍게 쌓았으니, 이 아들이 반드시 가문을 빛낼 겁니다”라고 말했다. 원 문종 지순(至順) 연간에 유기는 진사에 급제해 고안(高安)현 승(丞)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기간 청렴하고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에 행성(行省)에서 그를 발탁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강절(江浙)유학 부제거(副提舉)에 임명되었으나, 어사(禦史)의 직무 유기를 논하다가 대신의 저지를 받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기는 경전과 역사에 박통하였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특히 상위(象緯 천문과 성수에 관한 학문)에 정통하였다. 서촉(西蜀)의 조천택(趙天澤)은 강좌(江左 장강 이남을 가리킴)의 인물을 논하며 유기를 으뜸으로 꼽았고, 그를 제갈공명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현을 약탈하니 관부에서 제어할 수 없었다. 행성에서는 다시 유기를 원수부 도사(都事)로 징집했다. 유기는 경원(慶元) 등지에 성을 쌓아 적병을 압박하여 방국진의 기세를 꺾을 것을 제안했다. 좌승상 첩리첩목아(帖裡帖木兒 테무르)가 방국진을 회유하려 하자, 유기는 “방씨 형제가 먼저 난을 일으켰으니 처단하지 않으면 후세를 징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방국진이 두려워하며 유기에게 두터운 뇌물을 보냈으나 유기는 받지 않았다. 이에 방국진은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 관련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결국 조정은 조서를 내려 방국진을 회유하고 관직을 내렸으며, 오히려 유기가 상벌을 멋대로 휘둘렀다고 질책하니 방씨의 교만함이 더욱 심해졌다.
얼마 후 산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행성은 다시 유기를 파견해 토벌하게 했고, 행원판(行院判) 석말의손(石抹宜孫)과 함께 처주(處州)를 지키게 했다. 경략사 이국봉(李國鳳)이 그의 공로를 보고했으나, 권세가들이 방국진과의 인연 때문에 그를 배척하여 총관부 판(判)이라는 낮은 관직만 주고 군사 작전에는 참여시키지 않았다. 유기는 이에 관직을 버리고 청전(青田)으로 돌아가 《욱리자(鬱離子)》를 저술하며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당시 방국진을 피해 달아난 이들이 다투어 유기에게 의지하자, 유기가 군사를 배치하니 적병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금화(金華)를 함락시키고 괄창(括蒼)을 평정한 후, 유기와 송렴(宋濂) 등의 명성을 듣고 예물을 갖추어 초빙했다. 유기가 응하지 않자 총제 손염(孫炎)이 다시 편지를 써서 간곡히 청하니 유기가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도착한 후 유기는 시무 18책(時務十八策)을 진술했다. 명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예현관(禮賢館)을 지어 유기 일행을 머물게 하고 극진히 대우했다.
기병한 초기 태조는 한림아(韓林兒)가 송(宋) 황실의 후예라고 자처했기에 그를 따르고 있었다. 연초에 중서성에서 어좌(禦座)를 설치하고 절을 올리는데 유기 혼자만 절을 하지 않으며 “그는 일개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어찌 그를 받드는가!”라고 말했다. 이어 태조를 만나 천명이 머무는 곳을 진술했다. 태조가 천하를 취할 대계를 묻자 유기가 답했다.
“장사성(張士誠)은 스스로 지키며 잡히기만을 기다리는 자이니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진우량(陳友諒)은 주인을 겁박하고 부하를 위협하니 명분이 바르지 않으나, 장강 상류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간절하니 먼저 그를 쳐야 합니다. 진씨가 멸망하면 장씨는 고립되어 단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북쪽 중원을 향하면 왕업(王業)을 이룰 수 있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선생에게 주도면밀한 계책이 있으니 아끼지 마시오”라고 했다.
마침 진우량이 태평(太平)을 함락시키고 동쪽으로 내려오려 하여 기세가 대단했다. 장수들 중에는 항복하거나 종산(鍾山)으로 도망쳐 지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유기만 눈을 부릅뜬 채 말이 없었다. 태조가 내실로 부르자 유기가 흥분해서 말했다.
“항복이나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은 참수해야 합니다.“
태조가 물었다. “선생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유기는 “적병이 교만해졌으니 그들이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복병으로 공격하면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천도(天道)는 나중에 움직여 제압해서 승리하는 것이니, 위엄으로 적을 제압하고 왕업을 이루는 것이 이 한 번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태조는 그의 계책을 채택하여 진우량을 유인해 대파하고 유기에게 큰 상을 내렸으나 유기는 사양했다. 진우량의 군사가 다시 안경(安慶)을 함락시키자 태조가 직접 정벌하려 하며 유기에게 물었다. 유기가 적극 찬성하여 안경을 공격했으나 밤낮으로 함락되지 않자, 유기는 태조에게 즉시 강주(江州)로 가서 진우량의 근거지를 치자고 건의했다.
진우량은 이 수에 대응하지 못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무창(武昌)으로 도망갔으며 강주는 투항했다. 용흥(龍興)을 지키던 진우량의 장수 호미(胡美)가 아들을 보내 군대를 해산하지 않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태조가 난처해했는데, 유기가 뒤에서 태조의 의자를 발로 차니 태조가 깨닫고 허락했다. 호미가 투항하자 강서(江西)의 여러 군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기가 모친상을 당했으나 전란 중이라 감히 말하지 못하다가 이때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 지내기를 청했다. 마침 묘족 군사가 반란을 일으켜 금화와 처주를 지키던 장수 호대해(胡大海), 경재성(耿再成) 등을 살해하니 절동(浙東) 지방이 요동쳤다. 유기는 구주(衢州)에 이르러 수장(守將 지키는 장수) 하의(夏毅)를 위해 속현들을 위무하고, 평장사 소영(邵榮) 등과 의논해 처주를 수복하니 반란이 평정되었다.
방국진은 평소 유기를 두려워하여 조문을 보냈는데, 유기는 답장을 보내 태조의 위엄과 덕망을 알리니 방국진이 비로소 공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태조는 여러 차례 유기의 집으로 편지를 보내 군국대사를 물었고, 유기의 답변은 조리 정연하여 모두 기틀에 부합했다. 얼마 후 경성(京城 지금의 남경)으로 급히 복귀했는데 마침 태조가 직접 안풍(安豐)을 구원하려 했다. 유기는 “진우량과 장사성이 우리의 빈틈을 노리고 있으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으나 태조는 듣지 않았다. 진우량은 이 틈을 타 홍도(洪都 지금의 남창)를 포위 공격했다.
태조는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거의 대계를 그르칠 뻔했소”라고 사과했다. 태조는 직접 홍도를 구원하러 가 파양호에서 진우량과 대전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 접전했다. 태조가 의자에 앉아 독전할 때 유기가 곁을 지키다 갑자기 뛰어오르며 소리쳐 태조에게 다른 배로 옮겨 타기를 재촉했다. 태조가 급히 배를 옮겨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날아온 포탄이 원래 탔던 어선에 명중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높은 배에 타고 이를 보던 진우량은 크게 기뻐했으나, 태조의 배가 더욱 거세게 진격하자 적군이 모두 경악했다. 당시 호수에서 양군이 대치하여 사흘간 승부가 나지 않자, 유기는 군대를 호구(湖口)로 옮겨 적의 길목을 차단하고 오행 중 ‘목(木)’의 상극인 ‘금(金)’의 날을 골라 결전할 것을 청하니, 결국 진우량은 도망치다 전사했다. 이후 태조가 장사성의 군대를 취하고 중원을 북벌하여 제업(帝業)을 이룬 것은 모두 유기의 계책과 일치했다.
오(吳) 원년(1364년), 유기를 태사령(太史令)에 임명하자 그는 《무신대통력(戊申大統曆)》을 올리며 형혹성(화성)이 심수(心宿)에 머물고 있으니 황제는 조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가뭄이 들자 정체된 사건들을 심결(審決)하라고 청하니, 황제가 즉시 유기에게 원통한 옥사를 평결하게 하였고 곧이어 큰비가 쏟아졌다. 이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법령을 세울 것을 요청했다.
태조가 누군가에게 형벌을 내리려 하자 유기가 이유를 물었고, 태조는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했다. 유기는 “이것은 땅과 군중을 얻을 징조이니 형벌을 멈추고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사흘 뒤 해녕(海寧)이 항복해왔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죄수들을 모두 유기에게 맡겨 풀어주게 했다. 얼마 후 유기를 어사중승 겸 태사령으로 삼았다.
태조가 제위에 오르자 유기는 군위법(軍衛法) 세우기를 주청했다. 태조가 처주의 세금을 정할 때 송조 제도에 따라 1무당 5홉을 더하게 했으나, 유기의 고향인 청전만은 예외로 하며 “백온의 고향 사람들에게 대대로 미담이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황제가 변량(汴梁)을 순시할 때 유기는 좌승상 이선장(李善長)과 함께 경성을 지켰다.
유기는 송·원이 너그러움 때문에 천하를 잃었으니 이제 기강을 엄격히 해야 한다며, 어사들에게 백관의 과실을 가감 없이 탄핵하게 했다. 숙위 환관이 잘못을 저지르면 황태자에게 보고하여 법대로 처벌하니 사람들이 그의 엄격함을 두려워했다.
중서성 도사(都事) 이빈(李彬)이 탐욕을 부려 죄를 지었는데 선장이 평소 이를 숨겨주며 처벌을 늦춰달라 청했다. 유기는 듣지 않고 급히 상소했고 황제가 이를 비준했다. 마침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는데 즉시 범인을 처형했다. 이 일로 이선장과 원한을 맺게 되었다.
황제가 돌아오자 이선장은 유기가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모함했고, 유기를 미워하던 자들도 가세하여 무고했다. 마침 유기가 가뭄 때문에 정사를 건의하며 “전사한 병사들의 아내 수만 명을 별도의 영(營)에 가두어 음기가 맺혔고, 죽은 공장들의 유골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항복한 오나라 관리들을 군호(軍戶)로 편입시킨 것이 화기를 방해합니다”라고 상소했다. 황제가 채택했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자 크게 노했다.
마침 유기가 상처하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당시 황제는 중도(中都 안휘 봉양)를 건설하고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 코코 테무르)을 멸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유기는 떠나기 전 “풍양이 비록 황제의 고향이나 도읍지로 적당하지 않으며, 왕보보(王保保 확곽)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상소했다. 얼마 후 서방 전쟁에서 패하고 확곽은 사막으로 달아나 변방의 우환이 되었다. 그해 겨울 황제는 조서를 내려 유기의 공훈을 기리고 경성으로 불러 큰 상을 내렸으며, 유기의 조부와 부친을 모두 영가군공(永嘉郡公)으로 추증했다. 여러 차례 유기의 작위를 높이려 했으나 유기는 끝내 거절했다.
당초 태조가 어떤 일로 승상 이선장을 질책하자 유기가 “선장은 훈구 공신이니 여러 장수들을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두둔했다.
태조가 “그가 여러 번 그대를 해치려 했는데도 편을 드는가?”라고 묻자 유기는 머리를 조아리며 “이는 기둥을 바꾸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큰 나무를 얻어야 합니다. 작은 나무들을 묶어 기둥을 삼으면 즉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선장이 파직되자 황제는 양헌(楊憲)을 상국(相國)으로 삼으려 했다. 양헌은 평소 유기와 친했으나 유기는 결연히 반대하며 “양헌은 재상의 재능은 있으나 재상의 그릇이 안 됩니다. 재상은 마음을 물과 같이 하여 의리로 저울질하며 스스로 관여하지 않아야 하는데 양헌은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왕광양(汪廣洋)에 대해 묻자 “양헌보다 도량이 좁습니다”라고 했고, 호유용(胡惟庸)은 어떤지 묻자 “수레를 몰게 하면 수레 끌채를 찢어버릴까 걱정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나의 재상으로는 선생만 한 이가 없소”라고 하자 유기는 “저는 악을 너무 미워하고 번거로운 일을 견디지 못하니 재상이 되면 황은(皇恩)을 저버릴 것입니다. 천하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명주(明主)께서 유심히 찾으시면 반드시 있을 것이나 현재 거론된 이들은 적임자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훗날 양헌, 광양, 유용은 모두 패망했다.
홍무 3년, 유기가 홍문관 학사를 제수받았다. 11월 공신을 크게 봉할 때 유기를 ‘개국익운수정문신(開國翊運守正文臣)’, 자선대부, 상호군(上護軍)으로 삼고 성의백(誠意伯)에 봉하며 봉록 240석을 내렸다. 이듬해 황제는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허락했다.
황제는 친필 편지로 천상(天象)을 묻곤 했다. 유기는 조목조목 답하고 초고는 불태웠다. 대개 “눈서리가 내린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오듯, 국위가 바로 섰으니 이제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유기는 태조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며 일 처리가 신통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여 남들과 마찰이 잦았다.
낙향 후 산속에 은거하며 술과 바둑을 즐길 뿐 공로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현령이 만나기를 청해도 거절하자, 현령이 평복을 입고 나무꾼으로 변장하여 유기를 찾았다. 유기가 발을 씻고 있다가 조카를 시켜 초가로 안내하고 기장밥을 대접했다.
현령이 “제가 청전 지현(知縣)입니다”라고 밝히자 유기는 깜짝 놀라 일어나 자신을 초민(草民)이라 칭하며 끝내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이토록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결국 호유용에게 중상을 입었다.
처음에 유기(劉基)는 구(甌)와 괄(括) 사이에 담양(談洋)이라 불리는 빈터가 있는데 남쪽으로 복건(福建) 접경에 닿아 있어 소금 도적의 소굴이 되고 있으며 방(方)씨 가문의 재산 지주가 되니 순검사(巡檢司)를 설치해 방비함으로써 간사한 백성들이 편치 못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마침 명양(茗洋)에서 도망친 군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관리가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유기는 장남 유련(劉璉)을 시켜 이 일을 상주하게 하였는데 중서성(中書省)에 먼저 보고하지 않았다. 호유용(胡惟庸)은 당시 좌승상(左丞)으로 중서성 사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이전의 원한까지 더해져 관리를 사주해 유기를 무고하기를 담양 땅에는 왕기(王氣)가 있어 유기가 묘지로 삼으려 도모했으나 백성들이 주지 않자 순검사를 세워 백성을 쫓아내려 한다고 하였다.
황제는 비록 유기에게 죄를 주진 않았으나 다소 마음이 움직여 유기의 봉록을 박탈하였다. 유기는 두려워하며 입궐하여 사죄하였고 이에 경성에 머물며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유용이 재상이 되자 유기는 크게 우려하며 “내 말이 옳지 않기를 바라니 그렇다면 곧 창생의 복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근심과 분노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였다. 홍무 8년 3월에 황제가 친히 글을 지어 그에게 하사하고 사자를 파견해 그를 호송하여 귀가하게 하였다. 집에 도착한 후 병세가 위중해지자 《천문서(天文書)》를 아들 유련에게 전수하며 말하기를 “속히 이것을 보내고 후인들이 배우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차남 유경(劉璟)에게 말하기를 “정치를 함에 너그럽고 엄함은 순환함과 같다. 지금의 급선무는 덕을 닦고 형벌을 덜어 하늘에 기도하여 천명을 영구히 하는 데 있다. 각 형세가 뛰어난 요지는 마땅히 경사(京師)와 기세를 연락해야 한다. 내가 유표(遺表 죽기 전에 유언으로 쓰는 표문)를 쓰고자 하나 호유용이 있으니 유익함이 없다. 호유용이 패한 후에 황제께서 필시 나를 생각하실 것이니 만약 묻는 바가 있다면 이것을 황제께 밀주하거라”라고 하였다. 한 달이 지나 유기가 서거하니 향년 65세였다.
유기가 경성에서 병석에 있을 때 호유용이 의사를 보냈는데, 그 약을 마신 뒤 뱃속에 주먹만 한 덩어리가 맺혔다. 훗날 중승(中丞) 도절(塗節)이 호유용의 반역을 고발하며 그가 유기에게 독을 써서 죽게 했다고 폭로했다.
유기는 구슬 같은 수염에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기개가 높고 천하의 안위를 논할 때면 정의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황제는 그의 지성(至誠)을 보고 심복으로 삼았다. 유기를 부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비밀리에 대화했다. 유기 또한 이를 다시 없을 인연이라 여겨 아는 바를 다 말했다. 급박한 난관에 부닥치면 용기를 발휘하여 계책을 세우니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었다. 틈이 나면 상세히 왕도를 진술했다.
황제는 늘 공경히 경청하며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노선생(老先生)’이라 불렀으며, “그는 나의 자방(장량)이다”, 또한 “늘 공자님 말씀으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칭송했다. 장막 안에서의 대화는 매우 비밀스러워 아는 이가 없었고, 세상에 전해지는 신기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음양과 풍각(風角)에 관한 설이나 그것이 유기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아니다.
그의 문장은 기세가 창성하고 기이해서 송렴과 더불어 일대(一代)의 종주로 꼽힌다. 저서로는 《복부집(覆瓿集)》, 《이미공집(犁眉公集)》이 세상에 전한다. 아들로는 유련과 유장이 있다.
원문위치: http://big5.zhengjian.org/node/42438
